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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교회 운동의 역사적 흐름은 어떠했는가? (1)70~80년대 태동기에서 성장기까지
편집부 | 승인 2005.08.01 00:00

정상시 목사(안민교회)

 

1) 민중교회 태동기, 1970년대

1970 년대의 민중사적 뚜렷한 기점은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 분신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민중계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한 사건이었다. 물론 예언자의 눈과 귀를 가진 이들만 이 계시를 보고 들었다.

사실 그것은 민중의 신음소리였고 들판에서 죽임 당한 아벨의 비명소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치 못했다. 이런 막힌 상황에서 “돌멩이들”이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고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유동우 라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수기를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는 제목으로 “대화”誌에 연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현실을 자각하는 계기를 주었다.

민중의 저항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더욱 억압을 강화하였다. 이른바 유신시대가 그것이다. 민중의 저항은 더욱 조직화되었고 박해 속에 단련되어 갔다. 그러다가 민중의 저항력이 유신체제의 방어력의 둑방을 넘치게 된 사건이 부마(釜馬) 민중항쟁과 이를 계기로 한 10. 26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민중의 고난은 민중 계시 사건이었다.

민중 계시 사건으로서 민중의 고난 현실이 먼저 있었고 그 계시에 응답한 교회가 하나둘 생겼다. N.C.C.를 중심으로 한 사회 참여적 교회의 응답이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교회의 예언자적 역사참여 흐름이 민중교회의 중요한 태생 환경이었다고 할 것이다.

   

▲ 민중은 그 시대의 불의에 맞서 언제나 일어섰다!

도시산업선교회(U.I.M) 활동, 수도권특수선교 위원회 활동, N.C.C. 인권위원회 활동이 그것이다. 기존 교회 중에는 서울제일교회, 창현교회, 한빛교회, 수도교회, 새문안교회, 동대문감리교회 등을 비롯한 서울과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대학부를 중심으로 많은 활동을 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들은 민중교회의 플랫폼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70년대의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새로운 교회에 대한 요구들이 있었고 그 때 여러 교회들이 세워졌다. 성남주민교회(이해학 목사), 사랑방교회(이규상 목사), 활빈교회(김진홍 목사), 형제교회(김동완 목사), 희망교회(정명기 목사), 노동교회(성문밖교회/조지송 목사), 실로암교회(청계천 뚝방교회/모갑경 목사), 동월교회(허병섭 목사), 광야교회(인천 백마교회/ 조화순 목사) 등이었다. 민중교회의 선구적 교회들이었다.

수도권 특수선교 등의 직접적 활동과는 별개로 1977년에는 신명교회가 구로동에 세워졌다. 이들 중에는 없어진 교회도 있고 지금도 열심히 선교하는 교회도 있다. 물론 당시에는 명시적으로 ‘민중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소명을 듣고, 민중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반석 위에 세우는 교회(마16:18) 이었던 것이다.

고난 받는 이들의 기도, 그것이 민중교회였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형태의 교회 외에, 민중의 증언을 듣고 박해를 고발하고 함께 기도하고 또 항의했던 기독교회관의 목요기도회를 중심으로 한 숱한 기도회, 억울함을 당한 이들과 함께 현장과 거리의 많은 기도회, 철거민들의 기도회, 해직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교회(당시 한빛교회당에서 주일오후에 모였다)..... 이들 무정형(無定型)의 교회는 사실 1970년대 민중 현장 속에 세워진 민중의 교회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1980년 이후의 보다 꼴을 갖춘 교회를 형성하고 조직적이고 연대적 운동의 성격을 띤 민중교회와 성격상 구분될 수 있겠지만 이들을 배제한 민중교회 역사정리는 민중교회를 너무 좁은 틀안에 가둔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 하면 민중교회는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원칙을 지켜나가는 교회이기 때문에 때를 따라 그 성격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또 앞으로의 민중교회도 당연히 변해가 것이고 또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절을 좇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2) 민중교회의 성장기, 1980년대

