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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요한복음과 도덕경(2)“말씀이 계셨다”
김경재 고문 | 승인 2011.08.23 11:41

1.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예비고찰

요한복음 첫구절과 제1장에 줄곧 나오는 ‘말씀’이라고 우리 한글성경에 번역된 어휘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여기서부터 강해자는 말문이 막힌다. 왜냐하면 ‘말씀’이라는 ‘어휘와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말문을 열었지만, ‘말씀’은 단순한 어휘(단어)나 철학적 개념을 넘어서는 것, 모든 단어들과 개념들을 바탕에서 가능하게 하는 ‘어휘와 개념들의 존재론적 힘과 원리’이기 때문이다.   

‘말씀’이라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널리 알려진 대로 ‘로고스’(Logos)라는 말이다. 한때 서양 신학계에서도 요한복음 제1장에 강력하게 등장하는 ‘로고스’라고 하는 주제어 때문에 요한복음서는 순수한 아브라함종교의 혈통(이스라엘 모세종교와 유대전통)이라기보다는 헬라철학화된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의 산물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낮춰보려는 때도 있었다.

물론 요한복음서는 당시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르는 거대한 정신적 토양 속에 들어와 있는 고대 플라톤의 철학적 세계관과 스토아 철학적 세계관의 통찰을 자신의 복음증언 이야기 속에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철학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말한다. 철저하게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삶과 교훈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육화된 진리와 생명의 빛’을 증언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의 관심은 우주론이나 형이상학적 철학문제가 아니라, ‘구원’이 문제였다.

초대 그리스도교회가 복음을 증언하려고 했을 때, 삶의 정황을 크게 사회정치적 상황(socio-political situation)과 종교문화적 상황(religio-cultural situation)으로 대별하여 볼 수 있다. 전자는 로마제국의 지배체제였고, 후자는 고대헬라철학이 대중에게 느슨하게 정신적 풍토로서 변화된 헬레니즘 정신문화 체계였다. 전자는 로마정치권력의 신격화를 통해 식민지통치를 무력의 힘으로 다스리고 로마황제권력의 신격화로서 정치권력을 신성화하려고 했다. 후자는 범신론, 탈세계화, 육체적 물질적 가치 추구, 보이지 않고 물질보다 우월한 정신세계에 대한 관조와 삶의 추상화를 통해 개인의 심령의 평정을 추구하는 경향이었다. 로마제국의 엄정하고도 무자비한 현실지배를 감안할 때, ‘정의와 자유와 평등’이 강같이 흐르는 현실 속에서의 하나님나라 실현의 비전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요한복음은 위에서 말한 시대적 상황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적당한 복음의 정신화, 영적 해석을 시도한 작품일까? 요한 복음을 겉으로 보거나 잘못 보면 그렇게 오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2,000년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그렇게 꾸준하게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요한복음서에 나타나는 중요한 단어들의 빈도수를 공관복음서와 비교해보면 ‘나라’(바실레이아) 혹은 ‘지배하다’등의 어휘는 극히 드물게 나타난데 비하여, 사랑 진리  빛 등의 어휘는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생명’, ‘세상’, ‘일한다’, ‘양식’등 구체적인 생명현실 속에 움직이고 창조적 능력으로 작동하는 복음의 세계를 증언하려 한다. 요한복음은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의 거짓 메시야 강요, 당시 헬레니즘세계의 영지적 신비종교, 그리고 정통 유대교의 율법종교가 말하는 ‘구원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예수 안에  실현된 참 생명의 나라를 보라고 초청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알고 보면 엄청난 혁명정신을 담고 있다. 당시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권력 현실과 제도, 무력을 바탕으로 한 세상적 권위, 신비하고 신성한듯한 종교적 위엄, 전통습관의 엄숙한 터부를  모두 부정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2. 로고스, 도, 그리고 말씀

한국백성에게 그리스도교 복음서가 ‘생명의 떡과 생수’로서  전달 될 때, 히브리어나 헬라어 원어 단어 그대로는 전달이 되지 않는다. 영어성경이나 독일어성경이나 중국어 성경도 이차적 참고자료로서 봉사 할 뿐이다. 복음이 한민족에게 생명을 주고 살리는 의미 있는 진리로서 전달되려면 피할 수  없이 번역이라는 ‘해석학적 과정’이 필수적 과제였다.

