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람이야기 사람과 교회 단신
“일본에서 맞은 11월의 찬바람의 의미는”일본 탈핵 평화 기행을 마치고(이승무 순환경제연구소장)
편집부 | 승인 2012.11.07 13:18

이승무(순환경제연구소장)

평화기행을 위해서 모이고

   
▲ 이승무 순환경제연구소장
나는 지난 10월 29일부터 11월 4일까지 일본을 방문했다.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는 동경에 주로 있으면서 일본의 산업폐기물 관리정책에 대한 조사활동을 했으며, 11월 1일부터 4일까지는 일본 남쪽 지역에서 자전거 평화 투어를 했다. 자전거 투어는 한일 100년 평화시민 네트워크가 일본의 릿코리교류회의 일정섭외와 안배를 받아서 조직된 것이다. 평화시민 네트워크는 군포의 환경자치시민회를 중심으로 참가자를 모집하였으며, 서울지역에서는 나와 아들 홍범이가 참가했다.

먼저 군포에서 부산까지 전세버스가 참가자들과 이들의 자전거를 싣고 가야 했으며, 자전거의 운반을 위한 분해와 조립이 필요했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 일을 위한 전문성을 가진 청년이 있었다. 나는 홍범이와 함께 그 전 일요일인 28일에 출발지인 군포시청에 시외버스를 타고서 미리 자전거를 갖다 놓았다. 그리고 홍범이는 10월 31일에 투어 팀과 함께 군포에서 출발하고 나는 31일 밤에 동경에서 후쿠오카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 다음날 아침에 후쿠오카의 하카다 항에 도착하는 평화투어팀과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동경에서 31일 저녁 8시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니 10시가 되었다. 일본의 중간 지점에서 남부지방으로 왔을 뿐인데 두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일본은 생각보다 넓은 땅을 가지고 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하카다에 잡아놓은 호텔로 갔다. 하카다역에서 내려 호텔을 찾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호텔에 들어가 안내를 받아서 겨우 호텔에 도착하니 밤 11시 30분 정도가 되었다. 구마모토 선생이 하카다에 그 시간에 머물고 있다고 해서 연락을 시도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시간에 하카다에 내가 도착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분과 시간을 보내느라 전화가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6시 40분에 호텔을 나서서 택시를 타고 하카다항으로 갔는데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착해서 국제선 터미널 3층 전망대로 올라가 바다 쪽을 보니 이미 카멜리아 호가 도착하여 정박해 있었다. 그러나 도착시간은 7시 30분으로 되어 있고, 그때까지 배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7시 40분경이 되자 승객들이 한 사람씩 도착하는 출구로 나왔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단체로 여행을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평화투어 팀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일본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고 살펴보았다. 조금 있으려니까 과연 몇몇 일본 사람들이 큰 모조지에 큰 글씨의 한글로 자전거 투어 팀을 환영하는 글을 쓰고 미리 제작한 평화투어 팀의 노란색 조끼를 입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 내가 그 방문 팀의 일원이라고 영어로 이야기했다.

드디어 한국에서 온 투어 팀이 한 사람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짐에는 포장된 자전거가 있었으므로 아주 불편해 보였다. 자전거의 운반을 위해 작은 트럭 두 대가 왔고, 한국에서 온 팀 13명과 일본의 평화교류회 인사 4-5명이 마이크로버스에 탔다. 우리는 하카다항에서 현수막을 펼쳐들고 기념촬영을 한 후에 바로 나가사키로 이동했다. 각 팀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가져온 기념 뱃지를 보관하고 그때그때 일본 분들에게 나누어주는 역할을 했고 또 어떤 분은 손수건을 맡았다. 현수막을 맡은 것은 홍범이였다. 사진촬영과 자전거 조립 분해를 맡은 것은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인솔단장인 이대수 목사님의 아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 아들인 홍범이를 설득해 핵발전소 반대에 함께 했다.

