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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해방되지 않았다"[인터뷰]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 김희용 목사
신용철 기자 | 승인 2011.01.31 08:15

   
▲ 23일 오후 전남대 용봉홀에서 열린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후원의 밤 '기억하는 사람들의 희망릴레이'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시민모임 회원들이 '99엔 문제 해결과 근로정신대 협상 기금 마련을 위한 10만 희망릴레이' 선포식을 하고 있다. ⓒ <에큐메니안> 신용철

"해방돼서 고향에 왔어도 위안부라고 손가락질만 하니, 내 평생에 마음먹고 큰 길로 한번 다니지 못하고, 고삿질로 고삿질로만 숨어서... 내가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나라가 해방 되기 1년여 전, "일본에 가면 여학교도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일본인 담임 선생님의 꾀임에 속아 일본으로 건너가 전시 노동력 보충을 위해 쓰여진 13~15세 되는 앳된 조선 소녀들이 있다. 이 어린 조선의 소녀들은 나고야 미쓰비스 중공업, 도야마 후지코시 공장 등에서 하루 8~10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며 반찬이라고는 된장국 단무지 한 조각 먹으며 가슴 시린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해방이 되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이들에게는 "저 집 딸은 일본 갔다 왔다더라"는 말에 오가던 혼담도 번번이 깨지고 말았다. 힘들게 결혼해 가정을 이루기도 했지만 "그 동안 몇 놈이냐 상대했느냐?"며 남편의 부정(不貞) 생각으로 폭력과 함께 대부분 파혼을 당하고 말았다. 이들은 바로 그동안 군 위안부로 가려져 있었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다.

이들 중 원고 8명은 지난 1999년 3월 1일 일본정부와 전범기업 미쓰비스 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2008년 11월 11일 일본 도쿄 최고재판소는 이들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최종 '기각'했다. 이것에 분노한 빛고을 광주 시민들은 2009년 3월 12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시민모임)'을 결성,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에서 208일간 일인시위를 하며 투쟁했다. 그러던 중 일본 정부는 후생연금 탈퇴수당금으로 개인당 '99엔'(약 1,300원)을 지급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내렸고, 시민모임은 미쓰비시와 일본 정부에 13만 4,162명의 항의 서명과 국회의원 100인의 서명을 전달하고 일본 미쓰비스 본사 앞에서 삼보일배를 하며 항의시위를 했다. 이후 미쓰비시는 2010년 7월 14일 "근로정신대 문제에 협의하겠다"는 공식 발표를 하게 되고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도 철수하게 된다.

이런 의미 있는 결실을 이루기까지 시민모임 회원들의 자발적 노력과 수고가 있었다. 22일 오후 전남대학교 용봉문화관에서 열린 시민모임 후원의 밤에서 한 회원은 "그동안 나는 내 식구들과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인생을 접하고선 진정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시민모임 대표인 김희용 목사는 후원의 밤에서 인사말을 통해 "할머니들의 주름이 우리들이 외면해서 생긴 고달픔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랑을 담아내는 항아리가 되도록 함께 해 달라"고 참석자들에게 당부했다.  <에큐메니안>은 미쓰비시측으로부터 뜻 깊은 성과를 얻어내는데 큰 역할을 한 김희용 목사를 23일 오후 전남 광주 운남동에 위치한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만났다.

먼저 근로정신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1944년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제는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인적 물적 자원이 고갈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인적 물적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서 바로 조선에 있는 13~15살 정도의 어린 소녀들을 전범 기업에 끌고 가죠. 공부시켜 주겠다 돈도 벌게 해 주겠다 이렇게 꾀여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끌고 간 곳은 바로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이었던 것이죠.(항공기 제작소) 바로 그 전범기업에 끌려가서 강제 노동 하루 10여 시간씩 일을 하게 되고 다음에 한 푼도 임금을 받지 못하고 고국에 돌아옵니다. 해방이후에 그런 상태로 고국에 돌아오면서 군 위안부 취급을 받고 파란만장하게 살아오신 분들을 근로정신대라고 합니다.

지금 몇 분이 계신가요.

