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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장공의 부활체와 사후생 이해 (6)
김경재 고문 | 승인 2011.07.01 19:30

지난 5월15일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의 '사후세계부정'발언과 관련하여 장공 김재준 선생이 이해한 사후생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는 취지로 연재중입니다. 덧붙여 이 글은 본지 고문위원인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제 24회 장공사상연구 목요강좌에서 발표했던 원고임을 밝힙니다.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 부활체, 그리고 사후생 이해에서 남은 쟁점

장공은 그의 성서관 곧 ‘성서적 실재론’(Biblical Realism)의 입장에 철저했기 때문에, 우리가 본 논문 제2장에서 살핀 대로, 타락 이전의 인간의 몸 그 자체가 반드시 죽어야하는 ‘사멸적 존재’가 아니었다는 신학적 입장을 줄곧 주장했다.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떨어진 것은 ‘정상태’ 곧 창조질서로서가 아니라 ‘변태’ 곧 죄로 말미암은 ‘원창조질서’에서의 일탈과 변질사건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의 근거로서 창세기 창조설화에 나타난 창조주의 창조행위를 두 가지 질적으로 다른 행위로 구별하였는데, 자연질서에 속한 피조물들을 ‘말씀’으로 창조하는 방식과, 영적 질서에 속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직접 창조하시어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우리가 장공의 타락 이전의 본래적 인간은 그 몸 자체가 불사적인 영적 존재였고, 여타의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여 직접 창조주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견해에 접할 때, 장공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새삼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앞에서 정리한 장공의 타락이전의 영적 몸으로서 본래적 인간창조 이해를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그의 입장이 마치 오늘날 소위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는 입장 곧 ‘젊은 지구창조론’의 입장처럼 받아드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보수적 ‘창조과학회’의 입장을 잘 나타내는 ‘젊은 지구창조론’의 특징을 신재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성서문자주의와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고 성서비평학을 거부한다. (2)‘창조진화’ 논쟁에서 우주창조를 6천 년~1만 년 전이라고 보며, 노아 홍수를 역사적 사실로 보며 지구전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한다. (3)창세기 1~2장 말씀대로, 창조주는 생명의 종(種)마다 별도로 지금의 모습대로 창조했으며, 따라서 ‘종의 진화’는 부정된다. (4)죽음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 대한 창조주의 저주선언(창3:14~19)에 따라 자연계에 들어왔고 인간은 죽음의 존재로 전락하였다.

장공의 지론 중에서 사람을 하나님이 특별한 배려와 의중을 가지고 직접 창조하셨다는 견해, 그리고 죽음이 ‘정상태’가 아닌 ‘변태’로서 타락의 결과로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견해는 ‘젊은 지구창조론’의 견해, 곧 ‘창조과학회’의 견해와 통하는 점이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장공의 ‘창조-진화’ 관계론에 대한 견해는 ‘창조과학회’가 말하는 ‘젊은 지구창조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은 성서문자주의와 성서무오설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장공은 예수회 신부 떼이야르 샤르뎅의 ‘창조적 진화사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알 수 있다.

다윈은 생물진화의 요인을 외적으로 환경 즉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그 더 강한 힘으로 환경을 지배하는 놈이 좋은 씨를 남겨 ‘진화’된다고 했다. 그러나, 샤르뎅은 생물자체 안에 있는 스스로의 능동성이 새로운 창조에로 그를 밀어 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적-심리적 계(Biosphere)에서, 약 100만 년 전에 우리 유성(지구)에 가장 운명적인 순간이 오게 됐다. “인간의 출현이다.” 인간은 전 우주의 범위와 모든 과거의 계(지질界, 생명, sphere)를 그 존재 안에 간직하면서, 그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시킬 수 없는 다른 계(sphere) 즉 그가 말하는 정신계(Noosphere),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지성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이제 자주, 자립, 독립된 창조하는 개체로서의 응결된 덩어리다.…백만 년 걸린 하나님의 성업(聖業)을 똥 묻은 군화로 짓밟는 것이 ‘죄’가 아니겠는가?

 위 인용문장을 신중히 살펴보면, 장공은 다윈의 ‘생명체는 진화한다’는 진화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사실’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적 이론설명 중 소위 말하는 ‘자연선택론’이나 ‘적자생존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에 비판적이다. 장공은 떼이야르 샤르뎅의 고생물학적 ‘창조적 진화론’ 요즘 학계용어로서 ‘진화론적 유신론’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신재식은 ‘진화론적 유신론’의 특징을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한다. (1)진화는 역사적으로 발생한 사실이며, 진화의 전과정은 하나님이 이끈다. (2)신앙과 과학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상보적이다. (3)생명의 다차원적 다양성과 계층구조를 긍정한다. (4)생명은 물리적 환원 곧 물질주의적 환원주의 관점을 가지고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창발적 현상이라고 본다.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의 철저한 적용은 창세기 타락이전의 인간존재의 본래성을 죽는 운명에 필연적으로 휩싸인 ‘혈육적 죽을 몸’으로 보지 않고 ‘영적 몸’으로 보게 했다. 그러나, 장공의 입장이 ‘창조과학회’의 주장처럼 성경문자주의에 매이거나 ‘젊은 지구창조론’ 입장에 일치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떼이야르 샤르뎅의 ‘창조적 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이다. 여기에 긴장 갈등이 있다.  