나가사키 원폭박물관과 겐카이 원전

제일 처음 간 곳은 나가사키의 원폭 박물관이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리틀보이라고 하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은 팻보이라고 하는 플루토늄탄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들은 설명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6.25 전쟁 당시에 스톡홀름에서 원자탄의 사용금지를 촉구하는 선언이 수많은 시민들의 서명으로 채택되었고, 그것이 미국 측에 의한 이북지역의 원폭투하의 계획을 철회하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평화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이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폭투하로 파괴된 나가사키의 성당 근처에 자그마한 평화자료관이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여 민족성을 말살하고 무참한 살육을 자행한 사실들을 보여주는 많은 사진과 문서자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원폭 희생자의 증언을 들었으며, 그 증인은 어떤 할머니였는데 원폭 투하 당시에 끔찍했던 상황과 그때 나뒹구는 시체를 운반하는 데 어떤 징용당해 온 한국 청년이 도와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한국청년을 그 후 더 이상 만나 볼 수가 없었고, 누군지 이름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 이야기를 한국에서 듣거든 자신에게 꼭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분이 증언하면서 울먹이는 것을 보고 또 그 참혹한 상황 가운데서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된 두 국적을 넘어서 도움을 주고받은 그 또렷한 기억에 대한 증언이 듣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사가현의 겐카이죠(玄海町)로 이동했다. 그곳에 겐카이 원전이 있는데 이는 플루토늄을 사용하는 위험한 원전으로 알려져 있다. 죠 청사에 들려서 겐카이 죠의 재정기획과장과 회의를 했다. 그는 원전이 겐카이의 산업의 한 요소로서 자리매김하기를 바랐다. 현재는 재정의 70% 이상이 원전에서 나오고 고용도 그러하다. 그런데 원전에만 매달리는 경제로부터 탈피하기를 바라는 것뿐이지 탈원전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자치단체 공무원으로서 그의 입장은 미묘했다. 나는 겐카이 원전이 폐로 되어도 국가의 재정지원이 중단되는 것은 불합리하며, 원전의 폐쇄가 과연 인구의 유출을 가져올 것인지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고 이야기했다. 동북지방의 원전재해로 많은 인구가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원전이 없어진다면 더 많은 인구가 이 지역으로 유입할 수도 있어서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는 후쿠시마의 피난민이 겐카이로 들어온 일은 없다는 말로 일축했다.

그 회의가 끝나고 근처의 청소년 수련원에서 짐을 풀었다. 입실하기 전에 직원으로부터 시설이용에 대한 안내를 한참 들었다. 이부자리를 펴는 방법, 다시 개는 방법, 목욕탕 이용방법, 아침의 교류회에 대한 안내 등 자세한 안내가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사가 현의 시민조직과의 교류회가 있었다. 그중 가장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는 어느 사원의 화상(승려)라고 하는데 오랫동안 중학교 선생님으로 일하시던 분이라고 한다. 그분은 일본의 한국침략 등 범죄행위에 대하여 깊이 사과하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일본의 패전 시에 야마구치의 중학교 동창이던 한국 친구가 손을 잡고 이제 일본의 밀리타리즘은 끝났다고 하며, 한국의 아리랑이란 노래를 불러주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 할아버지는 70년대에 겐카이 원전이 세워지기 전부터 반대운동을 하시던 분이라고 한다. 겐카이 원전에 대한 행정소송을 진행하는 모임의 회장도 참석하였다. 그 모임은 어느 분의 기도로 마쳤다. 그 분은 목사는 아니고 일본의 우치무라간초우의 사상을 따르는 무교회주의자라고 한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정말 교류회를 했는데 그 수련시설에 묵은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이는 자리였다. 거기 모인 단체들이 서로 소개하고 각 단체의 깃발을 게양하고, 또 일본의 국민체조를 함께 하고, 또 퇴소하기 전에 뒷정리하고 쓰레기 버리는 법을 안내받았다.

 

나고야성 유적지와 큐슈전력 본사 농성텐트와 탈핵집회

아침에 그 수련시설을 나와서 나고야성 유적지에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겐카이 원전과 함께 멀리 대마도가 보였다. 또 그곳에서 보이는 가까운 섬에서는 백제의 무령왕이 어느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은 이츠카의 박물관이었다. 그곳에서는 무궁화회의 회원들이 도시락을 준비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사시대의 옹관묘와 인골이 실물로 전시되어 있었으며, 한 세기 이전의 탄광의 모습이 전시되었다. 그곳에서 무궁화당에 관련된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전시물은 없다고 한다.

부근의 공원묘지에 있는 무궁화당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징용노동자로 일했던 배래선 씨가 세운 희생당한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의 유골을 안치한 사당이다. 그곳의 유골 안치소 내의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통역을 하시는 기무라 선생님은 1944년생으로서 조선 사람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더러 한국 사람이 와서 그곳에 서명을 하면 좋아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들 서명을 하라고 하셨다. 그 무궁화당에는 조선 사람으로서 남과 북이 만나는 곳이었고 이 갈라진 두 개의 조국에 대한 기억을 할 수 있는 그림도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져간 막걸리를 올리고 재배하면서 우리가 왔음을 알렸다.