처음 재판을 시작 할 때는 여덟분이 시작을 했었죠.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많습니다. 미쓰비시 중공업에만 300여분이 왔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광주 전남에 계시는 할머니들을 모셨어요. 전국에 많이 계시지만 우선 광주 전남에서 끌려간 할머니들 가운데 광주 전남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들을 모셔서 재판을 한 거죠. 1999년 3월 1일에 소송을 제기하고 10년 만인 2009년에 최고재판을 하게 된거죠. 다 기각이 됐습니다. 그 중 최혜옥 할머니가 재판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셨습니다.

   
▲ 상황극을 하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회원들. ⓒ <에큐메니안> 신용철

그럼 지금 모두 일곱 분이 광주 전남에 계신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 분 중에 한분은 지금 울산에 계십니다. 이분은 할아버지이십니다. 여동생 중의 한분이 1944년 끌려갔는데 나고야에 대규모 지진이 났었던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에 죽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님이 딸이 얼마나 그립겠어요. 그래서 돌아온 여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를 며느리 삼아요. 너는 내 딸처럼 여길란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딸도 근로정신대고 그 다음에 딸 생각해서 결혼시킨 그 며느리도 근로정신대죠. 며느리로 결혼해서 살던 이 할머니가 원고에 참여해요. 그러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남편이 대신 원고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할아버지 같은 경우는 여동생이 죽었으니까 유족이고 부인이 죽었으니까 유족이고 이런 이중의 어떤 아픔이 있는 경우인 거죠. 들어보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어떤 계기가 있어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돕는 이 일을 하시게 되었나요.

개인적으로 제 삶에 마음속으로 세 분의 스승이 모시고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리영희 교수님. 저희 아버지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신앙을 역사화 하신 그런 분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있고 리영희 교수님은 이성과 지성이라는 보다 높은 큰 가치를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존경하고 있고 저희 아버지는 굉장히 신앙은 뜨거우면서도 그 신앙의 뜨거움을 교회 안에서만 발휘하지 않고 교회 밖으로까지 펼치셨던 분이라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을 존경하고 있던 터에 그동안 20년 넘게 목회해 왔던 농촌교회 목회를 정리하고 이제는 농민이라고 하는 계급적 이해를 실현시키는 삶 보다는 도시에서 한국 교회와 사회를 바로잡는 삶을 좀 살아봐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지난 2004년도에 개척을 하러 광주에 왔었지요. 그래서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도 광주에 계신 민족, 민주, 시민운동 진영에 있는 분들과 교류하고 교분을 쌓아가다가 우연히 우리 광주 안에 바로 이 근로정신대 할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 이분들의 삶을 한번 더듬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일본을 갔다 왔어요. 시모노세끼. 나고야 등을 다녀오면서 당시 우리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어떻게 죽었고 죽음 뒤에는 어떻게 처리가 됐는지 등 이런 것들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반일 감정을 갖는 것하고 일본에 직접 가서 느끼는 마음하고 굉장히 달랐어요. 돌아올 때는 큰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돌아오게 됐죠. 광주 안에서 이 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광주라는 곳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80년 5월이 워낙 큰 산이다 보니까 그 뒤에 가려진 역사, 4.19라던지 일제에 강점 되었을 때의 이런 것들은 과거사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뒤로 밀려나고 광주의 5.18만이 크게 부각되는 측면이 있어요. 근로정신대 문제가 과거사지만 이 광주 하늘아래 상처 투성이인 할머니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문제를 부여잡고 사람을 만나고 조직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 일들을 전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하시면서 이에 대한 신앙적 입장 같은 것이 혹시 있으신지요.

