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헌 박사는 한신대와 클레어몽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하셨고, 과정사상연구소에서도 연구하신 현 한신대 강사님이십니다. 이미 "신학의 위기와 교회의 위기", "도대체 정통신학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 사랑의 힘과 지식" 등을 연재해주셨는데, 앞으로 40여회에 걸쳐 새로운 주제의 신학이야기를 연재해주실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가 됩니다.

1.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 연재를 시작하며

필자는 앞으로 40여회에 걸쳐 민중신학의 유산을 재해석하고, 그 전통을 새롭게 이어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 방법론은 민중신학의 핵심사상을 (갈등이론이 아닌) 유기체적 관계론의 시각에서 풀어내서, 그 사상이 지닌 본질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이 연재 글은 [Minjung and Process]라는 제목으로 영어권 학계에 이미 발표한 책(Peter Lang 출판사, 2009년)을 기초로 삼고 있다. 영문 제목이 암시하듯 두 가지의 신학적 관심이 글의 방향을 주도한다. 하나는 “민중”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본원적인 열망 즉, 삶의 권리를 빼앗긴 채 주변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역사의 미래(와 그 너머)를 희망하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과정사상”이라는 관계론적 유기체철학을 통해 이 해석과 희망의 작업을 가능하게 할 포괄적인 사상 지평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두 관심사를 결합하여 신학하려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우선 이 두 관심사가 시대적으로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저마다 자신의 목적과 뜻을 가지고 시대를 읽어내겠지만) 필자에게 21세기의 신학은 <해방>과 <다원성>이라는 두 주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쪽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제 신학이 자신의 해석학적 풍요로움과 시대적 의미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해방>과 <다원성>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일관되고 단호하게 붙들어내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 두 가치가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해방>이란 성서의 뿌리 깊은 전통이요, <다원성>이란 유기체적 관계를 지닌 모든 생명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 유지해야 할 핵심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치를 동시에 붙잡아 보겠다는 이 글의 성공여부는 연재가 끝나갈 무렵 독자들이 판단하겠지만, 이 작업의 필요성을 밝힘으로써 이 글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할 책임은 일단 필자에게 있다 하겠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의 이유와 연관되어 있다. 해방과 다원성이라는 가치를 결합하여 신학적 방법론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이유는 소위 교회의 신학이라는 전통신학(혹은 정통신학)이 이 신학적 사명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적 근대라는 시기를 지나오면서 기독교 신학은 <교회의 신학>으로 위축되었고, 기독교 사상은 교회를 넘어서는 해방의 과제를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소심해져 버렸다. 소심해지다 못해 도리어 타락하였고, 타락하다가 스스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세상은 교회를 버렸고, 소위 정통신학은 스스로 근본주의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자살하였다. 이제 세속주의의 망망대해에서 창문 한 번 활짝 열지 못한 채 떠다니는 저 가련한 구원의 방주는 <해방>이라는 성서의 근본 주제를 자신 안에서 복원시키고, 또한 <다원성>이라는 생명의 기본 관계를 마련함으로써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받는 이 경험을 통해서만 참된 구원을 선포하는 기관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정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민중신학을 재해석/재구성하려는 이 글의 일차적인 의도는 교회의 갱신이요 세상과의 소통이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과거의 민중신학은 스스로를 한정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민중사건에 대한 증언과 민중운동에로의 참여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을 성공시켰지만, 교회적 풍요로움을 형성시키는 일에는 소홀하였다.

<해방>과 <다원성>이라는 가치의 대척점에 있다할 수 있는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킨 한국교회를 볼 때, 혹자는 나에게 이상주의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나는 교회를 넉넉한 품을 가진 부모와 같은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세상과 소통하고 해방의 꿈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 또한 교회를 갱신하는 일과 별개가 아니라고 믿는다. 민중신학은 이제 교회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아니 교회가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민중신학의 정신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신학)의 갱신이라는 이 글의 과제는 단순히 <개혁주의적 원리>라는 또 다른 개신교적 도그마에 갇히곤 했던 지난 시기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지 않을까싶다. 다른 것이라면 어디까지 갱신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역사는 과거라는 젖을 먹고 자라면서도, 다른 한편 과거의 무게로 인해 탄식한다. 따라서 역사는 갱신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기독교 사상 안에 축적된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열정은 크지만, 낡은 유산을 청산하는 일에는 인색하다. 그것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교의 운명에 깊이 유념하는 아들딸이 많지 않고, 도둑이 들까봐 잔뜩 주눅 든 채 집이나 지키자는 종들, 아니면 곡간을 불리는 노역에서만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단순한 종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낳은 자유의 아들딸은 부모가 남긴 가장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곡간의 재물을 사용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 가장 큰 가치가 기독교적 영감의 원천인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라면, 또한 그것은 오늘날 해방과 다원성이라는 가치를 통해 온전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정신학은 이 신학적 갱신의 과제에서 그 근원적 깊이가 어디까지일지를 가늠케 해준다. 연재가 진행되면서 과정신학사상의 특징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선언적인 언급만 하려한다. 과정신학은 독창적 존재론과 우주론에 입각하여 해석학적 생동감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해낸다. 과정신학은 유기체적 관계성에 입각하여 사물의 존재와 운동방식을 이해하고, 신과 세계의 상호내재와 상호초월이라는 역동적 개념으로 우주와 역사를 설명함으로써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근원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그리하여 기독교 전통신학이 이원론적 실체철학에 근거함으로써 파생시킨 여러 가지 신학적 난관을 헤쳐갈 수 있는 지혜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신과 세계, 섭리와 진화, 신성과 인성, 구속사와 세속사, 구원과 해방, 믿음과 행함 등등 기독교 신학이 역동적 관계론의 범주에서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 실체철학적 전제로 인해 도리어 문제를 심화시켰던 신학의 근본주제들을 새롭게 통찰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은 서로 대화할 수 있는가? 전통신학 진영에 있는 한 비평가는 필자의 시도를 가리켜 집안의 배경이 완전히 다른 양가를 혼인시키려는 부질없는 시도라고 한 적 있다. 그러나 혼인은 가문끼리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참된 가치를 직시하는 연인끼리 하는 것이다.

비록 민중신학이 운동의 신학으로 출발하였고 과정신학이 사색의 신학으로 출발하였지만, 둘 다 신과 세계의 관계를 비이원론적 관계론적 시각에서 보고 있다는 핵심사항에서 일치한다. 그것이 민중신학에서는 민중메시아론으로, 과정신학에서는 범재신론이라는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이 양대 사상으로 서로를 조망하면서 해방과 다양성(혹은 관계성)이라는 이 시대의 가치를 붙들어내려고 할 것이다.

앞으로의 연재는 크게 보면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반부에서는 민중신학 새롭게 읽기를 시도할 것이다. 민중신학을 과거에 익숙한 방식 즉 <증언의 신학>이나 <운동의 신학>으로 형상화시키지 않고, 서구 전통신학이 놓쳤던 그 작업을 가능하도록 했던 신학사상적 뿌리에 천착하여 <신과 세계의 유기체적 관계론에 입각한 신학>으로 재해석할 것이다. 후반부에서는 과정신학의 풍요로운 신학적 사색과의 대화를 통해 21세기에 기독교신학이 나아갈 바를 밝힐 대안사상으로 민중신학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제시할 것이다. (연재 계속)

김희헌(한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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