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 24일, 우리 사법사에 길이 남을 판결을 내렸다. 논란의 대상이던 한일청구권 협정의 효력에 대해 마침내 사법적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잘라 말해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과 무관하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지사다. 일본정부가 식민지 불법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법적 배상도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상태에서, 합의된 협정문서 어느 한 페이지를 이런 저런 명목으로 색칠해 ‘서로 입 닫기로’ 했다고 해서,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기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잘못한 일이 없다고 오히려 배 내밀고 나온 일본 입장에서 사죄는 무슨 사죄이며, 배상은 무슨 배상이었겠는가?

그런데 실로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법주권을 바로 세웠다며 이 땅 위에 숨 쉬는 국민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나선 마당에, 유독 정부만 곤혹스럽다는 표정이다. 도대체 뭐가 그리 곤혹스럽다는 것인가!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린 최근 언론 보도들에 의하면 “정부 입장과 상이하다”거나 “정치적, 외교적 의미와 법적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아울러 “(대법판결에도 불구하고) 미불임금 등 강제징용 문제는 65년 청구권협정의 틀에 포함돼 있다고 본다”며 “(결국) 정부는 더 이상 일본정부에 요구할 게 없다”고 한다.

참으로 경악을 금치 못할 발언이다. 도대체 어느 나라 관리자에서 나온 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외무성이나 할법한 말을, 왜 우리 정부가 하고 있는가. 일본정부 입맛 맞는 말만 골라하는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대변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잘라 말해, 사법부 판단은 판단이고, 정부는 조롱하듯 입맛대로 알아서 하겠다는 것인데, 이게 과연 법치국가에서 가능할법한 발언인가. 삼권분립 하에 국가 간 조약의 해석권한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한 국가에서 두 개의 해석이 벌어질 수 있는가!

사실, 이번 판결은 일제 피해자들의 눈물을 외면해 온 우리정부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자, 준열한 채찍이다. 박정희 정권은 조상들의 피 값, 목숨 값을 담보로 돈 몇 푼에 일본정부와 검은 뒷거래를 해 왔고, 뒤이은 역대 정권 역시 해방 67년이 되도록 일본 탓만 하며 마치 남의 일인 냥 뒷짐만 져 왔다. 양심이 있다면, 정부는 지금 바다 건너 일본과 입 맞출 것이 아니라, 하루가 다급한 일제피해자들에게 석고대죄부터 해야 한다.

24일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실로 해방 67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그러나 현실은 간단치 않다. 내일 모레를 알 수 없는 팔순, 구순의 피해자 개개인들이 언제 재판하고, 어느 세월에 배상을 받을 것인가. 해방 67년을 기다렸는데, 이것도 부족하단 말인가.

알려진 것과 같이, 현재 일본은행에는 해방 67년 동안 수 조원 대에 달하는 막대한 징용 피해자들의 미불임금이 공탁형태로 현재까지 보관돼 있다. 그 돈이 과연 어떤 돈인가? 조상들의 목숨 값이 67년간 해외에 잠들어 있어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찾아올 생각조차 않는 게 과연 제 나라 정부인가!

굳이 재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일본 탓, 한일협정 타령만 하는 통에 과연 어떤 치욕을 당했는가.

일본 니시마츠 건설이 중국인 피해자들에게는 47억원을 보상하면서도, 같은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 한 한국인 피해자(110명)들은 단 돈 십 원 한 푼 없었고, 겨우 14살에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에 끌려간 근로정신대 양금덕(83)할머니에게는 고작 99엔(1,300원)으로 모욕하지 않았는가?

징용도 서러운 마당인데, 국적에 따라 중국인 목숨 값과 한국인 목숨 값이 왜 달라야 하는가? 황소 두 마리 값을 받아야 할 팔순 할머니가 99엔의 치욕을 겪을 때, 과연 우리 정부는 어디에 있었는가? 사할린 피해자들은 한일협정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면서도 사할린 우편저금은 왜 지금껏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가. 과연 누구 탓인가! 언제까지 이 꼴을 봐야 하는가!

충고하건 데, 대법 판결 이후에도 ‘민간의 문제’이니, ‘당사자 간의 문제’이니 하며, 국가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입부터 당장 다물라!

마지막으로 우리 일제피해자와 시민들은 감히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첫째, 대법 판결에 따른 후속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정부 입장을 명확히 하라!

이제 공은 정부에 넘어가 있다.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차라리 고백하라!

둘째, 정부는 시급히 외교부는 물론이거니와 범정부차원의 대책기구를 구성하라!

일제강제동원 문제를 피해 당사자들의 문제라며 개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은, 국가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다. 미쓰비시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문제가 단순히 근로정신대 할머니들만의 문제인가?

해외에서 잠자고 있는 공탁 미불임금, 사할린 우편저금, 후생연금부터 즉각 회수하라! 일본과 입 맞출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가 파생한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는 차원에서라도, 오히려 이런 문제일수록 북한과 공조해야 한다.

셋째, 여야를 망라해 일제 강제동원 문제 전반을 다룰 국회차원의 특위를 구성하라!

구순을 바라보는 일제 피해자들의 연령을 고려할 때 19대 국회는 일제 강제동원 문제를 다룰 마지막 국회가 되기 쉽다. 생존자들한테는 1년에 고작 80만원 푼돈을 쥐어 주는 사이, 미쓰비시 등 국내에 진출한 일제 전범기업들은 지금 막대한 수익을 거머쥐며 활보하고 있고, 포스코를 비롯한 대일 청구권자금 수혜기업들은 조상들 목숨 값으로 나날이 배를 불리고 있다. 이러고서도 국민들한테 고개를 들 수 있는가. 강조하지만, 우리는 국민들과 함께 19대 국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주시할 것이다.

2012년 5월 31일

일제피해자공제조합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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