그런 것 있쟎아요. 진보적인 신앙이라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산다 나는 이제 수혜를 베푸는 시혜자고 가난한 자는 수혜자고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관계들이 묵인되어지는 어떤 진보적인 운동 또는 종교운동 이런 것들을 극복해 가야 되지 않겠나 이제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스스로 우리와 똑같은 국민과 시민의 위치에서 살아가야 그것이 올바른 인간에 대한 올바른 애정이요 운동이다 하는 철학적 생각이 있었구요. 두 번째 생각은 그 전에는 저도 누구를 위하여 뭘 한다 누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한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상당히 오만이더라구요. 왜 오만이냐 하면 사실은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인데 거기에다가 누구를 위하여 산다고 하는 어떤 희생을 가미시킴으로서 본인의 삶을 예쁘고 드높이게 포장하려는 그런 유혹을 내가 깨뜨려야겠다는 버려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적어도 예수처럼 살아야 누구를 위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가지고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이런 제 신앙적 성찰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것이 교회 안 팎에서 한국교회를 개독교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긍이 갑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인데 이 대통령 뿐만 아니라 역대 정권들 보면 장로도 있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개독교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있기 때문에 수긍을 하지만 내가 믿고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개독교가 아니고 기독교가 결코 개독교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런데도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사죄와 극복하려는 의지가 제 안에는 있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커지고 그런 것을 극복하려는 어떤 영향력이 있었어요. 그런 것을 가지고 교단 안에서 영향을 끼치는 활동보다는 교회와 사회 이런 어떤 것을 자연스럽게 뛰어 넘어 일해 가는 것이 건강하고 자연스런 신앙인이고 개독교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냐 이런 마음에서 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걸 좀 포괄적으로 담아낸다면 저는 21세기 가치가 생명 평화라고 생각하거든요. 성서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나라죠.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산다. 오늘 21세기 용어로 바꿔서 표현한다면 생명 평화를 열어가기 위해서 한다. 그 생명 평화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존중이돼야 하고 그리고 이 다양성은 해방성이 있어야 하고 그 해방성을 위해서는 거친 구호나 또는 비판 보다는 그 해방되지 않는 생명들을 끌어안는 어떤 감수성 이런 것들이 풍성해야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지 않겠나 이런 고백이 저에게 가장 소중한 고백인 것 같습니다.

자료를 보니까 일본에도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돕는 양심적인 시민들이 있던데 그분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일본에는 과거사에 대해 자기의 조국이 가해국이라는 인식을 하고 피해국인 조선인들을 돕고자 하는 단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한번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것만 해도 30개가 넘습니다. 심지어는 조선인들 추모비를 지키는 시민모임도 있더라구요. 이건 사람을 지키는 모임이 아니라 추모비를 지키는 모임이요. 이런 모임들까지 30개가 넘는 걸 조사해 본적이 있는데요. 제가 오늘 근로정신대하고 관련해서 소개하고 싶은 양심 있는 시민단체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입니다. 우리는 이 단체를 줄여서 '나고야 지원회'라고 합니다. 이분들은 지금부터 벌써 24~25년이 됐네요. 그러니까 지난 1988년부터 이 근로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인 단체입니다. 조선 근로정신대 분들을 위해서 만든 단체이지요. 이분들이 최초로 했던 일은 바로 도난카이 지진 때 희생됐던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우는 일이예요.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당시 지진이 났을 때, 일본인들이 훨씬 많이 죽었죠. 그러니까 자기 나라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워요. 거기에 희생자들을 다 새겨 넣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볼 때 창시개명한 조선인들이 보였나봐요. 그래서 조선인들 이름을 찾아보자. 그래서 나고야 지원회 소속 회원 분들이 광주에 왔습니다. 왜 광주로 왔냐면요 광주에 있는 여학생들을 나고야 미쓰비시가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 지금도 한국말 잘 못해요. 물어 물어서 이 사람들 이름을 찾아서 그 창시계명 된 이름을 지우고 한국이름을 새겨줬어요. 현재 회원은 1100명 되고요. 98% 정도가 일본인이죠. 2%정도만 제 2 제 3 재일동포들이 함께 하죠. 또 이 단체는 근로정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동변호단을 조직했습니다. 그 변호단이 40명 정도 됩니다. 그 다음에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199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재판하는 과정에 소요되는 모든 재판비용, 할머니들 일본 왔다갔다하는 비행기 값, 거기 계실 때 체류비용 등 모든 것을 이 단체에서 다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살고 계신 분들을 저희가 알게 된 거예요. 그전에 가졌던 반일감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죠. 그 일본 제국주의 가해국 안에 이런 숭고한 평화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된 것이죠. 그 이후 이 분들과는 연대가 아닌 동지적 관계로 지내고 있습니다. 더 이분들을 소개하자면 이 분들은 '금요행동'이라는 것을 합니다. 그분들이 하고 있는 어떤 행동을 금요행동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지난 2007년부터 만 3년 동안 광주에서 서울보다 더 먼 거리인 나고야에서 도쿄까지 360킬로 거리를 3년 동안 왕복합니다. 도쿄에 있는 미쓰비시 본사에서 매주 금요일 날 항의시위를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행동들이 또 이번 싸움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하나의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고야 지원회의 숭고한 삶을 광주가 어떤 것으로도 보답하려고 합니다. 사랑의 빚을 진 채무자로써 예를 들면 광주시민상 광주인권상 이런 것으로 보답해보려고 합니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후원의 밤 사진전. ⓒ <에큐메니안> 신용철

미쓰비시에 4조 원 가량의 공탁금이 있지 않습니까. 미쓰비시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안 돌려주는지요. 

