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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초상 - 십자가로 피어나는 부활”데미안 허스트의 「부활」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4.26 17:37

“부활 장면은 없어요?” U.H.M. 갤러리에서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 14처」를 안내하다가 가끔 받는 질문이다. 작품을 구입해 처음 전시하면서 느꼈던 아쉬움도 그것이었다. 이왕이면 「14처 무덤에 묻히시다」 다음에 「15처 부활하시다」로 끝나면 좋을 텐데, 왜 무덤에서 끝났을까 싶었다. 알아보니 부활까지 넣어 15처로 하는 교회도 있었다. 그런데 부활장면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복음서마다 다르지만 파편처럼 단서들만 있다. 무덤을 찾은 세여인, 천사, 지진, 돌문, 경비병…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나오시는 장면이 없다. 부활하시는 모습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도 없다.

부활을 그린 작품들은 핵심적인 빈 조각,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모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왔다. 그 중 하나가 석관의 뚜껑을 열고 나오시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작품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부활」(1463경)이다.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리스도의 부활”(1463경, 프레스코화) ⓒGetty Image

작가의 고향 산세폴크로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렸는데, 산세폴크로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도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안정감과 균형미를 보여주는 삼각형 구도의 중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있다. 잠든 병사들과 석관을 밟고 서있는 모습이다. 부활의 승리가 담고 있는 평안과 권위를 전해주는 구도다. 왼쪽의 메마른 나무와 오른쪽의 풍성한 나무도 의미심장하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떠올릴 수도 있고, 부활 이전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생명을 그려볼 수도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깃발은 승리의 상징이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십자가 깃발이 떠오른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부활」은 완벽한 균형미과 구도를 보여주는 걸작이지만, 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조각들이 빠져있다. 여인들, 경비들 등 그 나머지를 담으면서 새롭게 표현한 작품이 조반니 벨리니의 「그리스도의 부활」(1475~1479)이다.

▲ 조반니 벨리니, “그리스도의 부활”(1475~1479, 캔버스에 오일) ⓒGetty Image

날이 밝아오는 새벽의 하늘과 숲, 잠든 두 경비병과 놀라 바라보는 두 경비병, 오른쪽에 창을 든 경비병은 주님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로 보인다. 또 저 멀리 세 여인이 다가오고 있다. 언덕을 뛰어오르는 토끼는 구원을 향한 열망을 상징하고, 나뭇가지 위 펠리컨은 십자가의 피로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당대에는 펠리컨이 자기 옆구리를 부리로 쪼아 그 상처의 피로 새끼를 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펠리컨이 앉은 나무에서 돋아나는 새순은 새 생명이 시작되는 봄을 보여준다(네이버 블로그 성경미술관_말씀과 성화_「그리스도의 부활(1479)-조반니 벨리니 참고).

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에피소드들을 꼼꼼히 담아낸 것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복음서에 없는 부활하시는 모습은 조반니 벨리니에게도 전적으로 상상의 영역이다. 그에게 부활하시는 주님은 무덤을 밟고 일어선 모습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승리라고 웅변하는 듯이, 십자가 승리의 깃발을 들고 하늘로 떠오른 모습이다. 이렇게 신비하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이후 여러 작품에도 나타난다.

오늘날 부활절을 맞이하는 신앙인들은 어떤 묘사가 마음에 들까? 물론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무덤을 밟고 일어서거나 또는 무덤 문을 열고 나오는 드라마틱함과 하늘로 떠오르는 저 신비로움 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물론 어느 쪽이든 승리의 깃발은 공통이기 쉽다. 그런데 부활하시는 주님의 모습에 대한 이런 이미지들은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정말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죽음을 밟고 일어서는 힘으로 작용할까? 무덤의 문을 열고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승리에 벅차오를까? 이 물음은 단지 작품의 의미와 삶의 간격만을 묻지 않는다. 부활에 대한 신앙의 이미지가 일상에 작용하는 방식을 묻는다.

승전가의 리듬으로 합창하는 부활, 그것이 웅장할수록 일상의 침묵은 더 허전하게 다가온다. 부활을 강조하는 맥락들을 떠올려본다. ‘타종교에는 없는 부활, 기독교는 최고의 신앙이자 유일해야할 신앙이다.’ 이런 맥락이 먼저 떠오른다. 이 맥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들려있던 승리의 깃발이 다시 로마제국의 십자군 깃발로 보인다면, 과장이거나 노파심일까? 오늘날도 타자를 정복해 승리해야한다는 배타성의 깃발로 부활은 휘날리는 것 같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이고, 폭력에 대한 사랑의 승리임에 틀림없다. 이 승리가 삶속에서 오히려 폭력과 배타의 깃발이 된 것은 정말 십자군만의 일인가.