   
▲ 큐슈전력 본사앞 원전철폐를 위한 농성장
그 다음으로 우리는 다시 버스에 타고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규슈 전력 본사 앞의 겐카이 원전 철폐를 요구하는 농성 텐트를 방문했다. 그곳은 아침 9시에 설치하고 저녁 6시에 철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농성을 몇 년째 하고 있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격려의 말을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하고, 사진을 찍었다. 홍범이는 자기 친구가 원자력발전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자기가 원자력발전소는 나쁜 것이고 없애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어서 이제는 그 친구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에 농성 중이던 분은 신이 나 했다.

   
▲ 기타큐슈 시청 앞 금요탈핵집회가 열리고 있다.
그곳을 떠나서 기타큐슈 지방으로 갔다. 그곳의 고쿠라(小倉) 역 근처 기타큐슈 시청 앞에서는 금요일 저녁마다 탈핵집회를 하는 사람들이 어두워져 가는 6시 경에 모여들어 현수막과 마이크를 설치하고 페트병을 잘라서 바람가리개로 사용하는 촛불을 붙여 들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도 촛불은 안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이대수 목사님은 찬조연설을 했고 우리는 함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곳에는 자전거 투어를 위해 한일평화라는 간판을 달고 나온 자전거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미우라상이었다. 그는 유령 복장을 만들어 와서 퍼포먼스도 했다. 매우 창의적인 방식으로 시위준비를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고쿠라 한인교회로 들어갔다. 그곳의 흰 수염이 덮수록한 주문홍 목사님이 앞치마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게스트하우스 2층에 짐을 풀고 본관 1층의 친교실로 가보니 저녁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맥주와 일본 소주가 준비되어 있어서 마음대로 마실 수가 있었다. 주 목사님의 기도로 만찬을 시작했다. 여신도 몇 분이 음식을 준비해 주시었고 주 메뉴는 삼계탕이었다. 삼계탕은 주 목사님이 직접 조리했다는 것 같았다.

술을 좋아하는 분들은 목사님에게 부근의 이자카야 (일본 술집)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고, 일본의 주당 아카사카상과 함께 2차로 이자카야를 간 사이에 재일교포 한 분이 왔다. 그는 배동록 선생으로서 민족학교 출신으로 자신은 우리와 사상이 다르다고 했다. 일본 학교를 방문하여 조선 문화와 역사를 가르친다고 한다. 그분의 딸은 민족예술공연을 하는 무용수라고 한다. 밤 12시가 다 되어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한국의 선거가 잘 되어서 남과 북이 서로 오갈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하신다. 선거의 분위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일본에 많았다. 그 다음날 자전거 투어도 있어서 나는 침실로 갔다.

 

자전거 투어와 한일 노래자랑

   
▲ 평화기원하는 자전거기행을 시작했다.
그 다음날 드디어 자전거를 탔다. 금요일 저녁에 이지운 청년이 자전거를 다 조립해 놓은 것이다. 고쿠라를 출발하여 규슈와 야마구찌를 연결하는 다리 지하로 난 인도를 자전거를 끌고 통과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말로만 듣던 시모노세키인데 거기서 다시 자전거들을 트럭에 실었다. 그리고 우베시까지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가서는 우베시에서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토요일인데도 교복을 입은 여중생들이 길을 가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안녕하세요?” 하고 자연스러운 억양의 우리말로 인사를 했다. 대체로 키가 작고 꾸밈 없이 순박한 학생들이었다.

   
▲ 조세이(長生) 해저 탄광 수몰사고 유적지
우리는 그곳의 조세이(長生) 해저 탄광 수몰사고 유적지로 갔다. 해저 탄광이 수압을 못 이기고 수몰되어 그곳의 많은 광부들이 물에 익사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조선에서 끌려간 징용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인 광부들은 가족과 함께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고, 조선인들은 도망치지 못하게 수용시설에 갇혀서 지냈다는 것이다. 그곳의 사고를 파헤치는 모임의 대표자는 아주 열띠게 설명을 해 주었고, 그 전날 설명자료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배포하였는데 밤을 새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바닷가의 사고 현장 해변에서 설명을 들었고 그곳의 추모비를 둘러보았다. 우리의 자전거 투어는 거기서 아쉽게도 끝났다. 겨우 30킬로미터 정도를 탔을까? 다시 자전거 바퀴를 분해해서 커버를 씌워 트럭에 실었다.

