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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구약성서의 말씀이 왜 거기에 있는 거야?『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에 대하여
이정훈 기자 | 승인 2013.06.15 04:49

신약성서의 첫 책인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1:1) 신약성서를 시작하는 첫 머리가 이러니 구약성서의 내용을 모르고서는 신약성서는 이해 불가능하다는 말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이야기가 옆으로 빗나가는 것 같지만, 마태복음 1장1절의 우리말 번역은 조금 이상하게 배열되어 있다. 그리스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다. “다윗의 아들(자손) 아브라함의 아들(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책.” 우리말 성서는 동사를 넣었지만, 그리스어 성서는 동사가 없는 명사 문장이고, 인물의 배열순서도 다르다. 우리말 성서는 아브라함이 먼저 등장하지만, 그리스어 성서는 다윗이 먼저 등장한다. 

이렇게 두고 보면 마태복음의 성서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 혹은 자손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려놓으면 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다윗이라는 인물과 아브라함 인물을 모르고서는 마태복음의 성서기자가 하고 싶은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뜻이다. 신약성서라는 말이 등장하기에 구약성서라는 말이 성립한다는 말을 뒤집고 구약성서가 있어야만 신약성서도 가능하다는 말을 써야 한다. 

또 하나,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많은 책들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 비율을 고려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끊임없이 구약성서를 인용한다. 제국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던 비율적으로 이방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로마 교회 공동체에게 보낸 로마서는 편지의 반 이상이 구약성서의 내용이다. 로마서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로마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방인들이 아님에도 바울은 로마 교회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에 그렇게도 많은 구약성서의 내용을 끼워 넣었다.

적게나마 신약성서의 두 책을 예로 들었지만, 신약성서의 거의 대부분의 책들은 구약성서의 내용을 “인용, 암시, 반영”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내용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약성서가 거의 자구적으로 구약성서를 “인용”했다면 금방 알아볼 수 있겠지만, “암시”적이고 어렴풋하게 “반영”하고 있다면, 그냥 모르고 지나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 책들의 기자들이 구약성서의 말씀들을 신약성서의 어떤 문맥에 위치시켰는지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또 왜 그렇게 했는지를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신기하게 이런 의문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학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18명의 신약성서학 교수들이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구약성서의 말씀들을 찾아내고 그 말씀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주석한 책이 번역되었다. 이 학자들의 면면은 거의 대부분 영국에서 최종 학위를 마치고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교수들이다. 이런 분류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복음주의적인 신앙과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비평적인 시각보다는 성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세이다.

편집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여섯 가지 질문을 각 부분을 담당한 학자들에게 제시했고, 이에 따라 구성되었다고 한다. 1. 신약성경이 어떤 맥락에서 구약을 인용하거나 암시하는가? 2. 신약성경이 인용하거나 암시하는 구약의 문맥이 무엇인가? 3. 구약의 인용이나 자료가 제2 성전기 유대주의 문학이나 (좀 더 넓게는) 초기 유대주의 문학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4. 구약성경을 사용한 특정한 경우를 이해하려고 할 때 본문상의 어떠한 요인들을 유념해야 하는가? 5.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바라볼 때 그 관련성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이 단지 언어의 연관성에 지나지 않는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혹은 구약성경에 어떻게 호소하는지 이해하도록 한다. 6. 신약의 저자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구약을 인용하거나 언급하는가?

이러한 원칙을 가지고 신약성서에서 구약성서가 “인용, 암시, 반영”되고 있는 모든 구절들을 찾아내고 주석을 하고 있다. 18명의 학자들이 정말 어마어마한 작업을 완결했다. 개별적으로 신약성서 책들을 연구할 때 단편적으로 해야 했던 작업들을 한 눈에 펼쳐볼 수 있다는 대단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여기에 한 가지 사족처럼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앞서 잠시 언급도 했지만, 신약성서 자체에 대한 비평적인 시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쉽게 예를 들면 바울의 편지들 중에서도 진정 바울 편지와 후기 바울 편지에 대한 구분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더 많은 책이다. 

   
▲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미국에서 출판했을 때는 1,239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우리말로는 5권으로 분리되어 번역되었다. 원저의 제목은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이고, 우리말 번역은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12)이다. 아래는 고린도전서 15:54에 대한 주석을 그대로 실은 것이다. 참조하시길 바란다. 

 

고린도전서 15:54

⑴ 신약 문맥: 사망이 삼킨 바 되다

고린도전서 15:50-57에서 바울은 변화의 주제를 도입함으로 부활한 몸의 본성에 대한 질문(15:51b)에서 그는 육의 몸은 파루시아의 땡에 하늘에 속한 존재에 적합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런 다음 15:54-57에서 그는 그때에 하나님이 부활로 소멸되는 사망에 대하여 마지막 승리를 선포하실 것임을 선언한다.

⑵ 구약 문맥에서 이사야 25:8

본문은 “만민”에 대한 하나님 보편적 구원(25:6-7[참조, 25:7에서는 “모든 민족”])과 사망 권세에 대한 궁극적 멸망을 생각하는 이사야 25:6-10a의 구원의 신탁의 부분이다.

⑶ 초기 유대주의에서 이사야 25:8

이사야 25:8은 사망이 오는 세대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적 약속으로 랍비 문학 작품에 인용되었다(m. Moʿed Qaṭan. 3:9; Exod. Rab 15:2130:3; Deut. Rab 2:30; Lam. Rab 1:41; Eccles. Rab 1:7; b. Pesaḥim 68a; b. Ketubbot 30b).

⑷ 사본 상의 문제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는 바울의 말은 문자적으로 “강한 존재인 사망, (그들을) 삼킬 것이다”라고 읽는 70인역과 확연하게 다르다(문맥은 민족들은 사망에 의해 심킨 바 될 것이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퀼라(Aquila) 역, 테오도시온 역과 심마쿠스 역은 바울의 인용과 상당히 근접한 일부의 다른 변형을 사용하고 있다(Stanley 1992: 210-11). 바울은 아마도 이전부터 존재하는 헬라 본문을 따랐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4은 동일한 전통을 인용한다.

대안적으로 헤이즈(1997::176)는 바울이 닉코스(nikos, “승리”)를 위해 70인역 호세아 13:14의 디케(dikē. “심판”)로 바꾸고, 그것을 다음 절과 단어를 연결하기 위하여 이사야 25:8을 그의 인용에 삽입한다고 주장한다. 이사야의 인용이 호세아 본문에 “승리”라는 단어를 보충해준다고 할 수 있다.

⑸ 고린도전서 15:54에서 이사야 25:8의 사용

바울의 마음에 사망의 최종적 멸망은 죽은 자의 부활을 요구한다. 이사야의 종말론적 이상을 인용함에서 바울은 몸의 부활에 사망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을 묶고 있다. 바울에게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것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 그분이 의도하신 것을 위한 필요한 결과이다.
 
 
⑹ 신학적 사용
 
 
이사야 25:8과 호세아 13:14을 따라 바울이 사망을 의인화 시키는 것은 사망은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단지 비극과 같은 거리감이 있는 적대적인 세력(de Boer 1988: 184)이라는 의미로서 묘사하는 것이다. 이사야 25:7에서 사망은 “모든 민족의 가려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이다. 바울에게 사망은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세력이요 그것은 단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물리쳐져야 하는 것이다.

이정훈 기자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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