사랑의 묵비권

누가복음 23:6-12

정진우 목사

여러분들도 신문에서 보셨겠지만 며칠 전 문화방송의 피디 한분이 소위 광우병 보도와 관련해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피디란 사람이 억울해서였는지 경찰의 조사에 한마디도 응하지 않고 묵비권이라는 것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묵비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 말 안 할 권리! 그것을 소위 묵비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런 묵비권을 행사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재판을 받는 일련의 과정을 보도하는 내용입니다.

처음에 빌라도에게 끌려갑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서 이 재판에서 손을 떼려고 합니다.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 관할구역이 아니라는 핑계로 헤롯에게 보냅니다. 6절과 7절의 이야기는 그런 사정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넘겨받은 헤롯은 평소 예수의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9절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여러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여러분,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평소 논쟁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셨던 분이 아니었습니까? 저 못된 율법학자들의 까다로운 질문들을 보기 좋게 물리치시던 예수님이 아닙니까? 멋진 산상수훈의 교훈도 가슴에 남아 있고 여러 가지 생생한 비유들도 우리는 다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분, 논쟁이라면 누구와도 두렵지 않는 분, 도대체 언어라는 것이 생긴 지 얼마나 오래인지 모르지만 언어가 생긴 이래 말이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 예수님처럼 말 잘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억울한 일 앞에서 예수는 오직 침묵합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의 기소장 모두 헛것이야!” 그렇게 고함이라도 질러야 속이 풀릴 상황이 아닙니까? 모두가 핏발선 눈동자로 예수를 고발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가만히 보면 모두가 예수를 가운데 두고 얼마나 치열한 공격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빌라도, 헤롯,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모두가 예수를 물고 뜯고 있지 않습니까? 비난의 홍수! 그런데 이 억울한 일 한 가운데 예수는 그저 침묵합니다. 예수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입니까?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평소 재미난 이야기도 잘 하시고 또 어려운 문제도 쉽게 가르쳐 주기도 하시던 분이, 그렇게 멋진 논쟁으로 적대자들을 물리치시던 예수님이 오늘 이 대목에서 이렇게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평소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이 침묵, 이 고요란 무슨 의미입니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써 묵비권을 행사하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 예수의 묵비권은 그런 묵비권이 아닙니다. 당시 그런 묵비권이라는 근대적 법 개념이 있을 리도 없는 시절이고 예수가 자신을 방어해서 무슨 이득을 볼 자리도 아닙니다. 오늘 예수의 묵비권은 그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하는 그런 묵비권이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아주 존경받는 스님 한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처녀 하나가 있었는데 그만 아기를 갖게 된 것이 드러났습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해서 처녀를 다그치니 그 중의 아이를 배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달이 차서 처녀가 아기를 낳자 그 아버지는 딸과 함께 아기를 데리고 그 중을 찾아가서 갖은 욕을 퍼부으며 아기를 넘겨주었습니다. 처녀 아버지의 욕을 다 듣고는 중이 하는 말이 “아 그러십니까.” 하는 한 마디뿐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그 중은 아이를 양육하느라고 동네 아주머니들을 찾아다니면서 젖동냥을 하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욕설을 퍼 부으면서 조롱할 때마다 “저는 죄인이지만 아기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면서 젖을 얻어 먹여 키웠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 일 년쯤 지났을 때 그 처녀는 마음이 괴로워 아버지에게 진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그 아기의 진짜 애비는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아무개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딸을 데리고 그 중을 찾아가 죽을죄를 지었노라고 빌었습니다. 스님이 아기를 건네주며 한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 그러십니까?’ 하는 한 마디 뿐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같으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소리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훗날 진실이 드러난 후에라도 무슨 말을 좀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다못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든지 진실은 승리하다든지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 라든지 하여튼 무슨 시끄러운 뒷말들이 무성하지 않았겠습니까? 요즘 같으면 이런 것 가지고 아마도 간증집회 같은 것을 하고 다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그 모든 시끄러운 논쟁은 말끔히 지워져 있습니다. 누명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요셉이 생각나기도 하고 오늘 아주 조용히 자신의 십자가를 해야 한 걸음한 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전도서는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입을 다물어 고요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 그분은 지금이야말로 침묵할 때임을 안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십자가를 앞에 둔 지금은 말해야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인류 구원을 위한 결정적 시간이 째깍 째깍 다가오는 지금은 말로써, 성명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 사랑을 드러내는 지금은 그런 한가한 논과 설을 펼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 사랑의 징표가 아닙니까? 그 십자가를 앞에 둔 지금 그 사랑을 완성해야 하는 지금, 지금 이 시각은 침묵의 시간이라고 참 사랑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고 예수님의 이 말없음은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진정으로 큰 사랑은 침묵으로만 말하는 것!