정치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어서 남쪽에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가 하나 있구요. 두 번째로는 우리 정부가 받아오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사회보장제도가 앞서가지 않습니까. 그 공탁금은 노동자들에게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민연금이나 또는 퇴직금 이런 명목으로 모아뒀던 부분이고 당연히 조선인들에게 돌려줘야 했던 것을 주지 않았던 거죠. 전쟁 중이라 주지 않았던 거죠.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일본이 항복하고 그것들을 다 보고하게 합니다. 그 금액들이 지금 국책은행에 고스란히 있는 거죠. 1965년에 있었던 한일협정 이후 이것을 우리나라 정부가 받아오는 것은 무력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그동안 한일협정이후 다 청구됐다 소멸됐다 그러니까 한일협정이후에 생겨지는 모든 것은 국가적인 모든 청구권은 끝났고 개인 청구권도 마저 끝났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로 이제 이것은 굉장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죠. 그래서 이것을 양국 정부가 건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받아 와야죠. 이것은 개인의 임금 아닙니까. 국가 채무관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일본 정부도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국가 간에 협의를 해서 한일협정 때 우리에게 주었던 유상 3억불 무상 2억불은 우리에게 독립 축하금입니다. 그렇게 국가 간의 협정을 맺어도 개인이 받아야 할 돈은 그것과는 별도로 이것은 돈을 줘야 한다고 일본인들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당연히 일본 정부는 줘야하고 우리나라는 받아와야죠. 99엔도 마찬가지입니다. 99엔도 일본 정부가 이번에 줬습니다. 왜 줬습니까. 그동안 말했던 대로 개인청구권까지 다 소멸되었다고 말하면서 왜 줍니까.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져 버린 거죠. 이런 좋은 호기를 왜 정부가 놓치느냐 말이에요. 정부가 했던 말이 뭔지 압니까. 99엔이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한 1230원 정도 되거든요. 차마 누가 이걸 줍니까 그러니까 19만 9천원주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발언했던 사람이 그 유명한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라는 자입니다. 아무튼 99엔을 일본정부가 줬다는 것은 한일협정이 이건 모순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거라구요. 그 다음에 99엔이 웬 말입니까 그때 당시 50엔이면 황소 한 마리인데, 지금 소 두 마리 값입니다. 그러면 700만원입니다. 사실 99엔이라는 것은 후생연금 탈퇴 수당 금액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입금 중에 10분의 1을 떼다가 나중에 퇴직하면 주는 거거든요. 할머니들이 1944년 5월부터 1945년 10월까지니까 일하셨으니까 18개월 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그 돈이라는 것은 아주 미비한 돈입니다. 지금 시세로 한 700만원 돈을 줘야죠.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도 19만 9천원 주겠다니까 이거 웃긴 이야기죠. 공탁금도 받아와야 되고 99엔도 현재가로 분명게 보상받아야 하죠. 그것을 우리나라 정부가 안 하고 있어요.

