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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행사와 사이비 종교절기에 그치고 말 것인가대림절에 다시 읽는 요나서 이야기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 승인 2018.12.15 15:11

1. 요나서는 미가서나 하박국서처럼, 소위 구약성경 예언서 중에서 12소예언서 중에 하나이다.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많이 듣던 ‘고래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던 요나 이야기’는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만큼 우화로서나 드라마 창작극 대본으로써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거룩한 밤 고요한 밤’을 노래하는 대림절기에 다시 엉뚱하게도 요나서를 읽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가?  요나서가 전하려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요나서 메시지가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을 울리기 때문이다.

2. 요나서는 4장으로 구성된 짧은 예언서이다. 동화같은 기본 테마로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예언서로 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1장 1절과 3장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고 하는 전형적인 “예언자 소명문구, 말씀 위탁”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참 예언자는 소명 받아야하고 말씀을 위탁받아야 한다. 자기의 정의감이나 시대적 사명감으로 스스로 나서는 예언자는 있을 수 없다. 우리시대 가짜와 진짜 예언자 식별도 마찬가지이다.

▲ 네덜란드 화가 Pieter Lastman가 그린 Jonah and the Whale(1621) ⓒWikipedia

3. 구약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요나서의 집필연대는 대략 주전 400년 전후, 곧 포로기 시대 이후 귀국한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재건축하고 율법을 강화하면서 유대 민족주의를 강화하던 시대의 작품이라 한다. 유대교라고 부르는 경직된 율법제일주의, 성전중심주의, 배타적 선민주의가 강화되던 시대이다.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의 군사적·문화적 박해와 수모를 받을만큼 받았고, 신흥국 페르시아 제국의 포용주의 달콤한 사탕발림도 이미 경험한바 있다. 믿을 건 아무도 없고, 오직 유대민족의 자력갱신, 유일사상강화, 확실한 문자경전에 의지하는 길 밖에는 이스라엘 종교정체성을 지켜갈 길이 없다고 지도자들은 생각한 것이다. 만군의 주 야훼 혹은 여호와 신을 유대인들이 독점하고, 성전에 가두어 놓고, 율법이라는 보이지 않는 쇠창살 안에 유폐시켜서라도 자기생존과 자기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4. 요나서 내용을 다시 반복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무나 귀에 익숙한 주일학교시절 듣던 동화 아닌 하나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두 가지 지리적 예비지식만을 언급하자면 요나가 도망가려 했던 ‘다시스’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끝지점 곧 현대 스페인 동남부 어느 항구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요나가 뱃삯을 내고 다시스로 떠나려고 승선했던 욥바 항구는 현대 이스라엘 지도상 텔아비브 항구도시로 본다.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는 ‘고래’가 아니며, 큰 물고기뱃속은 묘하게도 두 가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하나는 예수께서 몸소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시면서 당신의 죽음과 음부의 세계에까지 인류구원을 위해 내려가심을 예언하는 복음서 말씀이다(눅11:29-30). 또 하나는 초대교회 박해시기에 물고기라는 헬라어 ‘익스투스’는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장의 헬라어 첫 글자 자모음을 합성한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비밀 암호처럼 물고기 그림을 사용했다.

5. 오늘의 이 글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성스럽고 고요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워야할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림절기에 한민족의 창소리 극 ‘심청전’을 연상케 하는 요나서를 다시 읽은 이유 3가지를 말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고 부름받고 말씀을 위탁받은 예언자 요나가 그랬듯이, ‘위탁받은 시대적 말씀’이 자기의 평소 정치사회적 종교문화적 신념에 맞지 않는다고 배반하고 도망치며 불평하고 온갖 수단방법을 다하여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인간본성이라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남북한 관계, 동아시아 질서, 세계 문명질서가 새로운 틀을 찾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조성하려고 애쓰는 ‘역사적 카이로스’인데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멸공반공주의와 북한을 흡수통일 하는 길만이 우리의 나갈 길이라고 굳게 믿는 소위 ‘태극기부대, 보수적 기독교집단’이 오늘의 요나와 같다. 지난날 민족의 역사적 상처 ‘집단적 트라우마’를 그대로 재생 확대시키려는 오류를 범한다.

6. 요나서가 말하는 대림절의 둘째 메시지는 무엇인가? 요나 때문에 바다가 흉용하고 선장이하 선원들은 배를 침몰 위기에서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데,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든지라”(욘1:5), 선상의 위기상황과 대처노력에 오불관언(吾不關焉) 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말이다. ‘배 맨 밑층’은 여러 가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 개인과 집단의 무의식과 잠재의식층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배의 요동침이 가장 약하게 감지하는 사회의 안전지대 혹은 안정계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요나가 그랬듯이 양극화된 우리사회 빈곤층과 젊은이들이 생존위기 앞에 아우성치고 돌아가는 공장벨트에 깔려 죽어가도 별 감정이 없다. 인간으로서 동병상련 하는 맘의 감수성이 완전 마비되어 깊은 잠속에 빠져 들어버린 사회적 위기이다.

7. 셋째 메시지는 무엇인가? 인간의 종교성이란 것이 잘못하면 지극이 개인적이고 하잘 것 없는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공의로우심’(욘4:2, 출 34:6)을 왜곡시키고, 사유화하고. 멸시한다는 경고인 것이다. 요나서 제3막 ‘박넝쿨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되묻는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훼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4:10-11)

8. 성경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 없다고 말한다. 특히 사람생명은 그 자체가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하다고 한다.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일가? 교리를 앞세우고, 정치이념이나 사회신분이나 권력을 앞세워 사람을 무시하고 , 맘 아프게 하고, 상처 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죄인 것이다. 대림절을 참으로 바르게 지내는 것은 요나서가 경고하는 세 가지 메시지 앞에 자기 자신을 겸손히 성찰하는 일이 아닐까?  <생명, 정의, 평화>가 무시당한 대림절과 성탄절은 참 기독교 신앙과 아무 관계없는 그저 상업적-문화적 종교행사와 사이비 종교절기에 그치고 말 것이다.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soombat19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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