오늘 예수님의 묵비권은 그래서 사랑의 묵비권입니다. 진정으로 큰사랑을 하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없는 사랑! 침묵할 권한을 행사하는 사랑!

말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모든 언어를 넘어서야 할 그 자리가 있음을 알기에, 언어를 버림으로써만 참된 사랑이 완성되는 길이 있음을 알기에! 오늘 예수는 침묵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말을 잃는다. 이 침묵은 가장 큰 사랑을 가진 자만이 갖는 특권 그래서 사랑의 묵비권입니다. 

만약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사랑학 개론이나 사랑의 기술 같은 멋진 제목의 책을 쓰는 것이었다면 오늘 그분이 여기 우리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화려한 미사여구로 해박한 지식으로 혹은 아름다운 노래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 분을 신앙할 수 있겠습니까? 기분이야 좋겠지만 그것은 구원의 징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핏자국이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온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못 자국이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고요 가운데 완성되고 침묵 속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사랑하였기에 침묵하였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완성을 위해 나 오늘 입을 다물고 언어를 버립니다. 예수의 폐부 깊숙한 곳을 흐르는 언어를 읽어 볼 줄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에는 진정한 사랑에는 가장 큰 권한, 침묵할 권한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묵비권, 사랑하였으므로 침묵하였다. 사랑을 완성하는 자리에서 침묵함으로써 모든 언어를 넘어서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 는 지난 주 한 목사님의 간증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 분이 고등학교 시절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성탄절에 남자 성가대가 부족한 아주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절 칸타타를 공연하려는데 남자 대원이 부족해서 고등부 학생들이 특별히 차출되어 어른 성가대와 함께 연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지독히 추운 날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연습이 아주 늦게 끝나게 되었습니다. 집이 가까운 그분이 연습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뛰어가 아랫목에 몸을 녹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습이 끝난 후 날씨가 너무 춥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길이 위험하니 고등학생들은 청년부 누나들을 한사람씩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가라는 성가대장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필 그 학생이 바래다 주어야할 대원은 교회에서 아주 먼 곳에 살던 누나였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집 따듯한 아랫목이 옆에 있는데 지지리도 복이 없다.’ 속으로 불평이 나왔지만 함부로 그걸 드러낼 수 도 없는 처지여서 뒤틀린 심사로 말도 없이 한발 앞서 걷기만 했다고 합니다. 큰길로 나와서 길을 건너야 하는데 건널목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냥 무단횡단을 하려고 하는데 그 누나는 멀리 떨어져 뒤따라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쳤습니다. “누나 빨리 따라와요.” 그러면서 쏜살같이 뛰어서 건너편 보도로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타어어가 터질 듯한 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함께 누나의 악보는 하늘로 올라가고 사람을 친 노란 택시는 뺑소니를 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쓰러진 누나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골반 뼈가 두 동강이가 나고 이빨이 4개가 부러진 중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피를 흘리며 그렇게 큰 중상을 입은 그 누나가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바로 그 누나의 집에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한 번도 교회에 다녀 본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다급하게 병원으로 뛰어 온 부모님에게 그 누나는 온 힘을 다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 내가 교회에서 성가연습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마침 지나가는 우리교회 저 학생이 발견하고 차를 세워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정말 고마운 학생이에요. 아빠도 고맙다고 인사 하세요.” 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 누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우리는 그분에게서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그분 사랑을 통해 어떤 용서를 받았습니까? 우리가 그분에게서 십자가를 통한 사랑과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는 또 어떤 사랑과 용서를 나누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혹은 그 사랑을 베풀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 입술로 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 큰 사랑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는데 십자가를 지기까지 사랑하셨다. 그게 성경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사랑, 그냥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꿈꾸며 살아갑니까? 진실로 우리를 이 죄악의 세상에서 구원해 낼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이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사랑은 또 어떤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사랑이 언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 다시 십자가 밑에서 사랑의 길을 찾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눈뜨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침묵함으로서 완성되는 말없이 하는 사랑, 언어를 넘어서야 도달하는 그 사랑을 새롭게 배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없는 그 사랑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구원을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진우 위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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