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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들힐 영성기행여행의 시작, 펜들힐로 가다
문영미 | 승인 2011.11.02 21:31

문영미 님은 지난 2년 동안 펜들힐 퀘이커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동화작가로 <우리 집에 온 길고양이 카니>와 <우리마당으로 놀러 와>를 썼으며 어른들을 위한 책으로는 <새벽의 집>,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를 쓰기도 했다.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영성과 미술,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 요즘은 “성매매 근절을 위한 한소리회”에서 교육 상담을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나는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펜들힐 공동체에서 머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함석헌 선생님이 한동안 머무신 곳으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곳은 80년의 전통을 가진 퀘이커 교육 공동체이다. 캠퍼스에 들어서자마자 대 여섯 명이 둘러서서 팔을 벌리고 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는 너도밤나무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펜들힐 사람들은 이 나무를 할머니 나무라고 부른다. 할머니처럼 펜들힐 공동체를 팔십년 동안,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내려다보며 품어주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여느 수목원보다 더 울창하였고, 오래되어 허름하긴 하지만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드문드문 들어서있는 그곳은 빽빽한 아파트 숲에서 살던 우리 가족에게는 낯선 천국처럼 느껴졌다.

   
▲ 펜들힐 가을 풍경

펜들힐의 공동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면 방문자들의 호기심어린 질문을 종종 받게 된다.  “어떻게 펜들힐에 오게  되었나요? 그것도 한국에서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그것도 식사를 하면서 말이다. 사실 나도 내가 왜 한국에서 잘 살다가 갑작스레 펜들힐에 오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도 남편과 헤어져 두 딸 아이를 데리고 말이다.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하도록 누가 나를 여기로 보냈을까?  함석헌 선생님이 종종 쓰시던 표현처럼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사실 펜들힐로 가기로 한 결정은 다소 충동적이었다. 2009년 여름 나는 아침마다 108배를 하고 있었다. 기독교인이지만 나는  종종 108배를 하곤 한다.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기도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 즈음 미국에 있는 친정에 어려운 일이 있어 절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였다. 어느 날 아침 절을 하는데 뜬금없이 “펜들힐”이라는 단어가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에 우연히  펜들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뉴저지의 한 한인방송국에서 일할 때였는데, 펜들힐에 머물고 있는 한국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4월의 눈부신 봄날에 그곳에 갔었다. 그해에는 마침 한명숙 전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선생님을 비롯해 정지석 목사님 내외 등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꽤 많이 있었다. 꽃이 나무 전체를 하얗게 뒤덮은 층층나무 아래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던 장면이 어렴풋이 되살아난다. 텔레비전 촬영을 위해 짙은 화장을 하고 땡땡이 무늬의 치마를 입고 인터뷰를 했던 생각을 하니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십 여 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펜들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절을 하면서 펜들힐을 떠올렸던 그날 아침부터 나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펜들힐로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무심코 떠오른 펜들힐이었지만,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은 평소에는 꽤나 우유부단한 나에게 이상할 정도로 쉽게 내려졌고,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미국에 가고자 한 이유에는 물론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뉴저지에 계신 연로하신 부모님 곁에 한동안이라도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두 딸아이에게 미국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펜들힐에서 조용히 지내며 동화를 쓰고 싶었다. 나는 급하게 수속을 밟고 짐을 챙겼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나의 모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모험은 내가 기대했던 방향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퀘이커에 대해 배우면서 가을에 낙엽이 물들어 가듯이 펜들힐에 조금씩 물들어가기 시작했고, 나의 내면과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나의 신앙과 영성의 세계를 새삼스레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내가 체험한 영성의 세계를 그림으로, 조각으로, 도자기와 모자이크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펜들힐은 1931년 대공황기에 세워졌다. 퀘이커들은 흑인 노예 해방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평화 운동에 앞장서왔다.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그 행동이 깊은 영성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퀘이커 정신을 가르치는 평신도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약 50여명이 되는 직원과 학생들은 펜들힐 캠퍼스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직원들 가운데는 캠퍼스 밖에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동체 생활을 함께 묶어주는 것은 영성 생활과 공동식사 그리고 함께 하는 노동이다. 밭일에서부터, 설거지, 화장실 청소, 낙엽 쓸기를 함께 하며 땀을 흘리는 것도 기도의 한 방법이자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나처럼 일 년 과정으로 오기도 하고 한 학기(3개월) 동안 머물다 떠나기도 한다. 펜들힐에서는 주말 워크숍 같은 단기 교육 프로그램들이 있어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한 사람들을 유혹한다. 주말 워크샵의 주제는 불교 명상이나 기치유와 마사지, 글쓰기 등 매우 다채롭다.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사회참여를 주제로 한 워크숍 보다는 개인의 치유와 영성에 관련된 워크숍이 훨씬 인기가 높다. 때로는 아무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쉬거나 글을 쓰기 위해 펜들힐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10월 초 드디어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단 퀘이커 공동체에 왔으니 퀘이커 신앙에 대해 배우고 싶어 “Quakerism”수업을 들었다. 여러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퀘이커 신앙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날은 마침 미술 선생님이자 조각가인 Carol Sexton이 퀘이커 예배에 대해 강의를 하는 날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퀘이커 여배에 대해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떠오르는 이미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검은 도화지와 흰색 색연필을 나누어 주면서 떠오른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했다. 10분 만에 이 그림을 그렸다.
펜들힐에서는 매일 아침 예배를 (meeting for worship) 드린다. 펜들힐에 와서 처음으로 경험한 퀘이커 예배는 가을철 시장에 막 나온 귤을 한 조각 맛 본 듯한 신선함이었다. 퀘이커의 예배는 아무 프로그램도 없이 침묵 속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었다. 동양의 명상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처음에는 그 30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찬송과 기도와 설교로 숨 쉴 틈 조자 주지 않는 개신교의 예배와는 달리 침묵으로 텅 비어있는 예배였다. 예배실에도 성물이나 십자가 같은 장식이 하나도 없이 오래된 긴 나무 의자가 서로 마주보며 둥글게 놓여있는 게 전부였다. 조용히 앉아 있다 보면 졸음이 와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그렇게 침묵 속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누군가 일어나서 말씀을 증언하기도 하였다.

