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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라고 해야 할지, 하나님이라고 해야 할지?신의 이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합당하게 섬겨야
이병일 | 승인 2005.07.31 00:00

 

기독교에서 신의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해야 할지, 하나님이라고 해야 할지” 하는 물음은 계속되었고, 성서를 번역할 때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으며,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 혹은 신학적 성향을 판단할 수 있다고들 한다.

   

▲ 1906년에 발행된 신약과 1910년에 번역완료된 구약을 합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전서가 1911년에 발행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어의 의미를 꿰어 맞추려는 오해와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 중의 한 가지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할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톨릭과 기독교”라고 한다. 마치 개신교만 기독교이거나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는 의지가 앞서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이다.

문제가 불거진건 공동번역?

“하느님과 하나님”의 문제가 크게 드러난 것은 지난 1971년에 출간한 공동번역성서를 번역할 때부터이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위원들이 모여 투표를 통해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신의 이름을 “하느님”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책이 출판되었을 때에 개신교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은 바로 신의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공동번역성서가 나왔을 때 개신교 측의 불만은 “왜 하나님이지 하느님이냐”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써야 옳다면서, 그 이유를 열거하였다. 첫째는 개신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라고 써 왔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야말로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장로교도 하느님을?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 신의 이름을 샹뎨(上帝), 신(神), 천주(天主) 등으로 번역하여 사용했다. 그 중에 하나가 “하ㄴ.님”이다. 위의 이름에서 보듯이 하님은 “하ㄴ.”(하늘, 天)에 존칭호격조사 “님”을 붙여서 된 이름이다. 그런데 오늘날 하느님과 하나님의 논쟁은 우리말 모음체계에서 .가 불안정해지면서 비롯되었다.

   

▲ 1911년에 발행된 셩경젼셔의 이사야서 부분

 .(아래 아)는 소멸되면서 이북에서는 ‘ㅏ’로 이남에서는 ‘ㅡ’로 제주도에서는 ‘ㅗ’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하ㄴ.(아래 아)님도 그 발음상 하나님, 하느님, 하노님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전서(1882년)에는 하나님이라는 형태와 하느님이라는 형태가 함께 사용되었다.

또한 1920-30년대 장로교에서 나온 모든 문헌을 보아도 거의 “하느님”으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신의 이름을 하느님, 하나님, 하노님 중에 어떤 것을 사용하든지 지금의 “하느님”의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하나님'만 고집하는 사람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개신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을 고집하면서 그 의미를 첨가하였다. “하나”는 유일신을 나타내는 말로 “하나”(一)에 존칭호격조사 “님”을 붙여서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하게 되었다고 한다.

좀더 심한 개신교인들 중에는 “하느님”은 영어의 god를 번역한 것으로 범신론적 잡신을 의미하고, “하나님”은 영어의 God를 번역한 것으로 절대성, 유일성, 위대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하나(一)에 생명이 있고 인격을 갖춘 존경사인 “님”을 붙인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신의 이름은 언어마다 다르다!

신의 이름을 유일신의 의미가 강한 “하나님”으로 사용하기를 고집한다면 다른 언어에서도 Hananim 혹은 One을 사용해야 하는가? 신의 이름은 언어마다 다르다. 영어로 God, 라틴어로 Deus, 스페인어로 Dios, 이태리어로 Dio, 중국어로 텐슈(天主)이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一)에 님 붙여서 된 말이라면 하나님의 옛 형태는 “ㅎ.나님”이어야 한다.  .(아래 아)가 사용될 때 하나(一)을 뜻하는 말은 “ㅎ.나”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의 이름에 교리적 아집을 덧씌워 곡해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교리를 위해 신의 이름을! 

이러한 의문과 논쟁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이름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보다도 그 논쟁의 이면을 보아야 한다. 그 이면에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교리의 견고함을 발견할 수 있다. “유일신”이라는 교리가 신의 이름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성령의 기운을 차단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같은 하느님,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개인이나 집단마다 그 이름 뒤에 상정된 신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십계명을 든 모세

‘병을 고쳐 주는 신’, ‘돈과 권력을 얻게 해주는 신’, ‘나의 성공을 위한 신’, ‘내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는 신’, ‘시시콜콜 인간의 모든 일상에 관여하는 신’ 등등 수없이 많은 모습이 같은 신의 이름 속에 숨어 있다. 또한 신의 이름 앞에 붙이는 수식어로 그 신의 정체를 한정할 때도 있다. ‘정의의 신’, ‘사랑의 신’, ‘승리의 신’, ‘유일한 신’, ‘전지전능한 신’ 등등.

물론 인간의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듯이 이러한 수식어 혹은 신의 모습에 의해 속박되는 신은 없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만을 취해서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드는 신의 창조자일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을 교리로 포장하여 소유하려는 행위이다.

신의 이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합당하게 섬겨야

인간은 신의 이름을 알기 원한다. 그 이름을 움직여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려 한다. 우리의 시대는 인간의 편의에 따라 신을 이해하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신을 조정하려는 종교적 상황에 놓여있다. 인간이 다루기 쉬운 곳으로 신을 몰아가고 있다. 결국 인간이 신을 죽이고 있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 ‘신의 최고 목적이 인간을 영화롭고 안락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신을 교리나 자기의 사고에 가두는 것은 신에 관하여 정확하게 생각하고 말하려는 욕망을 갖게 하고, 그 욕망은 신을 자기의 고백적 진술, 교리적 틀 속에 감금하는 것을 묵인하게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신의 이름이 하느님이든지 하나님이든지 그것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그 이름에 합당하게 그 신을 섬기는 일이다.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  미국 남북 전쟁 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이 우리 편에 계시기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했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신의 이름은, 야웨!

히브리 성서에서 신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Ellohim, YHWH이다. 이것이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에 Elohim는 Theos로, YHWH는 Kyrios로 되어 신약성서에서는 주로 Theos와 Kyrios가 사용된다. 히브리 성서에서 YHWH(야웨)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하느님의 고유명사로서 하느님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이곤 교수는 출애굽기에서 스네(떨기나무)를 통하여 자기의 모습을 보여준 이유를 이스라엘의 하느니 야웨는 약한 자, 고난 받는 자, 그리고 눌림 받는 자와 함께 하는 신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야웨는 지배논리를 추종하는 모든 사람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더 강한 불꽃으로 태양열의 위험(태양신 Amon-Re의 화신인 파라오의 억압)으로부터 스네 떨기를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좌절 속에 빠진 모세에게 계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 불타는 떨기나무 앞의 모세

또한 그는 출애굽기 3장 14절을 “나는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구원을) 존재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번역하면서 야웨라는 의미를 “고난 중에서 부르짖는 자에게 구원을 창조해 주는 분”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고난 중에 있는 자를 붙드는 분”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성서에서는 이러한 신의 모습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신을 인간이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할 때에 언제나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회개를 촉구하였다. 지금 인간은 신의 이름을 너무 쉽게 부르고 듣는다. 이름은 존재를 나타내기 때문에 신의 이름을 부르고 듣는 것은 동시에 삶 전체에서 그 존재에 참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야웨의 이름이 선포되는 곳에서 그의 백성이 고통 가운데서 해방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는 고통에 신음하는 또 다른 생명들의 해방을 위해 야웨의 이름을 선포한다.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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