80년대의 사회사적 시대구분은 “광주민중항쟁”이 그 기점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민중교회는 80년대에 형성되었다. 어떻게 보면 1980 년대는 민중교회의 본격적인 대두가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한 특징을 형성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양한 민중의 역사

1986년을 전후로 하여 교단 민중교회 조직들이 형성되고 1988년 7월에는 약 80개의 민중교회가 연합조직을 형성했고 1992년에는 한국민중교회 운동연합의 회원 교회가 115개로 조사되었으나 그 이후 수적 증가는 이루지지 않았다. “한국민중교회 운동연합”은 3개 교단(기장, 예장통합, 감리교) 조직과 12개 지역조직을 바탕으로 조직되어 90년대 초반까지 활발히 활동하다가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연합 활동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민중교회 운동의 퇴조가 아니라 선교 양식의 변화

민중교회 운동의 퇴조라고 단정하기보다 변화된 상황에 따른 선교 양식의 변화라 해야 할 것이다. 독재에 대한 저항의 거대 담론보다 민중의 삶의 자리에 뿌리 내리는 일이 더 시급하게 되었다. 또 선교 형태도 다양하게로 분화되어 분야별 연대활동으로 대치된 측면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민중교회의 특징은 사회 운동적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산업선교회등 기구 중심의 운동을 지양(止揚)하고 교회적 형태 속에서 육화(肉化)시키려 했다는 점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당시 한창 민중교회에서 관심을 모았던 主題들은 “전체운동의 부문 운동으로서의 민중교회”, “외피론”, “조건 활용론” 등이 있었고 차츰 “주체적 민중교회론” “민중교회의 운동성과 교회성”, “민중교회의 영성”등으로 옮겨져 갔다. 그것은 민중교회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80년대 큰 흐름은 사회 운동적 민중교회이었고 민중교회 목회자들도 사회운동에 대한 지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은 부인치 못할 것이다. 시대적 응급 상황에 대한 민중교회의 대응방식이었다.

민중교회는 간이 진료소와 같았다!

전장에서의 간이 진료소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많은 환자(?)들이 밀려왔다. 그 때 민중교회가 시행했던 프로그램은 다양했다. 노동 상담소, 야학, 노동자 문화교실, 맞벌이 가정을 위한 탁아소, 청소년 공부방, 주말진료소, 노동법 강좌 등 다양했으며, 이들 일상 프로그램 외에 각종 지원 사업, 분신, 연행, 투옥 등을 당한 자들을 위한 대책 활동 등이었는데 이런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각 민중교회마다 실무자라고 불리는 활동가들이 한 두 명씩 포진 하고 있었던 것도 당시의 모습일 것이다. 어쨋든 민중의 절규와 신음과 진통에 민중교회도 정말 뒤지지 않는 열심으로 일했던 시기였다고 자부한다.

참고로 필자가 시무하던 안양 박달교회(안민교회)의 당시의 선교 사업을 보면, 안양 노동 상담소, 주말 무료진료소, 노동자 문화교실로서의 기타 반, 영화교실, 청소년 공부방 등이었다. 노동자 영화반의 경우만 해도, 20평 남짓한 공간에 100명 이상이 빼곡히 앉아 채플린의 영화 등을 관람하고 해설 등을 곁들이고 간혹 노래도 함께 하며 진행했었는데 공간이 좁아 베란다에까지 앉고, 신발은 바깥복도와 화장실에 포개어놓고 겨우 앉아 진행하기도 했다.

그 당시 어느 민중교회나 비슷하게 이렇게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음반법, 혹은 노동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민중교회 목회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중교회는 민중 현장과의 相關性(relevance)에 치중하는 과정에서 교회로서의 正體性(identity)에 대한 고민이 점차 많아져 갔다. 그것은 週中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이지만 정작 주일 예배는 극히 제한적인 소수만 모이는 현실 속에서 목회자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고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교회의 正體性을 다시 질문하였다. 민중교회의 신앙문제, 교육훈련문제, 민중교회의 예배론 등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민중교회의 영성회복, 교회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 등의 흐름이 생겨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90년 대 이르러 민중교회의 특징적 흐름으로 더 분명히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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