맨 처음 ‘로고스’라는 단어는, 동양의 노장철학적 토양에서 나왔지만 종파나 종교유무를 떠나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통 되는 ‘도’라는 어휘로서 번역되었다. 개화기 당시만 해도 매우 잘된 탁월한 번역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었다”는 구절을 ‘도성인신’이라 했다. “그 사람 도하는 사람이야”라고 말 하면 시장사람들도 높이 존경하여 학식 높고 세상문리에 밝고 우주적 진리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동아시아 문화적 토양 속에서 ‘도’란 우주만물의 생성원리요, 우주만물을 초월한 원리였다. 우주만물 속에서 질서와 바름과 성실과 자연스러움과 공능을 일으키는 신묘한 초월적 실재라고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특히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는 우주생성원리, 우주정신, 우주불꽃이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물질 속에서도 존재하고 작동하는 신적 불꽃이었다. 사람 마음 속 에서 ‘로고스’는 ‘신성의 씨앗’이었으며, 내재하는 신적 이성 이었다. 고전 플라톤 철학에서 신적인 것은 언제나 시공안에 있는 물질세계와 이 세상을 넘어있는 초월적인 것이었지만,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는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내재 할 수 있는 만물의  생성원리요 선과 진리를 창발하는 생성원리였다. 사실, 제1세기 그리스도교가 일어날 때, 헬라철학적 영향이란 플라톤철학과 스토아철학이 절중된 다소 신비적 절충주의가  지중해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  

정리하여 말하면, 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전의 야스퍼스가 말하는 인류문명의 ‘차축시대’(BC.800-200)와 특히 AD. 1세기에, 동서양 문명 안에서는, 서로 표현이 달랐지만,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로고스 철학’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도의 철학’이 광범하게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 정신적 삶의 토양과 지평으로서 널리 퍼져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맨 처음 한글 성경이 번역되었을 때, 로고스를 도라고 번역하고, 성육신을 ‘도성인신’이라고 번역했을 때, 우리조상들은 쉽게 곧 받아드리고 그 말의 진리 앞에 ‘아멘’ 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서구문명이 급속하게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전통적 동아시아 철학적 사유체계 마저도 불신의 풍조 속에 휩싸여가게 되었다. ‘동도서기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기능적 사고가 점점 새로운 시대에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가 한국 사회 주류를 형성해가면서, 한문문자를 매개로하는 동양문화정신은 점점 멀어져갔다. 한자어가 헬라어처럼 낮선 단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정신문화적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게 되자, 성서번역에서 로고스를 ‘말씀’으로 번역하게 되었다.  종교경전의 번역은 피할 수 없이 토착화를 거치는데, 토착화의 과정 속에는 경전의 현지 언어 번역이 제1차적 관문으로서 통과의례였다.

로고스가 ‘말씀’으로 번역된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본래 로고스는 내재하는 이성이요, 합리적 본질을 뜻하는 것이므로 ‘말씀’이라는 단어는 ‘말’이라는 인간의 언어체험과 언어철학을 바탕에 깔고서라야만 로고스의 번역단어로서 기능을 감당 할 수 있다. 그런데,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계몽정신의 합리주의의 철학이 지난 300-400년동안 지구문명을 지배하는 동안,  언어란 무엇인가? 인간의 언어현상 곧 말을 한다는 것, 말을 글자로 표기한다는 것과, 사유 행위를 한다는 그 모든 정신 현상 자체를 이해하는데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언어철학’ 자체가 다양한 입장으로 분화되어 버렸다.

예들면, 요즘시대 젊은 대학생 관점에서는 ‘말씀’은 ‘말’의 존칭어 불과하고, 언어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문명발전 과정에서 만들어낸 ‘약속된 기호체계’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한 언어철학이 대세를 이루는 현대문명 속에서 요한 복음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계셨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등등의 성경구절이, 알듯 모를 듯 혼동스럽다. 그저 눈 딱 감고 성경말씀이니까, 귀중한 말씀이려니 하고, 여름에 보리밥 물 말아 삼키듯이 그냥 목구멍에 넘기는 것이다.

우리시대 많은 일반 지식인들은, 이 우주만물이 태초에 ‘우주대폭발’이라고 부르는 빅뱅사건이후 물질계가 만들어지고, 우연의 연속으로 물질원자와 분자들의 부딪히고 엉클어지는 과정 속에서 최초의 단백질 합성이 발생했다고 가정한다. 그것이 또 몇 억년간의 운동과 변화속에서 그야말로 ‘우연히’ 그러나 물질적으로 ‘필연적’으로 단순 생명이 생겨났고, 그 생물진화 정점에 인류가 탄생했다고 설명한다. 짐승과 달리 사회집단 생활을 효과적으로  영위하고 또 생존자체를 위해 인류는 ‘언어’라는 약속기호체계를 만들어 교육하고 내면화시켜온 것이 이 지구의 리얼 스토리라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에겐 ‘요한복음’의 서론은 신화적 잠꼬대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천체물리학의 우주발생이론과 생물학의 진화현상을 받아드린다고 해서, 위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필연적으로 ‘무질주의적 환원론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우주와 생명의 현상적 실재를 설명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들이 있기 전에, 시편기자 말처럼 ‘하늘과 땅이 조성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로고스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과학자들이 지구상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는 것이다.

