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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만들자는 말인지 평화를 파괴하자는 말인지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이정훈 기자 | 승인 2013.01.20 07:09

   
▲ 영화 "피스메이커"의 포스터
한가로운 토요일 점심 즈음 지인들과 농담 삼아 주고받았던 이야기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멋있어지는 남자 배우가 누구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배우들의 이름이 오고 갔는데, 여러 지인들의 입에서 빠지지 않았던 배우가 바로 미국의 남자 배우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제 머릿속에는, 그가 주연했던 대표적인 영화들이 많이 있었지만,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는 영화가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하도 오래된 영화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마음에 이리 저리 수소문해 결국 밤늦도록 다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피스 메이커”는 1997년 말씀드린 조지 클루니(토마스 드보[Thomas Devoe] 역)와 니콜 키드만(Nickole Kidman, 줄리아 켈리[Julia Kelly] 역)이 주연해 개봉한 영화였습니다. 주인공 연기를 맡았던 배우들의 이름값도 있었고, 화려한 볼거리도 있어서 제법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서방 세계의 정책으로 인해 벌어진 유고 내전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은 음악가이자 정치가인 ‘두산 가브리치’(Dusan Gavrich, 마르셀 루어스[Maecel Iures] 연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들의 파괴된 평화를 서방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부패한 옛 소련 장군으로부터 핵무기를 구입하고 평화 회담이 열리는 뉴욕으로 향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주인공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펼쳐집니다.

그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는데요, 두 번째 보고 나니 “영화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용어가 두 개가 있구나!” 했습니다. 하나는 영화의 제목처럼 “Peace Maker”이구요, 또 하나는 “Peace Keeper”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피스 메이커’나 ‘피스 키퍼’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지 않고 일상적인 말처럼 사용되지만, 굳이 한국말로 옮겨 본다면, 앞의 말은 “평화 중재자”이고, 뒷말은 “평화 유지군”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테러범으로 등장하는 ‘가브리치’에 따르면 자신들의 평화를 깨뜨리고 파괴해 버린 주범들은 바로 이 ‘피스 메이커’들과 ‘피스 키퍼’들이라고 합니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 ‘피스 메이커’는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 세계’가 주축인 “UN 평화 회담”입니다. 그리고 ‘피스 키퍼’는 흔히들 전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가브리치’는 바로 이 두 집단이 만들어낸 “평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평화 회담”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이기도 한 “뉴욕”(New York)으로 핵폭탄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결국 이 영화, “피스 메이커”는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관람자들에 묻고 있었습니다. 영화 막바지에 ‘가브리치’는 ‘드보’에게 총상을 입고 교회로 숨어들어갑니다. 이 장면에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금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어쨌든 부상을 입은 ‘가브리치’와 폭발을 저지하려는 ‘켈리’와 ‘드보’는 마지막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 간에 주고받은 대사는 이렇습니다.

   
▲ 스스로 테러범이 된 '가브리치'
가브리치: 당신은 막지 못해! 절대!

켈리: 좋아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괜찮아요! 이렇게 죽으면 안돼요. 어떤 폭탄이죠? 방아쇠 달렸어요? 아니면 시한폭탄 방식? 우리가 해결할 수 있어요. 

가브리치: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지지? 죽은 내 아내와 내 딸은? 왜 죽었어야 했지? 뭣 때문에? 숨을 쉬기 때문에? 맑게 웃어서? 살아남은 건 나뿐이야. 내 고통은 어쩌지? 

켈리: 뭘 원하는 거죠? 

가브리치: 내 조국이 옛날과... 똑같이 되길 원한다. 

드보: 미국은 관여하지 않았소. 

가브리치: 관여하게 될 거요.

이 대화를 끝으로 ‘가브리치’는 자살을 하고 폭탄을 해체하려는 켈리와 드보의 노력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영화가 끝나자 예전에는 미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요, UN으로 대표되는 서방 세계와 미국이 만들어내는 눈에 보이는 평화가 얼마나 허상이며, 그 아래에서 희생당하는 개인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평화는, 그것이 한 개인의 평화이든지 한 집단의 평화이든지. 강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물었던 것처럼 진정한 평화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성서가 말하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평화’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에서는 ‘샬롬’입니다. 그리스어 ‘에이레네’는 ‘평화, 평안, 평강, 화해’ 등 다양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었습니다. 본래 에이레네는 ‘전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일컬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주전 2세기에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 성서’(LXX, Septuagint)에서 에이레네는 구약성서의 ‘샬롬’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이레네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샬롬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의 샬롬은 무엇일까요? 1차적으로 물질적 의미에서 안정, 온전함, 건재, 안녕 등을 뜻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샬롬은 신체적 의미에서 건강, 행복, 유복함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심리적 안정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샬롬은 구약성서에서 사람, 공동체, 민족 사이의 관계를 나타냈습니다. 불화와 분쟁이 없는 인간, 공동체, 민족 사이의 화목한 상태가 그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샬롬은 정치나 전쟁의 영역뿐 아니라 법·문화·사회 질서 영역까지 포괄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샬롬은 수동적인 차원에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폭력의 부재’를 뜻했습니다. 폭력, 위협, 굶주림, 불안, 부자유가 없는 상태가 ‘평화’의 1차적인 정의(定意)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샬롬은 적극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정의(正義)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안녕, 질서, 온전함, 치유, 올바름, 자유, 창조 공동체 등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샬롬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샬롬이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샬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라고 여겼습니다. 

