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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한국 기독교의 미국주의부적절한 모방으로서의 식민지적 무의식
김진호 | 승인 2005.08.01 00:00

<지난 시간에 이어 김진호 목사님의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 그 세 번째 글을 연재한다. 이 글의 연재를 허락해 주신 김진호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평양 신학교 폐교와 서북 중심적 기독교의 몰락

일제 말기 조선 기독교의 주류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서북지역의 기독교였다.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 정도가 평안도와 황해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선교사들의 지역분할 선교정책인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이 지역은 장로교 지역에 속하였다. 따라서 서북지역의 장로교회가 당시 한국 기독교의 주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평양신학교 전경

그리고 앞에서 말한 전투적 근본주의가 가장 극성스러웠던 지역 또한 서북지역이었다. 그런데 신사 참배 문제로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1938년 근본주의의 아성인 평양신학교가 무기 휴교에 들어가고, 그 이론적 지주인 박형룡 등이 만주로 망명하게 되자, 형식상 서북 중심적 기독교는 무너진 듯이 보였다.

 조선신학교의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문제제기

이 틈에 1939년 서울에서 건립된 조선신학교는 근본주의 신학과 선교사들에게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자주적인 신학과 교회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다. 이 학교의 건립에 핵심 역할을 한 김재준은 5개조로 된 일종의 ‘신학 교육 매니페스토’를 발표하였는데, 거기에는 근대적 신학을 여과 없이 소개하고 교수가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학문의 자유’에 관한 신념이 들어있다.

나아가 “분쟁과 증오”를 일삼는 종교 재판식의 감성을 조장하는 신학이 아닌 “신앙과 덕성에 활력을 주는 신학”을 추구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이것은 논리와 의사소통보다 힘과 권력으로 사고를 통제하는 미국계 선교사와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것은 필경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그 속에 조선 기독교도들의 심성에 내장된 식민주의적 무의식을 향한 우려가 내포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서북 중심적 기독교의 반격, 김재준 신학에 대한 진정서 제출

   

▲ 김재준 목사

그러나 해방 직후부터 표면화된 선교사와 근본주의적 신학의 반격은 한국 기독교의 주축은 여전히 서북‘식’의 기독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여기서 서북‘식’ 기독교라는 표현을 쓴 것은 식민지 시대부터 이미 그러한 신학이 초지역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1947년에 다름 아닌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먼저 김재준의 신학교육 이념에 문제를 제기하여 총회에 진정서를 낸 것은 그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곧바로 서북 출신 메이천파가 주축이 된 종교재판이 사태를 이어갔다.

서북식 기독교의 남한 장악은 선교사 중심적 헤게모니의 장악이다!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한 후 대거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도들이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38선 이남지역에서 기독교의 헤게모니 세력이 될 수 있었는지, 나아가 남한 사회 전체를 주도하는 세력의 하나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는, 이제까지 이야기한 식민지시대부터 고착화된 선교사 중심적인 서북식 기독교의 신앙적 헤게모니라는 배후를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앞장의 말미에서 언급한 신사 참배의 트라우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결주의적 근본주의 신앙과 신사 참배 강압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 간의 모순을 체험해야 했던 범서북 기독교 신자들의 트라우마는 해방 직후 월남하기까지 서북 출신 기독교도들이 좌파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경험처럼 일반화함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을 전이시킬 출구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기억을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라는 강력한 체면 효과를 지닌 기억으로 치환함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전이시키는 무의식적 작용이 그들의 트라우마를 ‘자가 치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신사 참배 거부 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직후 출옥하게 된 이들을 지칭하는 ‘출옥 성도’라는 이름의 십자군들은 그러한 기억의 치환을 위한 적절한 계기를 제공해준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감내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배타적인 도덕적 정당성을 담지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그들의 거부 행위의 의미에 대한 모든 토론의 중단을 의미한다.

친일 잔재의 청산이라는 국면적 대의를 업고서 그들과 그 지지자들은 식민지시대에 모든 교회는 죽었다고 선언하고 고강도의 교계 정화를 부르짖는다. 이른바 ‘교회 재건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은 모든 기독교도들이 이 재건운동이 제기한 게임의 룰 속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설명해준다.

트라우마의 시대의 광기

그동안 잘 은폐되어왔던 트라우마가 바야흐로 발광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출옥성도들의 광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무의식 속에 은폐되어온 상처가 도졌다.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신사 참배자라는 자학적 오명을 벗기 위해선 ‘악마’의 등장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배신이 얼치기 악마의 모습이라면, 그것과는 비할 수 없는 진정한 악마, ‘악의 축’이 필요했다. 그 무시무시한 괴물을 향해 모든 ‘성도’들이 단결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악마 말이다.

이 시기에 김재준 탄핵 등 숱한 이단 심판들이 재개된 것은 악마에 대한 시대적 열망과 부합한다. 그러나 진정한 악마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서북 출신 기독교도들의 체험을 자기 체험으로 내재화함으로써 비로소 출현한다. ‘반공’은 이 시기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상흔에 대한 자가치료의 필요에서 요청된 무의식적 기억의 치환 현상의 결과인 것이다.