진화론을 받아드린다고 해서 유물론적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창발적 우주과정과 생명진화가 ‘우연과 필연’때문이 아니라, 로고스와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새로움의 창발사건이 신묘하게 작용한다고 믿어야 한다. 필자는 창조적 진화론자요 달리 말하면 진화론적 창조를 하나님의 더 위대한 능력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태초에 ‘요술방망이’를 휘둘러 당신의 전능을 단 한 번에 과시하지 않으셨다. 농부처럼 일하셨고, 모험하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애태우며 격려하셨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신다고 믿는다.

우주와 생명이 ‘우연과 필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우주에 태초부터 도(로고스)가 있었고, 그것이 만물을 창발시켜가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지성인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소위 반종교적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관점 곧  과학적 세계관은 로고스 신앙과 양립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엉터리 주장이요, 그런 입장 자체가 그 사람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3. 말씀이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요한복음 첫 구절은 신앙선언 하고 있다. 마지막 단어 ‘계셨다’는 말은 ‘있다, 존재한다’라는 말의 과거형태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이 단어도 쉬운 어휘가 아니다. 도대체 있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 때는 없던 적이 있었는데 홀연히 있게 되었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우린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혀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통속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말한다. 도대체 신앙인 치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는 말보다 더 확실 한 것은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을 할 땐 깊은 생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 선생같은 이는 ‘없이계신 하나님’이라 하지 않던가? 하나님은 분명 계시지만 보통 생각하는 그런 있음의 방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깊은 생각 없이 함부로 통상적 의미로 남발하면 신성모독이되거나 하나님을 우스꽝스런 절대군주자로 만들어 버릴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의심 많고 어떤 질문도 사양하지 않는 현대무신론자에게 엄청난 공격빌미를 스스로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통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있다, 존재한다고 말 할 땐, 언제나 어떤 사물이 어떤 공간, 어떤 길이의 시간, 앞뒤에 연결된 존재인과율의 연결고리, 그리고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동일한 실체의 지속 등 4가지 필요조건을 갖추고서 존재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박한 신앙인은  하나님을  천국의  거룩한 보좌에(공간) 좌정하시어,  영원히(시간) 천군천사와 성도들에게 찬양을 받으시며, 만물의 주권자로서 (실체) 만물의 제1원인자로서 (인과율), 존재하고 계신다고 믿는 것이 가장 복음적이고 정통적인 신앙이라고 주장 한다.

그런 주장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겐 확신을 주는 설명이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왜냐하면 무소부재하신다는 하나님을 특정의 천상 시공간에 제한시키고, 사람모양으로 신인동형론적으로 그려놓고 있으며, 고대 2층구조의 신화론적 세계관의 그림언어를 영원불변한 진리인양 현대우주천문학 시대에도 그대로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로고스도 그런 식으로 태초에 계셨다는 말인가? 로고스도 천상이라는 초월적 공간에 계시다가, 낮고 낮은 지구에 강림하여, 계시는 장소를 천상에서 예수 몸 안으로 옮겨 계심으로써 성육신 하셨다는 말인가? 예수의 공생에 33년동안, 로고스가 계신 곳은 오직 유일무이한 장소 유대 땅 ‘예수 몸’ 안에 뿐이고, 다른 지구촌의 시공 속에서는 로고스가 부재중이란 말인가?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결과적으론, 33년 예수의 지상생애는 육신을 입고 땅 위를 걸어다니셨던 신이 되어 버린다. 그런 견해를 초대교부들은 가현론적 기독론이라 규정했다. 매우 잘못된 영지주의적 가현론이요 이단적 생각이라고  배척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지금 한국 기독교 보수신앙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수많은 목사님들이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가장 복음적 정통신앙이라고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가현론적 기독론에 가깝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라는 말에서 ‘계셨다’는 단어도 ‘태초에’라는 말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로고스는 시간과 공간과 특정 인과율에 메인 피조물이 아닌 것이다. 로고스는 제1세기에 유대 땅에서 계시는 동안에는 동아시아나 아프리카나 남미에는 부재중인 그런 유한한 존재자자가 아닌 것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런 우스꽝스런 독단적이고도 독선적인 그리스도교를 전하려한 것이 아니다. 무소부재하시고 영원하신 로고스가 우주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시적으로 무소부재 하시고, 우주정신과 창조원리로서 활동하고 계시지만,  나사렛 예수 생명과 삶 안에서 가장 투명하게, 가장 온전하게, 가장 순수하게,  진리화신체 몸으로서 육화한 로고스를 만났다는 증언인 것이다.

시공을 넘어 추상적 관념적 진리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육체적 생명으로 나타난 예수를 만남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해지는 삶’을 살라고 초청하는 초대장인 것이다. 그러면, 이 영원한 로고스와 하나님관계,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계속)
 

김경재 고문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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