이것을 과거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세 가지 입장으로 반론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 나고야 지원회 그 가해국에 있는 양심인들이 지금도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국에 있는 우리들이 과거사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우리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과거사라고 말할 때 제일 먼저 사실관계가 규명이 돼야 하고 두 번째로는 책임자 처벌이 돼야 하고 세 번째로는 피해자 명예 회복이 돼야 하고 네 번째로는 그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배상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는 그 피해자에 대한 기념사업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이뤄져야 만이 과거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하나 짚어보면 태평양 전쟁 등에서 사실규명이 다 됐냐. 그 다음에 책임자 처벌이 됐냐. 그 다음에 피해자가 명예 회복이 됐냐 그 다음에 피해자들 보상과 배상 받았냐. 그 다음에 무슨 기념행사 있냐. 하나도 없다. 어느 것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과거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그것은 60년~70년 전 됐으니까, 오래 됐으니까 잊어버리자 말하는 그런 식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과거사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과거에 경험했던 사건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삶으로 이어졌는가에 판가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려웠던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수모와 고생을 당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으니까 오늘 이 시대에 가난한 백성들이 누구인가 외국인노동자들, 이주민들, 새터민들 성소수자들, 장애인들 그러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성숙한 수준으로 이분들을 대하고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있지 않냐. 그런 역사적 아픔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으로 우리의 인간에 대한 예는 한걸음도 성숙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자꾸 과거사 과거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난 논리적으로도 안 맞고 이건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전 분명하게 이 세 가지 측면에서 과거사라고 얘기할 수 없는 사안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안이다. 피해 할머니들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국가는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해방되지 않았다 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것이 이분들의 65년 삶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사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피해 할머니들이 말하는 것이고 저는 그것을 조금 더 풀어 말씀드린다면 아까 그 세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는데 이것조차도 그 할머니들이 말씀을 한방으로 대신해 말할 수 있죠.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서명 활동에 대해서 자료를 보여 주며 설명하고 있는 시민모임 대표 김희용 목사. ⓒ <에큐메니안> 신용철
시민 모임이 2009년에 결성되었는데 어떻게 결성되었으며 2004년 교회 개척이후 시민모임 결성 전까지 무엇을 하셨는지요.

교회 개척을 한 이유가 교회 하나를 크게 키워보자 이런 것이 아니고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 즉 사랑과 공의,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온전히 고백되어 지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었던 거죠. 그러다보니까 교회 밖의 일 우리 조국의 일은 자연스럽게 내 신앙고백 안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광주의 시민단체와 교류를 하게 되었고 결국 광주 시민센터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광주 시민센터는 광주 지역에 있는 회원들로 구성된 500명이 넘는 시민단체입니다. 이런 시민단체와 교류를 하면서 지역의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건강한 정치 후보들을 육성하고 정치현장에 나아가서 활동할 수 있는 정치운동들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죠. 그런 과정에서 시민센터 회원으로 있던 이국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 시민모임 사무국장을 말입니다. 이때 이 사무국장의 고백이 참 독특했는데요. 그분이 당시 <오마이뉴스> 기자였습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취재하던 중에 할머니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1년에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을 딱 두 번 하는데, 하루는 삼일절이고 하루는 광복절이요."라고요. 할머니들은 기자들이 삼일절이 되면 찾아와 "할머니, 삼일절이 되었는데 어떤 생각이 드세요 물어보고는 그 외에는 사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죠. 이 기자가 그 말을 듣고 그것이 굉장히 가슴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나라도 그런 기자가 돼서는 안 되겠다. 뭔가 이 문제는 지역의 의제로 삼고 운동을 해야 겠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거 아니예요. 당시 광주 시민센터 대표로 내가 있었고 개인의 사적인 일이나 진로 상담을 해 오는 관계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지역에 이런 문제가 있는데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일본 같이 다녀오자. 지역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그러면서 준비위원회가 꾸려지고 그 준비위원회가 꾸려지면서 1차 서명운동으로 28174명 동참하고 그런 서명 운동 한 것을 일본에 가서 미쓰비시에 전달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로정신대에 관한 강연회, 연구모임,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 이런 것들을 해 가면서 회원들을 단합 규합하게 되면서 2009년 3월 12일 결성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시민모임이 해 왔던 일들도 말씀해 주십시오.