반공과 근본주의 신앙 간의 행복한 만남, 미국의 등장

그런데 이러한 반공과 근본주의 신앙 간의 ‘행복한 만남’을 위해 또 한 가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미국의 등장이다. 근본주의적인 조선의 기독교도들이 동경해마지 않던 선교사들의 모국인 미국 군대가 한반도에 진군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 정부를 대체한 미 군정청은 자신의 가장 우호적인 협력자를 기독교에서 찾았음이 분명하다.

해방 당시 미국인과의 접촉을 경험했던 거의 유일한 집단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또 적지 않은 이들이 선교사들에 힘입어 미국으로 유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극소수 사람들에 속했으며, 더구나 미국에 가장 우호적인 집단 또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다시 내한한 선교사들은 이들을 군정 당국에 소개해주었다.

강인철에 의하면, 1945년 10월 5일 미 군정청이 임명한 한국인 행정관 11명 중 6명(목사 3명)이 개신교 신자였다고 한다. 또 1946년 12월부터 1947년 8월까지 군정청에 의해 임명된 한국인 고위관료 가운데 50% 이상이 개신교 신자였다. 지방 고위 공직자들의 경우 비율(30% 이상)은 상당히 줄지만 인구대비 기독교 신자의 비율(0.52%)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한편 김상태는 다른 관료들 외에 통역 요원에 관한 정보를 약술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들은 국내 정치세력의 동향을 군정 당국에 소개해 주면서 좌파계열을 폄하하고 우파의 역할을 실제보다 부풀리곤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렇다면 식민지시대 일제의 부역자였던 중하급 관료들을 군정 당국에 소개한 주요 장본인들이 기독교도였다고 추론하는 것이 그리 무리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미국은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현실태?

아무튼 이러한 과정은 한국 기독교와 미국의 상호신뢰 관계를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것은 미시적 차원에서는 쌍방향적이었겠지만, 거시적으로는 일방향적 소통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미국은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현실태에 가까운 것으로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의 한 목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 이후 미군의 국내 진군을 기다리면서 그들을 ‘구원의 천사 미군’이라고 불렀다. 반면 바라지 않던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낙망감과 항전의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것은 미국과 소련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이 두 나라에 대한 선망과 적대가 신앙관으로 고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한반도에서 미국의 시선은 한국 기독교의 시선이었고, 저들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였다. 저들이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열망 또한 자신들의 것으로 내재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계 선교사들에 대한 무의식적 식민의식은 미군정으로 전이되고, 선교사들의 신앙적 메시지는 군정 당국의 사회적 메시지로 환원될 수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하느님 나라와 현실의 유토피아로서 미국이라는 상상적 동일시가 그들의 신앙구조 속에 의미화의 코드로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파간의 반목과 갈등 그리고 분열이 가속화되던 시절, 반공과 친미라는 두 개의 고리는 기독교 각 교파간의 거대한 심성적 연결망이었다. 1949년 당시 최대 교파이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연합하여 ‘합동찬송갗를 만든 것은 그러한 차이 속의 공감이라는 또 다른 예이다. 여기에는 미국 기독교인들이 자기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기는, 백인 우월주의가 들어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포함하여, 미국 대부흥운동기의 수많은 복음성가들이 대대적으로 수록된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결속시키는 신앙적 정체성이 어떤 양상을 지녔는지를 읽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 광화문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사용된 태극기와 성조기

정경(正經, Canon)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을 가진 근본주의적 신자들에게 ‘정통 찬송’이라는 집착은 정경 못지않은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적 비평을 둘러싼 종교재판들처럼 찬송가의 채택 문제도 식민지 시대부터 지속적인 배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미국적인 감성의 공간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사 참배의 트라우마 - 공산주의는 신앙적 악마다!

위에서 ‘출옥성도’ 중심의 교회 재건운동이 촉매제가 되어 신사 참배의 트라우마가 공산주의라는 신앙적 악마를 발명하게 됨으로써 거대한 ‘신앙적 공통감각’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실은 한국 교회사를 다루는 텍스트들은 한결같이 이 시기를 각 기독교 세력간의 분열과 반목의 시대로 기억한다. 게다가 1945년 해방 이후 사회적, 이념적 갈등의 폭발적 양상에서 시작되어 1950년에 전면전으로 발전한 ‘한국전쟁’의 비극적 체험을 겪어내면서, 극도의 불안과 공포 상황에서 신비주의적 소종파 운동들이 크게 확산되었다.

물론 수많은 기독교계 소종파들의 탄생도 이 시기에 있었고, 그들은 기성의 제도종교들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했고 성장했다. 그럼에도 내가 위에서 한국 기독교의 거대한 동질성에 대해 논한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요소들의 네트워크를 말하기 위함이다.

신사 참배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출옥성도들의 활동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공산주의라는 악마의 발명 그리고 이러한 악마의 발명을 가능케 했던 미군정 당국과의 긴밀한 유대라는 네트워크의 배후에는 원인이자 결과이고, 과정을 가능케 한 요소인 근본주의 신앙이 놓여있다. 이것은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모방하려는 식민지적 무의식은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은 조선 사람이 서양 중절모와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부적절한 모방’을 초래했다. 한국적 근본주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은 미국주의를 미국인보다 더욱 호들갑스럽게 추구하고 모방하려는 신앙적 욕망을 낳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힘의 숭배 신앙이 교회의 제도 속에 깊숙이 스며들게 된 것이다.

 

김진호  kjh5594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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