   
▲마지막 날에 나타날 평화로운 모습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샬롬을 이야기할 때 재미있는 사실은 항상 정의(正義)와 함께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성서 몇 구절을 들어보겠습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였어도, 네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네 공의가 바다의 파도같이 넘쳤을 것이다.” (이사야 48:18)

평화와 정의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여기 이사야서뿐만 아닙니다. 시편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편 85편에서는 사랑과 진실 그리고 정의와 평화는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관계’로 나타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시편 85:10-11)

정의의 입장에서 예언자 미가는 국제법 질서 속에 있는 공동체의 삶을 평화와 연결시킵니다. 장차 다가 올 평화의 나라는 분쟁이 해결된 상태, 전쟁 무기와 군사 훈련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 정의와 법에 의해 국가 사이의 관계가 이어지는 상태로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다른 모든 민족은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 우리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할 것이다.” (미가서 4:3-5)

마지막으로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에 의해서 이 땅에 나타날 마지막 때의 샬롬의 시대를 낙원의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모습의 앞서 이루어져야 할 조건으로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1:1-9)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먼저는 이 영화를 정의와 관련해 살펴보는 것과 글 중반에서 뒤로 미루겠다고 했던 스스로 테러범이 되었던 ‘가브리치’가 “총상을 입고 왜 하필 교회로 들어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두 문제 모두 저의 자의적인 해석일 것이니 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이 영화가 “국가 간의 정의” 혹은 “국제 정의”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념 갈등으로 인해 스스로의 뜻이 아닌 강제적으로 합병되었던 국가가 분리·분립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국제 정의의 문제입니다. 이 영화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있었던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냉전 시절 유고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전혀 다른 민족이 묶여지게 되었지만, 냉전의 종식이 가져 온 자유의 바람은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연대하여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와 사방 세계의 개입이 불러 온 이들 사이의 힘겨루기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이 내전으로 인해 입었던 상처만 부각시킬 뿐 이 내전의 원인은 말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저 전쟁은 안 돼”라고 외칠 뿐입니다. 그리고 드보가 입에 침을 튀기면 말했던 “민간인들은 다치면 안 돼” 뿐입니다. 영화의 런닝 타임이 있는데 어떻게 그것까지 다 담을 수 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파괴된 평화의 원인은 온데간데없고 상처만 보여준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브리치가 소원대로 평화 회담이 열리는 건물이 아니라 왜 하필 교회로 숨어들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비록 쫓기는 신세에 총상까지 입었으니 도저히 갈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전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보스니아 내전 사태에서 종교 간의 갈등은 굉장히 큰 문제였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영화에서 가브리치는 무슬림으로 등장합니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에 의해 알바니아 무슬림들 25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이것이 그 끔찍한 ‘인종청소’입니다.

당시 세르비아는 학살 이외에 또 다른 방법의 인종청소를 실행했는데, 그것은 군인들에 의해 알바니아 무슬림 여성을 집중적으로 강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강간당한 무슬림 여성이 2만 여명이었고, 이 여성들은 낙태를 하지 못하도록 감금당했습니다. 가브리치가 교회로 진입했던 것은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이 만행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강변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참 가슴 찡한 장면은 무슬림이었던 가브리치는 그가 숨어들었을 당시 교회 안에서 합창 연습을 하고 있던 어린 아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아무도 인질로 잡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 보여주었던 소위 그리스도인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가브리치는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벌어졌던 이 생각하기도 싫은 사태의 책임을 교회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영화가 끝이 났지만, 제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계속 남아 있는 장면과 대사가 있었는데요. 가브리치가 핵폭탄을 들고 뉴욕으로 가기 전 녹화 테이프를 남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가브리치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난 세르비아인이며 크로아티아인이자 이슬람 사람입니다. … “죽인 게 뭐 어때서? 그들은 전부 짐승이야. 수세기 동안 서로 죽였어.” 그러나 분명한 건 난 짐승이 아니오. 나도 인간이오. 바로 여러분처럼 싫어하든 좋아하든 간에 말이오.”

반전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화는 의도하지 않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고, 아직도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점에서 생각해야 할 기회들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정훈 기자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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