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부족함으로 완성되는 아름다움그를 똑바로 바라보고(사도행전 14:8-13)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10.22 02:56
▲ 하나님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을 원하신다. ⓒGetty Images

1.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라는 곳에서 전도할 때의 일입니다. 루스드라는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지였던 소아시아 지역, 지금의 터키, 튀르키예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바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나면서부터 발이 온전치 못해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바울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어떤 감화를 받았는지, 성령감동을 했는지 믿음의 큰 성장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그를 똑바로 바라봤더니, 그에게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 나는 믿음이 없어.’ 자기 믿음을 말할 때는 항상 부족하다고 합니다. 또 이런 말도 자주 합니다. ‘저 집사님은 믿음이 훌륭해, 저 권사님은 믿음이 최고야.’

이상하게 다른 사람 믿음을 말할 때는 다 훌륭하다고 하고, 자기 믿음을 말할 때는 다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자기 입으로 ‘내 믿음은 훌륭해’ 하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물론 겸손의 말이고, 격려의 말인 줄 압니다.

믿음은 항상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내 믿음이 비록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하루는 미술시간이 되어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크레파스를 가져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동네여서, 아이들이 제대로 된 크레파스가 없으니까, 한 명은 빨간색 하나, 한 명은 파란색 하나, 한 명은 노란색 하나, 그렇게 들쭉날쭉 한 개 두 개씩 들고 왔더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너는 왜 빨간색밖에 없냐? 그러는 너는 왜 파란색밖에 없냐? 그거 가지고 어떻게 그림을 그리겠냐?’ 비난하고 책망하고 꾸중한다면, 그림은커녕 서로 얼굴만 붉히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집에 가서는 억울하고 분해서 씩씩거리며 밤새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어떻겠습니까? 그렇죠. 서로에게 부족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가면서 온전한 하나를 이루었겠지요. 조금 불편하겠지만, 나눠가면서, 기다려가면서, ‘너 먼저 써.’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말이지요. 그림이야 뭐 얼마나 잘 그렸겠습니까? 개발괴발 그린 그림 들고서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 엄마아빠에게 큰소리로 자랑했겠지요. 그날 밤 얼마나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푹 잘 잤겠습니까?

내 믿음의 분량은 내가 평가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저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 믿는 만큼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이웃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내 깜냥대로 하나님 믿고, 이웃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얼마 정도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부족함들을 인정하고 부족한 중에 서로 나누면서 최선을 다해 온전한 하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올바른 시선입니다. 나를 올바르게 똑바로 바라보고 나의 장점과 단점을 깨닫는 시선. 상대방을 올바르게 똑바로 바라보고 그의 단점과 장점을 깨닫는 시선. 이 시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시선 가지고 상대방 약점 잡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단점을 깨닫고 자괴감에 빠지고 열등감에 빠지고, 아니면 거꾸로 장점을 알고는 자만심에 빠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하나 되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려는 선한 시선이 필요합니다.