시민모임 면면을 보면 모두들 다 직장인입니다. 그리고 주부들이구요. 아주 순수한 시민들입니다.  최근에 어떤 운동권 당에 있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시민모임 활동을 보면서 벤치마칭을 해야겠다. 왜냐하면 요즘 운동권이나 진보진영에서도 굉장히 서열화 되어 있고 공무원 세계처럼 딱딱하고 그렇다. 그런데 이 시민모임은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고 사람냄새가 폴폴난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광주라는 곳이 민주인권 평화의 도시이고 또 변혁운동의 삶을 살든 않든 간에 정의로와야 된다는 것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근로정신대 이야기가 됐을 때, 그분들도 놀랐던 거죠. 사실 위안부는 알고 있었지만 근로정신대는 모르고 있었고 이 문제가 광주의 아픔 속에 있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굉장히 사람들의 맘을 하나로 모아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모임체를 구성하고 나서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서명운동하고 일인시위였습니다. 먼저 서명운동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10만운동을 하게 되었냐면 거기에는 분명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쓰비시가 우리 민족 10만을 끌고 갔고, 두 번째는 이 미쓰비시는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역사의 영원한 미제로 묻혀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에 대해서 우리가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죠. 우리 청소년들이 이 사안을 알고 있다 하는 것을 서명을 통해 받아내서 그들에게 반드시 받아야 할 것을 받고 흐지부지하게 끝나지 않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할 때 서명을 2천명 넘게 하루에 받은 적도 있었어요. 보통 우리가 월~금요일까지는 일인시위하고 서명운동 하고 그랬었는데 초장기 때 서명운동을 할 때는 토요일에 500명 정도 됐었거든요. 그런데 제일 많이 받을 때는 날씨 따뜻할 때 증심사라는 곳에서 등산객들 상대로 2천명 가까이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13만 5천명을 넘어섰습니다. 그 13만 5천명 서명지를 쌓으면 키높이 정도까지 됩니다. 학생들 가운데 70프로가 광주 학생들이에요. 광주에서 웬만한 사람은 우리 시민모임을 거의 다 알고 있어요. 쉽게 하려고 학교를 택했던 것은 아니예요. 사실 학교를 택했다고 이렇게 서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전국적으로 따지고 보면 안 해준 학교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많은 학교들이 해 주었던 것은 미쓰비시에게 우리의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바람이 있었던 것이죠. 시민모임 회원 가운데 교장 선생님이 계셔서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 다음에 광주시 교육감이 책임을 져 주셨어요 당시 교장 선생님이셨던 김선호 시 교육의원 서구 쪽을 맡고 장휘국 현 교육감은 동구 쪽을 맡아서 학교를 찾아가서 서명운동을 했죠. 다 다닌 것은 아니구요. 장휘국 교육감은 당선 되고 공백이 있어 일본에도 함께 갔다 왔어요. 청소년들로 하여금 굴절된 뒤틀려진 역사를 알리려는 측면과 미쓰비시에 가서 왜 10만명인지 미쓰비시 분명히 알리는 의미로 너희들 이 할머니들 역사에 묻혀 끝날 일이라고 흐지부지 하지 말아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청소년들 서명을 받았다. 너희들이 끌고 갔던 아이들이 과거에 청소년들이었다. 지금 이 아이들 또래다. 이런 마음으로 작년 6월에 미쓰비시에 전달하고 내각부에 전달했어요. 왜 6월이냐면 주주총회가 있었기 때문예요. 그 결과 7월에 협의의 장을 만들겠다고 미쓰비스측으로부터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일인시위인데요. 2009년 9월 25일, 광주 시의회 건너편에 미쓰비시 자동차 판매점이 오픈했었어요. 미쓰비시가 보상도 않고 차 팔겠다고 열었으니 할머니들 표현으로는 내 가슴에 두 번 못을 박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희는 10월 5일부터 즉각 일인시위를 했어요. 2010년 7월 31일까지 208일 동안을요. 평균 8~9명이 함께 섰고 모두 합해서 1900여명이 함께 했어요. 월~금까지 12시~1부터 일인시위를요. 말이 일인시위지 일인시위는 이틀정도고 어쩔 때는 30명 정도까지도 왔어요. 그래서 집회신고를 했어요. 피켓을 들고 매일했어요. 주말에는 서명운동을 하고요. 그러니까 미쓰비시도 집회신고를 하고 못하게 한 거예요. 위장 집회신고 규탄 기자 회견을 열기도 했지요. 결국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도 철수하게 됐습니다.

