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에큐메니칼소식 교회 이병일의 열린 성서 마당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들다윗과 국가보안법에 대한 은유(마가 2:23-28)
이병일 | 승인 2005.08.03 00:00


인생을 비유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 하나가 “길”입니다. 길을 따라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생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그 길의 종류에 따라서, 그 길의 방향에 따라서 길과 인생의 의미는 드러납니다.

예수, 기존의 이념에 도전했던 사람

본문은 2:1-3:6에 이르는 다섯 논쟁 중에서 네 번째 논쟁입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는 새로운 시대를 행동으로 보여주며, 그의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기존의 여러 가지 이념(죄 용서의 권한 - 중풍병자를 고침 / 죄인과 의인의 구별 - 세리와 죄인들과의 합류 / 새로운 시대의 전적 단절성 - 금식에 대한 논쟁 / 안식일의 주인 - 새로운 길을 내는 일 / 죽임과 살림 - 손이 마른 사람을 고침)에 도전하고, 새로운 시대의 지향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마가는 1장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의 도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서기관, 바리새파 사람들, 헤롯당원들로 중심이 된 낡은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과 모든 차별을 없애고 사람됨과 생명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래는 가능하면 직역으로 다시 번역한 것입니다.

23 안식일에 예수가 파종된 밭을 통과하여 지나가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밀을 자르면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24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보시오, 왜 그들은 안식일에 허락되지 않은 일을 하느냐?” 25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고 굶주렸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느냐?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어떻게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외에 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제단의 빵을 먹었고,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도 주었느냐?” 27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안식일”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마태나 누가의 본문에 의한 선입견을 접어두고 본문을 다시 본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에게 항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나 누가에 의하면 그 이유가 안식일에 추수를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분명히 안식일에 허락되지 않은 일들입니다.

예수와 제자들, 길을 만드는 사람들

서기관들이 안식일 법에 39개의 금지조항을 세부규정으로 두었습니다. 불을 피우는 것, 그릇을 옮기는 것, 물을 깃는 것, 800m 정도 이상 길을 걷는 것, 글자 두 개를 지우는 것, 씨를 뿌리는 것, 밭을 가는 것, 추수하는 것, 곡식 단을 묶는 것, 타작하는 것, 키질하는 것 등입니다. 이삭을 자르고 비비는 행위는 추수하고 타작하는 것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 예수와 바리새인

그런데 마가의 본문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서 먹었다”는 말이 없고, “이미 파종된 것을 뽑아내면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에 예수가 파종된 밭을 통과하여 지나가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밀을 자르면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마가의 본문은 추수와 무관합니다.

열매가 있는 이삭을 자른 것이 아니라, 그냥 이미 파종된 밀을 뽑고 있습니다. 그것도 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예수가 가는 길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이제 제자들도 예수의 길에 함께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파종된 밭에서 “뽑으면서 길을 만들기 시작하는 행위” 그 자체는 하나의 은유입니다. 마가의 전체 주제가 “길”과 “따름”에 있는데, 그 길을 이제 제자들도 함께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가에서 길은 예수의 삶의 방법이며, 제자들이 따라야 할 제자도의 모범이고, 곧 복음입니다. 그 길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된 제도를 부수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길로 하느님이 오실 것이며, 바로 그 길로써 그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이 행위가 안식일 법에 위배되는지 위배되지 않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그들의 행위”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았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의 트집의 근거는 안식일에 있지만, 실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그 일을 하는 것 자체에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못마땅한 일을 하는 그들을 걸기 위해 율법규정을 들이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옳은 길을 막는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보시오, 왜 그들은 안식일에 허락되지 않은 일을 하느냐?” 안식일에 허락되지 않은 일”에 사용된 “허락하다”는 εξεστι(eksesti)로서 “합법적이다, 가능하다, 합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행위가 부담스러워,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행위를 중단시키고 법적으로 처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국가보안법이 지배자들의 만능 지휘봉으로 악용된 것처럼 말입니다.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인권과 생명권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국가의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의 권력과 정권을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법을 왜곡하고 법의 정신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국가는 자신의 정권과 정치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도전하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이 못마땅하기 때문에 그들을 안식일법으로 걸고 넘어지려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새로운 길을 만드는 행위자는 제자들인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항의를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후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고, 부정한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서 돌려보내고,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이 못마땅해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제 예수님을 공격할만한 건수가 생긴 것입니다.

