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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3 일간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세부 (Cebu) 이야기
강현 | 승인 2011.11.09 21:56

매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인근 국가를 함께 여행하곤 한다. 이번에는 필리핀에 다녀왔다. 집 (캐나다 에드먼튼) 에 돌아온 후 여행기를 서너 차례 작성해서 여기저기 올렸다.

난생 처음 가서 단 사흘 동안 머물렀던 나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여행담을 늘어놓았다고 하면 좀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근데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새로운 장면들을 보았고 느꼈는데, 그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부 (Cebu) 에 갔었다. 보라카이와 함께 필리핀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 중 하나다. 근데 내가 간 곳은 휴양지가 아니었다. 나는 세부에 가서 남들 다 하는 호핑투어나 스노클링은 고사하고 바다 구경조차 제대로 한 기억이 없다. 애당초 <외국인 수용소> 에 불과한 리조트 같은 곳에는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십 여 시간에 이르는 비행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리조트에 가는 대신 그 도시 한 복판에 머물면서 그 도시의 진짜 모습을 보고 왔다.

만 3 일 동안 돌아다녀 본 필리핀 제 2 의 도시이자 옛 수도였던 세부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개발독재시대에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인생의 절반가까이를 북미에서 보낸 나는 이처럼 적나라한 집단적 빈곤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다. 아마 그래서 세부의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 세부 시내의 전형적인 판자주거지역

사실 세부는 휴양지로서 유명세를 타기 이전에, 아시아 식민지역사에서 그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도시다. 필리핀은 아시아 국가들 중 서구의 식민지 지배를 가장 먼저 받기 시작한 나라인데 그 식민지 시대의 출발을 세부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해적선 세 척이 이 나라 정중앙에 있는 섬 세부에 도착했다. 이 해적선에는 항해사 겸 선교사 겸 전리품 약탈을 노리는 도굴꾼 겸 그 전문분야가 확실하지 않은 수상한 패거리 270 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내가 마젤란 선단을 탐험선이 아니고 해적선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이 글은 여행 이야기이지 역사 강의가 아니므로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들은 원래 다섯 척의 범선을 몰고 스페인의 Seville 항을 출발했다가 풍랑에 두 척을 바다에서 부셔먹은 뒤, 새 척으로 줄어든 선단을 이끌고 장장 4 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세부에 도착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항해를 해야 했던 이유는 이들이 남미대륙의 최남단을 돌아 태평양을 대각선으로 횡단하는 위험천만한 항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항해인지 표류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오랜 선상생활에서 비롯된 질병과 기아로 인해 이들은 거의 빈사상태에 이른 채 세부섬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젤란이 세부섬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이 땅은 국왕폐하 (스페인의 카를로스 1 세) 의 새 영토로다” 라고 외치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이 곳이 교회의 영토임을 확인하기 위해 <십자가> 를 꽂는 일이었다.

마젤란이 꽂았다는 십자가는 16 세기에 세워진 산토 니뇨 성당 근처에 다른 나무로 덧씌워 진 채 보관되고 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출신이지만 이 때는 스페인 국왕의 명령을 받고 동방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탐험여행에 나선 것이었다.

   
▲ 마젤란 크로스

Rajah Humabon (세부의 왕) 은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자기 통치구역에 상륙한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음식을 제공했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로서는 난데없이 나타난 굶주리고 병든 손님들을 보살피는 도리를 다한 것이지만, 세부의 왕 <후마본> 이 유럽인들에게 베풀어 준 이 호의와 친절은 필리핀뿐 아니라 향후 400 여 년에 걸친 아시아의 비극을 불러 온 신호탄이었다.

마젤란이 도착한 그 해로부터 44 년 후인 1565 년부터 스페인은 군대와 선교사들로 조직된 식민지 통치기구를 설립하고 필리핀에 대한 본격적인 수탈작업을 시작했다.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통치는 잔혹하고도 무자비한 약탈정책이었다. 이들은 필리핀에서 자본주의 시장 따위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당초 주민들과의 상거래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현지 주민들의 교육이라든가 근대적 시설의 설립 같은 것도 거의 시행하지 않았다. 기독교 (Roman Catholic) 로의 강제개종과 무자비한 살육이 전부였다. 엄청난 양의 목재를 비롯한 재화들을 탈취해서 유럽으로 실어갔다.

국가독점자본에 의한 약탈무역이 주목적이었던 19 세기 식민지와는 아예 그 근본 성격부터가 다른 전기자본주의 스페인의 야만적인 식민정책은 필리핀 군도 전체를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식민지 통치기구의 무자비한 약탈과 강제개종이 이 나라에 남긴 것은 아무래도 가난과 체념 같다. 정신적 질병으로서의 체념은 외세의 침략과 약탈에 대한 저항의식마저 마비시키는, 전염병 같은 존재였다. 부패와 부의 독점적 편중은 당연한 결과였다.

   
▲ 어린 세 동생을 보살피고 있는 열 살쯤 된 아이의 모습

이 도시에 사흘 간 머물면서 <여행자로서> 배운 것이 한 가지 있다. 이 도시에서는 1 % 와 99 %를 가르는 전선이 아주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 계급 저지선을 가르는 물리력은 무장경비들이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도시에는 경비(security grads)가 유난히 많다. 모두 권총과 테이저건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 도시에 딱 두 개 있는 대형 쇼핑몰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머무는 호텔, 리조트, 그리고 <라훅>-비버리힐즈 지역에 모여있는 부자 동네 인근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그 한 줌도 안 되는 특수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거의 전부가 거대한 빈민가요, 판자촌이었다. 나는 3 일 동안 이 도시 빈민가 곳곳을 누비면서 제복을 입은 경찰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러시아워에 난장판이 된 거리에서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있는 교통순경을 한 명 보기는 한 것 같다.

아마 세부라는 도시는 <3 일 여행자> 나에게 이렇게 기억될 지도 모르겠다. 한 줌도 안 되는 상류층이 압도적 다수의 빈곤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숨막히는 긴장이 흐르는 도시. 그러면서도 길거리에는 온통 체념과 길거리 범죄 (street crime) 의 불안만이 가득한 건강하지 않은 도시.

   
▲ 카르본 시장의 풍경

오래 전, 을씨년한 어느 가을날 저녁 뉴욕 맨하튼 어퍼타운(할렘) 에서 느꼈던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강현  sarn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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