시민모임에서 208일간 일인시위하면서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일인시위 하는 곳이 관공서 촌이라 주변에 가게가 없었어요. 그것을 알고 베지밀 등 음료수 사 오시는 시민 분들도 많았구요. 차 멈추고 고생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일인 시위 하는 과정에서 김마담이라는 분도 생겼어요. 그분이 바로 당시 효광중학교 교장 선생님이신 김선호 현 시 교육의원이시죠. 매일 일인시위를 할 때 그분은 추울 때는 따뜻한 차로 더울 때는 시원한 차를 가지고 오셨어요. 그래서 붙여준 이름이 김마담이에요. 회원들이 전국에 있는데 서울에 있는 한 회원은 할머니에게 추우실 것 같다며 목도리를 보내오시고 장갑을 소포로 보내준 분도 계시고 제가 보낸 커피를 타서 드십시오 라고 하면서 커피를 보낸 준 회원도 있으시고 편지 100여통이 왔는데요 편지에는 단풍잎을 말려서 보내 온 분들도 있고 원근각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많이들 계셨어요. 이 일을 하며 YTN, MBC 방송 등을 몇 번 탄 적이 있어요. 2010년 1월에는 무려 다섯 번이나 기자회견을 했었구요. 서울을 두 번이나 세 번을 올라갔거든요. 외교통상부에 한번 일본 대사관에 한번요. 서울 삼성역 부근에 서울 미쓰비시 본사가 있어 일제 피해자들이 중심이 되어 매주 금요일에 몇 차례 갔었어요. 미쓰비시 본사가 묘하게도 포스코 맞은 편에 있어요. 포스코가 한일협정 그돈으로 세워진 곳 아닙니까. 외교통상부나 일본대사관 강남에 있는 미쓰비시 본사. 계속 해서 이렇게 투쟁활동들을 했던 것이 전국적으로 알려 지게 된 거죠. 저희들은 얼굴도 몰라요.  까페 회원들이 서명을 받아와 편지도 쓰고 꽃잎도 넣고 할머니 쓰시라고 목도리도 넣고 어떻게 보면 기획 연출이 아니고 자발적인 마음들이 모아지고 모아진 것이 시민모임의 큰 힘인 것 같습니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활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김희용 목사. ⓒ <에큐메니안> 신용철

시민행동 활동과 관련해 세분화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하실 것도 있는지요.

일본에 갔다 온 얘기 좀 더 해 볼게요. 2010년 6월 미쓰비시 주주총회에 우리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 시민모임 회원들이 8~9명, 당시 교육감 당선자, 시 교육의원, 변호사, 신부, 신문 방송 기자들 이렇게 약 30명가량 갑니다. 나고야 지원회 분들과 함께 미쓰비시 앞에서 선전전도 하고 시위도 했지요. 가지고 간 서명도 전달하고요. 이때 액션으로 삼보일배를 했습니다. 우리가 삼보일배에 대해 나고야 지원회에 알리자 그분들이 왜 피해국인 당신들이 미쓰비시 앞에서 절을 하느냐. 우리는 이해가 안 된다. 근데 우리는 해야되겠다. 왜 해야 하느냐?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것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사죄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있다. 미쓰비시가 밉지만 당신들의 미운 마음을 용서하려는 심정으로 한다. 우리의 눈물과 땀방울을 뿌리기 위해 한다. 그런 마음을 읽고 그분들이 거기에 박수를 치고 우리도 울고 그들도 울고 다들 울었어요.(이 부분에서 김 목사는 '아따 울컥해지네'라고 혼잣말로 전라도 사투리를 내뱉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거기 시나가에 역이 수많은 일본인들이 우리들을 보고서 놀랬어요. 처음 보는 광경이니까요. 이들도 왜 저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진짜 일본의 잠자고 있는 양심들을 깨우고 있었던 것이었으리라 생각해요. 또 이미 깨어있는 양심들에게는 큰 힘을 준 것이죠. 이미 나고야 지원회는 24~5년 전부터 이 일을 했는데 이제야 물길을 파게 된 것이죠. 거기에 한국에서 결성된 시민모임이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 것에 그분들은 고마워하고 이런 활동들을 하고 저들도 알고 우리도 알고 하면서 연대가 아닌 동지가 된 것이죠. 그분들이 동지라고 고백하는 것 가운데는 이런 경우도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나고야 지원회 가운데 우리로 치자면 전교조 성향의 선생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자기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가려는 가운데 조선여자근로정신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던 겁니다. 그 나고야 지원회 분들 24년 전 사진을 보면은요 40대 아저씨인데 지금은 백발이에요. 그렇게 한국에서 메아리로 온 것도 없이 해오던 어느날 시민모임이 이런 굵직한 일을 보면서 해내니까 우리를 보면 반가워서 울고 기분 좋아서 팔딱팔딱 뛰고 합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만 3년 동안 금요행동을 하는데 한번도 안 빠진 분도 있어요. 심지어 어떤 분은 자기 자켓에다 유서를 써 놓고 금요행동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심장병을 앓고 있었거든요. 나는 누구다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써 놓고 시나가에 역에 있는 미쓰비시 본사에 오는 이들도 있었어요. 또 어떤 분은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시는 분도 있었는데 그 분도 한 시간 동안 전단지를 나눠주고 시위를 했었어요. 그분들을 보면 숭고하신 분들이다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그분들이 삼보일배 할 때 다들 울고 불고 함께 쩌렁쩌렁 구호도 외치고 언론사들도 와서 찍고 그랬지요.