퀘이커들은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누구나 하나님과의 직접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불현듯이 떠오르면 그 사람이 일어나서 그 말씀을 나누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날 떠오른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목사님만의 고유의 권한이라고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에게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말씀을 전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나는 2년 동안 단 한 번도 예배시간에 일어나 메시지를 나누지 못했다.) 그 메시지들은 미리 준비하지 않았기에 소박하고 단순했지만 때로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하루 종일 음미하며 곱씹어 보게 만들었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처음에는 지루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 일과 중에 가장 소중하고도 평화로운 시간이 되어갔다.

그날 수업시간에 나에게 떠오른 것은 커다란 눈물방울이었다. 그리고 그 눈물방울 안에는 두 여인이 서로 껴안고 위로를 나누는 모습이 있었다. 내가 퀘이커 예배에서 받은 첫 인상이었다.

30분정도의 침묵 예배가 끝나고 나면, 앞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이 기도 제목을 나눌 시간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부터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기도와 같은 다양한 기도를 한다. 이때 퀘이커들이 잘 쓰는 표현은 “오늘 하루 동안 이 사람을  빛으로 감싸주세요.”(Please hold her in the light)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분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세요.” 정도가 될 것이다.

그해 가을 학기에 같이 공부하는 동기 중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의 딸이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개신교에서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장로님 또는 어느 정도의 신앙의 연륜이 있으신 분이라야 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분이 딸을 위해 기도를 할 때 마다 나의 눈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이 분의 기도가 왜 나로 하여금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일까? 예배시간에 평신도가 소박한 마음의 기도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어떤 치유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에는 더 큰 힘이 있다고나 할까? 가슴에만 담아두지 않고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용기이고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일까? 평범한 엄마의 소박한 기도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부장적인 한국 교회에서, 너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암암리에 강요되는 침묵과 수동성에 숨이 막혀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딸을 위해 기도하는 그 분의 기도를 할 때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비단 그분의 아픔을 공감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분이 기도하는 그 모습을 통해 억눌려있던 나의 아픔이 조금씩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아 이렇게 자신의 기도를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할 수 있구나!” 그 기도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였지만 진정성이 있었다.  기도 시간이 끝나면  인사하고 포옹하면서 서로를 위로하였다.

   
▲ 눈물방울

퀘이커 예배의 첫인상은 침묵 속의 신비로움이었다. 그 속에는 눈물과 치유가 있었다. 

문영미  ymdal@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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