똑바로 바라보되,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 그 목적과 의도가 정확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언어로 바꾸면, 나를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이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도 똑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너희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너희들에게 충만한 것은 또 무엇이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얼까? 너희들이 나에게 줄 것은 무얼까? 너와 내가 어떻게 서로를 도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늘나라 만들어 갈까?’ 하고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바울의 시선을 통해 그 루스드라 사람을 바라보셨어요. 그리고 그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한 것’을 보셨어요. 바울이라는 사람을 통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계신 주님의 시선, 그리고 바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이 두 시선이 똑바로 만날 때, 불꽃 튀는 교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충만한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구원이 아닙니다. 온갖 색깔 가득한 24색 크레파스세트를 통째로 가지고 있는 부자 어린이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아이한테 크레파스 나눠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 크레파스 없구나. 내 거 써. 나는 착하니까. 나는 많이 있으니까. 나눠줄 수 있어.’ 이런 식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그런 일방적인 거들먹거리는 교만함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빨간색 하나와, 네가 가진 파란색 하나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그런 하나됨입니다. 부족하지만 나의 온전한 전부를 서로 내어놓고 진심으로 만나는 순간,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연합. 이게 구원입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온전한 하나가 되어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낸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도 하나님과 인간도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면서 아름답게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동등하게 만납니까? 아니, 하나님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답은요,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목말라 하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 자체가 부족해서 부족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불가능이 없으시지만, 하나님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 단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광 받으시는 일입니다. 사랑받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나는 영광스럽다.’ 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사랑받는다.’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에 우러나와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부족한 것은 바로 그것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하실 때도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라’ 하시는 겁니다. 백성없는 고독한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이 루스드라 사람을 똑바로 보시고, 이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인 것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족함을 온전히 채워주고 충족시켜 드리는 아름다운 그 믿음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채우자, 하나님도 그를 흡족하게 채워주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3.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올바른 시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걷지 못하던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게 되니까, 루스드라의 사람들이 이 무슨 일인가 하고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바울 저 사람은 말을 많이 하니까… 옳지 신들의 전령사 헤르메스구나, 바나바 저 사람은 젊잖게 뒤에 뒷짐 지고 대장처럼 서 있으니까… 옳지 신들의 대장 제우스구나.’ 하면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들도 몰려와서 꽃으로 제단을 만들고 황소를 제물로 잡으려고 하고 난리를 피웁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제대로 깨닫고,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고, 또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 시선을 똑바로 느껴야 하는데, 참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눈으로 드러난 기적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그 근본을 따지고 그 깊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기적 자체에만 열광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그 날, 그 교실 안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일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교실 안에서 일어난 일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림이 멋지네, 잘 그렸네~’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가복음 8장을 보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이 몰려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 백성의 아름다운 하나됨을 보지 못합니다. 더 강한 것, 더 그럴듯한 사건만 보고 싶다고 그럽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이 아름답게 하나 되는 사건입니다. 사흘이나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갈급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런 백성들을 마음 깊이 안타까워하고 가엾게 생각해서 그들을 먹이는 하나님, 하나님에게서 보여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아름다운 연합을 봐야 합니다.

고작 빵 몇 개를 가지고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 그 부족함을 원망하지 않고 아낌없이 나눌 줄 아는 희생과 섬김,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이들을 배불리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 아름다운 마음들이 넘치고 넘치는 광경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 복음서에 기록된 기적들, 그것은 우리를 놀래키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대하는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진짜일까? 가짜인가?’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이 모든 기적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서로의 시선에 화답하여 아름답게 하나 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어떤지, 옛날에는 기적이 있었는데 왜 요즘은 기적을 안 보여주시는지, 이런 헛된 것 가지고 고민하면 안 됩니다.

팔복의 말씀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 격려해줄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모인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이, 그 놀라운 은혜가 현실이 되는 광경을 똑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단순히 말뿐인 진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의 정체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병자가 고침 받고 하는 모든 기적들에서도 예수님이 끊임없이 깨달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와, 대단하다. 놀랍다.’ 하지만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나지? 저 기적으로 나도 뭔가 한몫 크게 얻어야겠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기적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진리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참된 행복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힘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고, 우리를 똑바로 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알아도, 성경을 잘 읽고, 찬양을 아름답게 하고, 기도를 간절하게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바울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말한 것처럼 그렇게 헛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도 성육신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왔다.’ 하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성육신, 인카네이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하는 우리 구원의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들도 이것을 압니다. 그러나 알기만 할 뿐입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신앙의 모습은 그들의 지식과는 딴판입니다.

4.

우리는 모두 신앙생활 하면서, ‘내 삶에 이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기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바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에만 현혹되어서,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믿고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 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까? 하는 고민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똑바른 시선을 가지고, 이런저런 삶의 일들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똑바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똑바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선언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네 발로 똑바로 일어나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힘입어 겨우겨우 살아가던 우리가, 본래 우리 힘으로는 걸을 수도 없고 걸어 보지도 못했던 우리가, 비로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가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믿음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새 삶이 임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창조의 계절에 하나님 주시는 새 삶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