사후생에서 신자들이 덧입은 ‘영적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동일한 것인가의 문제

신자들의 사후생과 그리스도의 부활체에 관한 장공의 신학적 담론 중에서 몇 가지 좀더 분명하게 규명해야 할 과제가 발생한다. 그 과제들 중 명료성을 요하는 세 가지 주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구약성서학자였던 장공의 사후생 이해는 구약성서 세계에서 말하는 소위 ‘스올사상’과 다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스올’은 생기가 없는 곳,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죽은 자들의 집합소, 그 곳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못하고 죽은 자들과의 교통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장공은 ‘사후생’을 역동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운 생명력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충만한 생명상태로 보았다. 그 상이성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2)변증법적 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죽음은 총체적 유한한 생명의 끝이며, 부활의 생명과 죽은 자의 생명과는 아무런 연속성도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변증법적 신학자들이란 카알 바르트를 비롯한 알트하우스, 틸리케, 융엘, 하인리히 오토 등을 말한다. 장공의 ‘사후생’은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죽음이해와 병립할 수 있는가? (3)장공의 ‘사후생’에 대한 신앙담론에서 이미 온전하게 영화된 몸으로서의 예수의 부활체와 종말의 영적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영체 사이엔 차이가 있는가? 

장공의 사후생 이해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스올사상’과 다르다. 장공은 구약성서학자였으나, 유대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이나, 보편적 만인부활 이전의 낙원에서 ‘영원한 삶’의 이해도, 장공의 경우는 헬라철학적 ‘영혼불멸론’과 다르다. 변증법적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죽음과 함께 유한존재로서 인간의 완전한 죽음’은 피조물인 인간편에서 볼 때 옳은 말이다.

인간편에서 보면, 죽음은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생명의 완전한 끝이다. 그러나, 장공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살아있다”는 신앙입장을 취한다. 죽은 자들은 새로운 생명과 형체를 덧입는 것이고, 선물로서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와 다름없다.

남는 문제는, 땅 위에서 지녔던 몸이 영화되고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땅의 몸이 이미 흙으로 돌아간 신자들의 낙원에서의 ‘영체’가 본질상 같은 성질의 것인가 다른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다소 현학적 문제 같지만 소홀히 여길 문제는 아니다. 장공은 양자사이의 뚜렷한 질적 차이를 언급하진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말한바, ‘영적 몸’을 덧입은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의 몸이 ‘영화’된 것이다. 바울은 죽음에 직면할 때, 우리의 속 사람이 ‘벗은 자들’로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바울은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혀주심’에 대하여 강조하였고, 그것을 이루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고후5:2~5). 장공은 바울의 견해에 동의한다.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비전이 지닌 현세적 삶의 중요성과 의미 연관성 문제

마지막으로 살펴 볼 문제는 장공 신학에서 ‘사후생’ 신앙은 ‘현세적 삶’의 중요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문제이다. 전통적 보수신앙이 말하는 입장은, 현세적 삶은 어디까지나 예비적인 것, 불완전한 것, 언젠가는 폐기되어 없어질 것, 사후생을 위한 준비단계의 것이라고 보았다. 과연 그런가?

장공의 신학적 입장은 ‘현세’와 ‘내세’라고 규정하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서, 인간의 합리적 두뇌기능이 이해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무궁성과 신비성 앞에 겸허할 것을 요청한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러나 하나로 통전된 세계’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 세계를 장공의 독특한 신학적 어휘로서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주적’ 혹은 ‘범우주적’이라는 말은 시공연속체로서의 물리학적 대자연의 광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의 존재양식이 다른 질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다차원적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원이 다른 세계들은 그 고유한 질서 속에서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통일성과 관계성과 의미연관성을 지닌 것이다.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은 물리화학적 법칙 지배를 받는 생물적 차원, 심리정신적 차원, 영적 차원이 구별되면서도 통전된 ‘하나의 산 몸’인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고 명명한 장공의 신학적 총괄언어는 전통적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에너지가 약동하면서 다양한 존재질서 차원이 어우러지고 서로 순환교통(perichoresis)하는 신묘한 ‘대생명 세계’로서 본 것이다. 지구의 삶은 단순히 그 준비단계가 아니라, 영원한 삶이 결정되는 핵심적 삶의 단계이다. 장공의 사후생 신앙은 현세적 삶을 ‘잠시 동안 머무는 임시 정차 간이역’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삶이 결정되고 터를 놓는 기초이자 최종목적(텔로스)으로서의 현세적 세계의 중요성과 현세적 삶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성경의 증언은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서 이리로 내려온다는 비전을 가지며(계21:1~7), 세상의 종말은 현세계의 ‘폐기와 멸절’이 아니라 ‘질적변화와 성취로서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구생태계의 위기와 자연파괴 및 기후붕괴 현상에 접하면서, 과학자들은 언젠가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인류의 집단이주를 꿈꾸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녹색별인 지구행성은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다. 비록 천문학적 관점에서 작은 녹색행성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45억 년 간의 생명농사의 밭이며 독생자 예수의 보혈이 스며든 생명체이다.

코페루니쿠스 이전의 ‘지구중심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구생명현실은 우주창조의 의미가 살아나느냐 죽는냐의 운명이 결정되는 ‘온생명체’(장회익)이며 ‘영적 정신계’(떼이야르 샤르뎅)이다. 장공의 사후생론은 죽음 이후에 ‘유한한 생명이 영원화되는 영적 사건’을 믿으면서도, 현세적 지구역사와 지구생명 현실의 중요성 및 현세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책임성을 강조한다는데 그 특징이 드러난다. (끝)

김경재 고문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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