미쓰비시와 협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후원 문화의 밤을 하게 된 배경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본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이게 일본에서 최근 보내온 내용입니다.  ‘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할머니 지원단’ 이것이 협상단 공식 명칭입니다. 시민모임 2명, 지원회 3명, 미쓰비시 5명, 통역 2명. 이렇게 해서 총 12명이 비공식적으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합당한 처우를 위해 협의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후원 문화의 밤을 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예요. 시민모임 회원 분들을 다 한번 모아보는 자리가 뜻 깊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알아보니까 여기에 계신 분들이 상황극, 노래, 춤, 시 낭송 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분들의 장기들을 한번 모아서 보여줄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고 두 번째로 지금 저희들이 협상을 진행하는 중에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 동안에 이제 자금은 회비로 했지만 협상을 물질적으로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후원 문화 행사를 하게 됐구요. 후원 문화 행사 때 10만 희망릴레이 선포하고 했던 것이죠. 10만 희망릴레이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이 천원 후원하는 것을 오는 5월까지 10만명 조직하겠다. 왜 그것을 하느냐 우리가 이 운동을 집중적으로 해 내고 6월달 승리의 소식을 나고야 지원회 분들과 나누든 아니면 다시 미쓰비시를 향해서 투쟁의 열기를 높이든 이 후원금으로 계속 가야겠다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 싸움 뿐만 아니라 후지꼬시 싸움 다른 풀리지 않는 과거사 싸움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대표로서 가지고 있는 저의 생각인데, 베트남에 우리가 가해자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그 빚을 청산해야 되지 않겠나 거기까지 전망해 보는 거죠. 우리 시민모임 안에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기성세대가 됐을 때, 우리 시민모임이 우리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길게 보면서 지금은 협상 되지 않았지만 장차 이것은 아시아의 평화와 생명 평화의 세상을 일궈나가기 위한 것이죠. 저희들의 10만명 서명과 천원 후원금은 차원이 다를거예요. 천원 후원에 대한 어려움이 있기에 여기에는 다양한 방식이 필요합니다. 개인이나 가정, 계모임, 술자리, 기관이나 단체 조직이 결합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겠다. 그래서 우리가 언론들을 통해서 이렇게 접촉하는 것도 우리들의 운동은 게을리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언론들의 기사를 통해 널리 알림으로서 많은 분들이 천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들을 더 확장시켜 나가는 거죠. 이런 차원에서 <에큐메니안>을 만난 것은 한국교회가 보수화 되고 있는 차원에서 기사를 실어주고 거기다가 후원 운동을 소개하고 계좌까지 알려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힘이 되요. 광주에서 진보 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몰상식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집단이 지금 한국교회의 수준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 입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목사님들도 있으니까 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은 목사도 있다는 그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 김희용 목사. ⓒ <에큐메니안> 신용철

덧붙여 저희 <에큐메니안>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에큐메니안>을 통해 신학적 갈증들을 해결해 주고, 신앙고백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의 글들을 애정을 가지고 즐겨 보고 있습니다. 설교도 보고 <에큐메니안>에서 보는 신학적 사회적 입장들을 보면서 제 생각을 다듬고 풍성화하는데 참 좋은 매체입니다. <에큐메니안>이 저희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에큐메니안>을 통해 10만 희망 릴레이 운동이 진보적 기독교인들에게 전달이 되어서 많은 분들이 함께 참여하고 그래서 이제는 정체되어 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추락해 가고 있는 한국 기독교가 제 정신으로 다시 고백되어 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후원계좌]  광주은행 182-107-1997-81 김희용 , 농협 302-0306-1997-81 김희용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광주 = 신용철 기자 

신용철 기자  edito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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