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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장공의 부활체와 사후생 이해 (5)
김경재 고문 | 승인 2011.06.23 12:48

지난 5월15일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의 '사후세계부정'발언과 관련하여 장공 김재준 선생이 이해한 사후생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는 취지로 연재중입니다. 덧붙여 이 글은 본지 고문위원인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제 24회 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에서 발표했던 원고임을 밝힙니다.

죽음 이후생에 대한 장공의 이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새로운 영체로서의 첫 열매요, 영화된 몸이라고 바울은 보았고 장공도 동의한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체는 예수의 땅 위 육체생명이 질적 변화를 받아 영화된 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진지한 물음이 발생한다. 현실적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나 일반인의 죽음체험은 설혹 장차 ‘부활체’로서 덧입는다 하더라도 예수의 ‘영화된 몸’과 차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현세적 ‘몸’은 ‘혈과 육’의 몸이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부패하고 자연의 소재로 환원된다. 사람의 몸을 구성했던 유기물적 무기물적 원소들은 자연으로 되돌아가서, 자연소재로서 남아있던지 다른 유기체 생명의 구성자료로서 흡수되어 자연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된다. 종말의 날의 ‘마지막 변화와 승화’가 이뤄지기 전에 사람들의 죽음 후 생명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속하는가? 소위 ‘중간시간’의 생명의 존재양태 문제요, 일반적으로 ‘사후생’(死後生)에 관한 신학적 질문이 일어난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믿고 천당가시요!”라는 모토로서 압축된다고 강조하는 한국교계의 타계주의에 대하여 남다른 비판과 경종을 울렸던 장공은 사후생을 온통 부정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장공은 현세와 내세, 역사에 충실하는 믿음과 내세 영생신앙과의 관계를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대승적 안목에서 이해한다. 타계를 위한 현세도 아니고 현세를 위한 타계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무한한 질서 속에 있는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의 존재양태라고 이해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적 사후세계가 확신되고 있듯이, 장공에게서도 그렇다.

장공은 저 유명한 해방직후 선린형제단 집회에서 행한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제목의 기념비적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인의 최고사상은 하나님나라가 인간사회에 여실(如實)히 건설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 내세적인 소위 천당(天堂)이라는 말로서 그 전부를 의미한 것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생활(全生活)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부문(全部門)을 지배하는 그 때, 그에게는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사회에 삼투(滲透)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미래세계에까지 생생발전(生生發展)하여 우주적 대극(大極)의 대낙원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전모(全貌)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 안에서 진보적 한국기독교 신학자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당시 타계주의적이고, 개인영혼 구원에 몰입해 있는 교계를 보면서 장공은 참다운 복음적 의미에서의 ‘하나님나라’ 개념을 신학적으로 갈파했다. 위 문장을 깊이 보면, ‘천당’ 강조의 타계주의 신앙을 경고하지만 동시에, 하나님나라를 현세 역사내의 생명현실로서만 생각하는 현세주의적 기독교, 세속화된 기독교에도 경고를 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현세 삶의 각부문에 삼투하여 성육화한 결실물이면서도, “사선을 넘어서 미래세계까지” 관계되는 범우주적 생명실재이기 때문이다.

장공은 기독교 복음메시지의 본질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덧없음을 인식시키어 사후 천당에서 영혼구원 받도록 하는 ‘타계중심신앙’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는다. 예수님은 저 세상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을 위해 그리하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체 창조세계가 온전히 ‘신천신지’로 변화될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중간시대의식을 갖고 산다. 바울도 예수도 사후세계를 믿었다고 장공은 확신한다.

그러나, 장공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타계가 인정되기는 하나 그것은 현세를 위한, 또는 현세의 연장으로서의 ‘타계’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현세의 연장으로서의 타계”란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데, 그 말의 참뜻은 내세와 현세는 오직 하나뿐인 신비한 창조세계 안에서 차원이 다른 삶의 질서라는 것이요, 오늘의 삶의 결실이 내세의 존재양태를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장공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맏딸의 제4주기(1982)를 맞이하여 맏딸 정자를 그리워하면서 산 사람에게 편지하듯이 애절한 편지체로 일기에 사후생의 신앙을 남긴다.