부활은 개인적으로는 영생의 보증으로 언급되곤 한다. ‘대속의 피 값을 지불하신 주님이 부활하셨다. 그러니 그것을 믿는 자는 영생을 확보한다.’ 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심맥락이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이런 부활은 생명을 살리는 언어가 되고 있는가? 불치의 병, 불의의 사고, 부당한 폭력에 의한 상처와 죽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살인 … 이 모든 부조리 앞에서 부활은 너무 급하고 억압적인 정답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영생을 얻을 테니, 천국에서 만나면 되고,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면 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아파하고 부활을 믿고 찬양하자.’ ‘주님 부활하셨잖아. 천국이 확증되었고. 그러니 그만 울어. 과거는 잊고 미래를 살아야지.’ ‘주님의 부활을 봐, 십자가도 부활이 되었잖아. 그 모든 고통도 언젠가 승리의 밑거름이 될 거야. 그러니 그만한 걸 감사해야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져 일상이 파괴된 사람들에게 부활신앙은 이런 맥락으로 사용되곤 한다. 만일 그렇다면 부활이 거룩한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부활에 대한 이런 쉽지 않은 물음들 속에서 충격적인 부활을 만났다. 바로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의 「부활」이다. 일단 작품을 날 것 그대로 만나보자.

▲ 데미안 허스트, “부활”(1998~2003) ⓒGetty Image

우연히 이 작품을 접했던 첫 인상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이게 뭐지? 부활이라고?’ 십자가 형태의 유리에 십자가 모양으로 놓인 해골, 부활이라는 제목이 없었다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다른 작품들과 대비되면서 많은 이야기로 가지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부활에 대한 작품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더해가고 있었다. 복음서에 언급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까지 상상해서 넣었다. 무덤을 밟고 일어서는 승리, 하늘로 떠오르는 신비로. 그러나 데미안 허스트는 반대방향을 향한다. 풍경, 무덤, 경비병들, 여인들… 다 빼고 비워간다. 그리고 사람조차 피와 살까지 다 비웠다.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십자가 모양으로 죽어있는 해골, 곧 “십자가 죽음”뿐이다.

처음에는 이상하고 의아하기만 했지만, 보면 볼수록 부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렸다. 이 작품에서 부활은 해방되고 있다. 2000여 년 전 골고다 언덕, 돌무덤 어딘가라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풀려난다. 그곳에 있었던 누군가의 관점과 증언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뼈만 남아있기 때문에 누구라 이름 붙일 수도 없다. 전문가의 분석이 아니면 인종, 나이, 남녀구분조차 쉽지 않다. 남아있는 유일한 단서, 부활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십자가 죽음뿐이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이 누구이든, 어디에서든, 어떻게 죽었든 상관없다. 오직 하나, 십자가의 길을 담고 죽어간 죽음이라면, 모두 부활이고, 모두 부활을 보여준다.”

앞의 두 작품도 나름의 의미와 예술적 표현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무덤을 밟고 일어나는 승리의 부활, 하늘 높이 휘날리는 부활의 승리다. 복음서에서 신비 속에 감춰진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늘 높이 휘날리는 승리의 깃발로 묘사한다. 그 의도와 의미는 충분히 이해하고 또한 표현도 아름답다. 부활절 칸타타나 신앙인들의 고백에도 분명 이런 승리의 주님은 가득하다. 그러나 십자군 깃발과 겹쳐오는(overlap) 이 승리의 부활이 일상 속에서 펄럭이고 있는 맥락은 불편하다. 의문이 고개를 든다. 주님 부활하시는 모습은 이것이 전부일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가? 이렇게만 표현해도 되는가?

데미안 허스트의 충격적인 작품은 부활을 “십자가에 달린 육신의 죽음”으로 다시 가져온다. 그 모습은 그동안 부활이 승리의 깃발 속에 갇혀 있었음을 반증한다. 백인, 남성, 중년의 승리로 이미지화된 부활을 해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죽음으로 길을 열어준다. 어떤 죽음이든, 누구의 죽음이든 가능하다. 오직 한 가지 조건만 남긴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려 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 뜻을 이뤄가는 죽음이면 충분하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뜻이 이뤄지는 실존을 살아내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모든 삶과 죽음에서 부활은 부활한다. 사실 실제 경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활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활을 증명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다가 죽어간 모든 죽음에서 우린 부활을 목격한다. 그 길을 위해 죽는 모든 죽음에서 부활은 드러난다.

데미안 허스트가 부활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제자리를 찾아준다. 잊힌 제자리, 상상도 못할 만큼 잊힌 그곳에 부활시킨다.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를 부활을 위해 피치 못하게 겪어야하는 필요악쯤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둘이 아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다. 부활은 십자가라는 나무에 핀 꽃이다. 부활은 다시 십자가에서, 십자가로서 부활한다.

부활이 다시 십자가에서 부활할 때, 일상에서도 제자리를 회복한다. 성공과 승리의 창살에 갇혔던 부활이 해방된다. 실패와 좌절에도 부활은 깃든다. 받아들일 수 없건만, 지나가지도 않는 아픔의 자리에도 깃든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맞이하는 아픔은 물론이고, 억울하게 고통 받는 자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죽음에 내몰리는 모든 일상에 부활이 피어날 수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울부짖는 자리, 하나님의 부재에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고, 그 십자가를 끌어안고, 결국 그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다면, 십자가로서 부활이 부활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제자리를 찾은 부활이라면, 위로와 소망이 되지 않을까? 당장 모든 고통을 지워줄 승리의 위로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위로가 가능하기는 한가. 그러나 일상을 뒤집어엎은 모든 죽음의 그늘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활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곳에서 주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부활이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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