다윗, 역사를 왜곡시킨 제왕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치 선문답으로 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예수님은 사무엘상 21:1-6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응수합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고 굶주렸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어떻게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외에 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제단의 빵을 먹었고,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도 주었느냐?”
“--한 사실을 확실히 알지(인정하지, 승인하지;  αναγιγώσκω : anagigosko) 못했느냐?” 라는 말은 그들의 무지가 아니라 의도와 마음의 중심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 개선한 다윗을 맞이하는 사람들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다윗은 누구입니까? 그들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야의 원조이고 희망입니다. 지금도 시오니즘의 중심에는 다윗이 있습니다. 당시 유럽과 근동을 지배한 로마의 황제가 “구원자”로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로 추앙받을 때,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다윗은 그들의 평화를 가져다 줄 향수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민중들의 의식 속에 있었던 메시야의 원조는 엘리야였지만,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다윗과 연결되었다.

예수는 사무엘상의 본문에 나오는 ‘아히멜렉’(말의 뜻 : 왕의 형제)을 ‘아비아달’(말의 뜻 : 생존한 아버지)로 바꾸어 이야기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제사장의 이름을 생략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의도였는지 마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나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의 거짓말에 속아서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칼을 보관하고 있다가 다윗에게 줍니다. 이 일 때문에 사울은 그의 온 가족들과 제사장 85인을 비롯하여 그곳의 모든 주민을 죽였는데, 그러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아히멜렉의 아들인 아비아달뿐이었습니다(삼상 22:9-20). 아비아달은 사울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다윗이 왕권을 차지하자 사독과 함께 제사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2사무 15:24-36). 또한 아비아달은 다윗의 왕위 계승 시에 아도니야를 지지했다가 솔로몬에게 추방당했습니다(왕상 2:26-27).

아히멜렉은 쫓기는 다윗의 암묵적 지지자이고, 아비아달은 왕권을 차지한 다윗의 공식적 추종자입니다. 아히멜렉을 아비아달로 바꾼 것은 다윗의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미 권력의 자리에 있는 다윗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불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죽인 것이 다윗이 아니라 엘하난(삼하 21:19)이라는 전승에 의하면, 왕이 된 후에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엘하난의 업적을 갈취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한 다윗은 제단의 빵을 먹은 후에 불레셋에 망명하여 그들의 용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평등공동체를 위협하는 불레셋의 용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갓 도성의 불레셋 왕 아기스의 용병이 되어 유대 산지의 남서부이며 해안 평원의 끝에 있는 시글락이라는 곳을 영지로 얻었습니다(삼상 27장). 다윗은 시글락에서 자기의 용병을 거느리고 약탈과 학살을 그 전역에서 계속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기반을 확실하게 다져둡니다.

마가의 이러한 다윗 일화의 인용은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존경받고 기대되었던 인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킵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안식일을 범한다고 하면서 올가미를 씌워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데, 당신들이 추종하는 다윗은 그것보다도 더한 일을 저질렀다. 종교적으로는 제사장들의 음식을 속여서 먹었고, 정치적으로는 권력을 얻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평등공동체를 배반하고 불레셋의 용병이 되었으며, 왕권을 장악한 후에는 역사를 왜곡시켰다.’

국가 보안법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안보라는 이름으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길을 훼방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너희가 그리워하는 역대 정권들이 북한의 지배자들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북풍을 일으키고, 정권연장을 위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금기(국가보안법)를 오히려 너희가 솔선수범하여 어긴 것 아니냐?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에 아부하면서 우리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은 미국의 용병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너희의 비리를 감추기 위하여 법을 바꿔서라도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고 있지 않느냐?’

   

▲ 국가보안법 이젠 철폐될 때도 되었는데...

안식일 논쟁은 사람의 회복에 초점이 있다

예수님은 이제 이 논쟁을 마치면서 말합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너희는 안식일 규정을 맘대로 만들기도 하고 어기기도 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느냐? 너희뿐만 아니라 나는 안식일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 박근혜 대표도 국가보안법 위반 아닌가?

따라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종교적 제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종교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인간 속에 있는 참된 인간됨도, 사람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도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이 논쟁은 “사람의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져서 이제 사람을 억압하는 사회 통제의 수단으로 전락한 율법에 도전하는 것은 바로 율법의 본질인 사람됨, 함께 살아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와 제도 그리고 이념의 목적은 사람입니다. 법의 목적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권과 인권을 제대로 세우고 보장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지배자들과 권력을 쥔 사람들에 의하여 그 법이 오히려 사람들의 생명권과 인권을 억압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한 환골탈퇴

이 땅에서 진정한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 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새로운 길”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은 자기갱신을 바탕으로 한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고 걸어가는데, 부족한 것은 없었는가? 아니면 새로운 길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또한 ‘과연 나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에 함께 하고 있는가? 나의 말과 행동이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에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이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니가?’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어려움과 고통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길을 만드는 일을 보류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의 의미를 그 근본에서부터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병일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