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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써 내려간 역사, "지슬"폭력 당한 이들의 이야기가 누군가에 폭력이 되지 않기를
이정훈 기자 | 승인 2013.04.08 02:36

같이 생활하는 형님이 딱 일요일까지 유효한 영화표를 두 장 가지고 계셨다. 토요일 저녁부터 어떤 영화를 볼까 둘이서 궁리하다가 요즘 회자되고 있는 "지슬"이라는 영화를 보기로 의견의 일치를 모았고 실행해 옮겼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감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고 하면, “영화 러닝타임 100분이 조금 넘는 동안 태어나 영화가 빨리 끝나기를 바래 본 적은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죽임 당한 이들을 위한 제사

“지슬”이라는 영화가 재미없어서가 아니었다. 영화의 장면이 흘러가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조리고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흑백의 영상이 총천연색의 영상보다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고 어떤 한 장면에서는 눈을 질끔 감아버리게 했다. 이건 대사를 입혀 놓은 “다큐멘터리 필름”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이 된 “제주 4.3학살”은 공식적인 역사로 배울 수 없었던 시절에 한 번쯤 지하에서 공부했었던 이야기들이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공산군을 색출한다는 미명 하에 미군의 작전과 이것을 실행해 옮겼던 국군이 제주도에서 자행했던 제주 민간인 학살의 사실이었다. 알면서도 쉬쉬하고 말하기를 꺼려했던 아픈 역사의 이야기였다.

   
▲ 영화 “지슬“”의 한 장면, 국군의 학살을 피해 동굴로 피신한 주민들

영화는 그 학살의 와중에 있었던 한 마을의 모습을 담았고, 학살 당하는 주민들과 학살하는 국군들이 등장해 그들 내면의 모습-영화를 관람한 어떤 분들은 뛰어난 영상미를 극찬하시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는-을 세밀하게 드러낸 수작이었다. 그간 뒤로 밀려나 있던 우리 역사의 한 단면에 좁은 파인더를 들이밀어 수면 위로 끌어올린 영화였다. 책에서만 보아왔던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내게는 하나의 폭력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이런 마음이 들게 했던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 사실 이 영화를 초등학생이 볼 수 있는 등급이었는지 모르겠지만 - 엄마와 함께 온 초등학생 한 명과 그 어머니가 영화 중간에 영화관을 나가는 모습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이 영화관을 나가기 전까지 그렇게 과격한 장면이나 선정적인 장면은 없었다. 오히려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무장 공비를 토벌한다는 미명 하에 주민들을 학살하는 국군 토벌대에 잡혀 온 한 여인의 상반신이 드러나고 그 위로 한 장병의 날카로운 칼이 지나가는 장면이 가장 선정적이라면 선정적인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영화 중간에 영화관을 나가는 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솔직하고 아픈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 누군가에는 폭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것이다. 대학 시절 숱하게 보아왔던 “5.18 광주민중항쟁”의 과정에서 일어난 처참했던 학살 사진들처럼, “제주 4.3 학살”의 사진들을 움직이는 사진으로 만든 것이라는 멍청한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폭력 당한 이들의 모습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될 수도 있겠구나” 했던 것이다.

역사에게 가하는 폭력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라도

차원은 다르지만 영화를 관람하면서 미술의 한 흐름이었던 “극사실주의”가 생각났다. 이 흐름은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회화와 조각이다. 같은 시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시도된 비슷한 경향의 미술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극단적인 사실 묘사에 의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을 일순간 정지시켜 강조해 표현하려는 미술의 한 경향이다.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 특징이다. 주관을 거의 배격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이것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로 의미 없는 장소, 친구, 가족 등이 대상이다. 이러한 극사실주의는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적으로 확대한 화면의 효과는 매우 충격적이며, 우리가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었던 추악함-모발에 가려진 점 이라든가 미세한 흉터까지도 그대로 클로즈업되어, 일반 사람이라면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사실성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잔혹한 인상을 받게 만들기도 했던 흐름이었다.

사실 “지슬”은 이러한 극사실주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역사에 기반 해 재구성된 시나리오이지만, 있음직했던 사실이었을 테니 말이다. 극사실주의가 의도했던 잔혹한 인상을 주려는 의도를 충실히 살린 영화 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끔찍한 역사는 알려지고 되새겨지고 반성되어야만 한다. 어떤 한 정신 나간 정치인이 “5.18 광주민중항쟁”을 “폭동”이라고 이야기하는 정신 나간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장르라는 것을 몰라서는 아니겠지만, 영화가 가져야 하는 미덕 또한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솔직하게 남는다. 영화는 영화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정훈 기자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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