간 사람, 있는 사람, 보이는 사람, 안 보이는 사람, 남과 나, 선배와 후배, 모두 모두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인간과 자연과 모두 얽혀 한 몸 되는 그 날이 오면, 이 늙은 부모도 다시 너를 몸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잘 있어라. 정자야 잘 있어라. 그 날이 올 때까지! 네 아빠와 엄마.
 
장공의 사후생에 대한 신앙적 확신은 분명하지만, 그 사후생을 포함한 ‘하나님나라’의 현실적 실재가 지닌 높이와 넓이와 크기가 글자그대로 ‘범우주적인 것’이어서 단순한 심리적인 소망을 말하는 차원이 아니다. 장공의 말년작품 “새벽 날개 타고”라는 일종의 죽음을 앞에 내다보면서 읊은 종교시(1983년 作) 속에서도 그러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이 우주는 하느님 집
하늘 위, 하늘 아래,
땅 위, 땅 아래,
모두 모두 아버지 집.

새벽 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이 눈이 하늘보아
푸름이 몸에 배고
이 눈이 밝고 맑아
주님 영광 비취이네.

새벽 햇빛 날개 타고
하늘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땅에서 소임받아
주님나라 섬기다가
주님 오라 하실 때에
주님 품에 안기나니.

새벽 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장공의 사후생에 대한 신앙적 신념은 불변하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맏딸 정자와 그의 애제자 서남동이 죽음을 맞아, 그들의 육신을 땅에 묻고 돌아설 때, 장공은 그들의 생명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천국에서 지금 안식한다고 믿었지만, 그들이 예수의 ‘몸의 부활체’와 같은 ‘영화된 몸, 승화된 몸’을 이미 덧입힘 상태로인지 아니면, 궁극적 그 날을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다.

바울의 부활한 영체에 관한 편지를 보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고전15:42~44)을 믿었지만, 임박한 종말신앙을 가졌던 당시 바울은 ‘영적 몸으로 덧입는 존재변화 사건’은 임박한 그리스도 재림이 일어나는 종말의 날에 발생할 것이라고 편지에 썼다.

그러나, 오늘날 대표적 현대신학자들은 이 신령한 ‘몸의 변화로서 영체에로의 변화 입음’의 사건이 죽음직후에 일어난다고 본다. 소위 ‘중간시간’이란 시간 개념은 이미 상대적 시공제약을 초월한 영적 차원의 생명에게서는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균진은 현대신학에서 죽음, 부활, 죽음이후 영원한 생명에 관련한 다양한 견해들을 철저히 검토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영원한 생명)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표상과 인식의 한계 바깥에 있다. 그것은 인식조건에 따라 인식될 수 있는 사물들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우리의 세계의 물질적 시간과 공간의 도식을 연장시키는 것’ (H. Kung, Ewiges Leben, p. 148 中 인용)은 옳지 않다.

김균진의 신학적 견해는 옳다. 성경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언급을 할 때 ‘잠들었다’는 표현은 은유적 표현이지 객관적 사실을 표현하는 명제가 아니다. 또한 구약학자였던 장공의 사후생에 대한 믿음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스올사상’에 갇혀있기를 거부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죽은 자의 사후생은 초기 임박한 종말론에 지배되었던 사도들이 생각하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고전15:18, 살전4:14)이라는 표현처럼 피동적, 정태적, 단순한 기다림의 존재양태라고 보지 않는다. 이미 하나님의 충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빛과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 안에’ 존재한다고 본다. 다만, 그것에 대하여 합리적 설명을 하거나 심리적 상상묘사를 금기한다.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지금 살고 있는 자나 이미 죽은 자가 함께 관계되어 있다. 율겐 몰트만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하나님이 충만함)은 신적인 삶의 한없는 충만함이다. 그것은 끝없이 창조적으로 자기를 전달하는 삶이요, 죽은 것과 사멸한 것을 살리는 넘치는 삶이요,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삶의 힘과 삶의 즐거움을 그것으로부터 얻는 삶이요, 생동하게 된 모든 것이 깊은 기쁨과 큰 환호와 함께 답변하는 삶의 원천이다.
  
장공이 믿는 사후생은 몰트만이 미학적 신학의 필치로 설명한 ‘하나님의 충만함’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과 은혜로 살아있는 생명존재 양태이다. 죽음도 다른 그 무엇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롬8:38~39). (계속)

김경재 고문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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