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mer Eric Schattschneider(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 1892-1971)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철학자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분이기도 하지만, 이 학자가 특히 한국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회자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 학자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국 학계에 거두인 고려대 "최장집" 교수의 영향이기도 하다. 시민사회 단체나 정당에서 초청해 강연을 할 때면 최 교수는 이 학자의 이론을 종종 인용한다.

정치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학자의 학문세계를 큰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지만, 다행히 샤츠슈나이더의 주저 중의 하나인 『절반의 인민주권』(박수형/현재호 공역, [서울: 후마니타스, 2008])이 번역되어 이 책의 내용 정도는 정리할 수 있다. 샤츠슈나이더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민주주의 핵심은 “갈등과 정당 그리고 인민”이다.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민주주의는 경쟁하는 조직들과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대안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보통의 시민이 선택하는 정치체제이다.”(222)

여기서 핵심은 '경쟁', '조직과 지도자', 그리고 시민의 '선택'이다. '절반의 인민주권'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택'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분명 민주주의란 시민이 '선택'─'통치'가 아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국가의 통치는 누구의 몫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경쟁하는 조직과 지도자들의 몫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일반 시민들 모두가 국가를 통치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거대한 통치체제를 갖춘 현대국가에서 보통의 인민들이 국가를 통치할 능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인민의 통치 능력에 대한 과도한 맹신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실패를 대중의 무지와 어리석음 탓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공동체 내의 좀 더 부유한 계층이 보여 주는 매우 전형적인 형태"이고 "어떤 정치체제에서나 늘 하층계급의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던 논리다."(174) "민주주의 이론에서 현명한 출발은 보통의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데 있다."(219) 그가 말하는 '현실적인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지배'가 아닌 '인민의 동의에 기반한 지배 혹은 정부'"(225)이고 이 때 보통의 시민이 할 수 있는 것은 '통치'가 아닌 정치적 조직이 만들어낸 대안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된다. 인민의 주권이 절반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그렇다면 위의 정의에서 말하는 '조직'은 왜 정당이어야 하는가? 이는 정당이야말로 '갈등의 사회화(socialization)'를 가능케 하는 전국적 정치조직이기 때문이다. '갈등의 사회화'는 약자들의 경쟁력을 증가시킨다. 갈등이 사적인 영역에서만 다루어질 경우 기업과 같이 거대권력을 가진 자들은 약자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약자가 자신들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여 새로운 참여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갈등의 사회화 과정이다. 

갈등의 범위가 확대되면 기존의 경쟁자들은 갈등의 통제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따라서 갈등의 양상이 변화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 때 갈등의 사회화를 가능케 하는 것, 즉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바로 경쟁이다. 갈등의 사회화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조직이 바로 정당이다. 

이익집단들은 부분적 특수이익을 주장해 보편적 이익을 바라보지 못하며 일반 시민들의 극소수만이 이익집단에 참여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익집단이 추구하는 그 특수 이익이라는 것도 기업 및 상층계급적 편향성을 보인다. 따라서 이익집단이 정치의 주된 조직으로 자리잡을 경우 "천상의 합창에서 상층계급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83)릴 것이다. 

이익집단은 아무리 그 규모가 크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따라서 이익집단은 갈등을 전국적 규모로 확대하는 데에도 한계를 갖는다. 반면 정당은 전국적 규모를 가지며 전국적 단위에서 시민들을 규합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기억이 선거 승리에 필요한 정치 조직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성과"(91)인 것이다. 기업이 정치체제에 안으로 포섭되면서 갈등의 사적 영역에서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갈등 · 경쟁 · 조직 · 리더십 · 책임성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이 된다. 갈등을 두고 경쟁하는 조직과 그 지도자가 리더십을 가지고 대안을 생산하며 인민은 그 대안 중의 하나를 선택하고 조직과 지도자는 다시 그 대안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현실의 바람직한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은 일반 시민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 "문제는 1억 8천만 명─책이 쓰여질 당시의 미국 인구(필자)─의 아리스토텔레스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1억 8천만 명의 보통사람들로 구성된 정치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218) 하느냐이다. "도덕적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갖는 위대한 장점 가운데 하나는, 사회 하층의 요구와 경험을 이해하고 통합하는 일을 다른 어떤 통치 체제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것"(178)이다. 

이 책의 내용은 모두 이와 같은 저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따뜻한' 관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따뜻한 시선이 한국 정당체제에서도 가능하냐는 말이다. 정말 지겹도록 던질 수밖에 없는 의문과 질문인 것이다. 

과연 샤츠슈나이더가 정당에 부여하는 위상은 합당한 것인가? 샤츠슈나이더는 부유층에 의해 장악되는 이익집단과 달리, 정당은 보편적인 수준에서의 정치활동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정당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예컨대 현재 한국의 정당은, 보수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서민을 대변한다는 진보정당조차 그 구성원을 대부분 중산층 이상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는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봐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정당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 단순히 샤츠슈나이더가 살았던 뉴딜의 시대와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가지는 차이라고 보아야 할까? 단순히 그렇게 결론내리기에는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그렇다고 정당정치체제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또 원론적인 말이지만 어떤 정당의 출현을 기대하고 추동해야 할 것이냐이다. 그래서 요즘 안철수씨가 새로운 정당 운운하는 소리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여기에 최 교수까지 참여했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안철수의 "새정치"라는 목표와 최 교수의 "노동자 중심의 정당정치"라는 아무 "대안없어 보이는 구호들"이다. 안철수가 지금까지 그렇게 떠들어왔지만 새정치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제시된 것이 없다. 여기에 이론이 덧붙여지면 이거 앞으로 어떻게 수습할 수 있지가 걱정이라는 말이다.

▲ 안철수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 서교빌딩에서 싱크탱크 성격의 정책네트워크 '내일' 창립 계획을 발표 후 '내일'의 이사장을 맡은 최장집 명예교수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정훈 기자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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