그리고 우리가 건너온 간몬 해협의 다리가 보이는 언덕의 가톨릭 노동교육회관에까지 가서 여장을 풀었다. 또 교류회였다. 재일교포 할머니를 비롯한 분들이 특별히 한국 음식을 준비해 오셨다. 김치는 오히려 한국 김치보다 더 매콤했다. 이번에는 우리의 여정을 총 결산하는 보고를 여지껏 운전을 해 가면서 일정을 이끌어오신 구아노 야스오 리코리회 회장이 릿코리회 회원들에게 했다. 음식을 먹으며 한국측과 일본측의 노래자랑이 있었다. 한국측에서 참가한 박선봉 선생은 민주노총에서 일하는 분으로서 민요를 잘 불러서 그 자리에서도 열창을 했다. 모자를 돌려서 즉석 모금을 했는데, 꽤 많은 돈이 걷혔으나 모두 릿코리회에 기부하기로 했다. 일본 측에서는 재일교포 가수 이양우 선생의 노래가 있었다. 나는 고향을 그리면서 부르는 그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심금을 울리는 노래였고 몇몇 분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밤 12시경까지 일본 분들과 영어로, 또 통역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탈원전, 평화의 생각을 같이하는 두 나라의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시모노세키의 해협을 드나드는 물고기들에게 들려서 그것이 태평양으로 나가 전세계에 퍼지게 되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친해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절박한 탈원전의 문제, 그리고 동북아 평화의 문제가 우리를 억누르고 있음을 함께 느끼고 있던 때문이리라.

 

사람이 사랑과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을 위하여

그 다음날 아침 얼큰한 된장찌개와 김치, 북어를 반찬으로 속풀이를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다시 후쿠오카의 하카다로 가서 처음으로 쇼핑을 할 시간을 30분 얻었다. 30분 동안 챙겨야 할 선물들을 급히 고르고 사야 했다. 그 중에 자전거를 먼저 항구로 운반하는 일을 도운 김시권 선생은 다시 돌아와서 그에게는 쇼핑할 시간이 단 5분이 주어졌다. 그는 급히 서점으로 달려가 탈원전에 관한 책을 찾았다. 그는 내부피폭의 문제를 다룬 책을 사고자 했으나 그 서점에 그런 전문적인 책은 없었다. 다만 3.11 후의 탈원전 주제를 다룬 책들이 몇 권 진열되어 있었고, 그는 그중에서 “속아 넘어간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는 책을 구입했다. 굉장한 열정이었다.

12시경에 배에 올라서 12시 30분이 되자 카멜리아호는 닻을 올렸다. 외항선을 처음 타보는 것이다. 배에서는 일행이 선실 하나를 세 내었는데,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누워있어도 되어서 아주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다. 조금 가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내내 일본에서 날씨가 쾌청했었던 것을 다시 생각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와 함께 한 일본인들은 우리를 잘 이해했고, 불편함이 없도록 잘 챙겨주었다. 한국말도 서툴지만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이 잘 하는 분들이었다. 기무라 선생과 구아노 아쓰오 선생, 60대 중후반의 그들은 일본의 양심 있는 지성인들이었다. 주벽이 있는 아카사카상도 마음은 비단결 같이 고운 분이었다.

자본주의 국가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인을 착취했다. 그 착취가 자본주의 사회가 궤도에 오르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은 일본만의 경우가 아니라 어느 선진자본주의에서도 예외가 없이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것은 맑스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피한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본다면, 이는 착취와 억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에게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고 보상을 해 주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과거를 지나치게 들추거나 상세히 묘사하는 것은 하지 않게 된다. 이는 양심 있는 부르주아적인 접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잔혹한 속성을 감추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런 피 냄새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진지하게 문제시하고, 평화와 평등, 공생의 사회를 향한 분투를 해 나가는 것이 그런 참혹한 일을 당한 피억압자들, 특히 우리 조선인들이 당한 고통을 되새기는 길일 것이다. 이는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사회의 기초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모품처럼 희생시키는 것인지를 명확히 확인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 앞에 국적의 차이는 별로 상관이 없다. 우리 앞에는 사람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로 소중히 여기는 세상을 열어가야 할 책임이 같이 있음을 느끼고 돌아온 소중한 여행이었다.

10월말과 11월초의 일본 날씨는 바람이 강하고 생각보다 추웠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음을 더 절실히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해 준 날씨, 그러나 비교적 맑은 하늘로 우리의 일정을 도와준 날씨는 분명히 우리 일행을 도와준 것이다.

편집부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