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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도 아니고 여기에서도 아닌참되게 예배하는 사람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4.11 00:26
▲ Paolo Veronese, 「Christus und die Samariterin」 (1585) ⓒWikimediaCommons

1.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우리는 ‘조물주’라는 말을 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만드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표현하고 싶어서 조물주라고 말하는데요, 사실 조물주라는 말 자체는 위대함을 표현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유일하신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깎아내리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신앙을 형성해가던 고대 근동 세계에서 최고의 신의 명령에 복종해서 그 명령을 수행하는 하급신을 뜻하는 말이 조물주(demiurge)입니다. 최고의 신이 ‘이렇게 이렇게 만들어라’ 명령하면 그 명령대로 만들어내는 신입니다. 신들 중에서도 대장이 아니라 부하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을 그런 2급 신으로 표현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하나님을 조금 모자라게 생각했던 걸까요? 아니면 겸손한 사람들이어서 ‘우리는 2급신이면 족하다’ 그랬나요? 아닙니다. 사실은 여기에 야훼 신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2.

고대의 신들은 철저하게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신들은 진짜 신들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모습 속에서 만들어낸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을 상징하고 극대화해서, 그 욕망을 성취시켜주는 존재로 신을 만들어냈습니다. 풍요와 안락함을 원해서 풍요의 신을 생각해 냈고, 많은 자손을 원해서 다산의 신을 만들어냈습니다. 전쟁에서 이겨야 하니까 전쟁의 신을 생각해 냅니다.

그래서 이런 신들은 철저하게 인간의 질서에 의해서 작동합니다. 풍요롭기 위해서,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많은 자손을 거느리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얻기 위해서 이 신들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너 원하는 거 있지? 그거 가지려면 이 정도는 내 놔야 돼.’ 내가 남들보다 더 풍요로우려면, 이기려면, 권력을 독점하려면, 나만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빼앗아야지요. 누군가 뺏기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생각들, 그 비인간적인 비정상적인 생각들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정상화 시켜놓은 것이 그들의 신입니다.

그래서 그런 신들은 폭력적입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대신 이만큼 좋은 걸 주잖아!’ 하면서 말이죠. 비인간적인 질서를 딱 세워놓고 ‘이게 우리의 신이다. 모두들 그 앞에 엎드려라!’ 하고 비인간적인 길로 온 세상을 몰고 갑니다. 대항하고 반항할 수 없도록 신이라는 권위를 입혀 놓았습니다. 비인간적인 사회를 지탱해주는 비인간적인 질서, 이것이 가짜 신들의 정체입니다.

3.

그런데 이스라엘은 진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진짜 주님을 만납니다. 만났더니 야훼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닌 거예요. 이기적이지도 않아요, 폭력적이지도 않아요, 뭔가를 억지로 요구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지극히 희생적이고,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매정하고 혹독하게 혼내는 것 같지만, 잘못에도 불구하고 관대하고 끝까지 기다립니다. 같이 슬퍼해 주고 울어주고 위로해 줍니다. 요구하고 착취하지 않고 오히려 헌신적입니다. 엄하고 딱딱한 율법으로 옥죄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법입니다. 신과 인간을 구별하고 구분 짓지 않고, 인간과 인간을 구별하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바로 이런 참된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이다’ 하는 겁니다.

진짜 신, 참된 신을 구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진짜 신이고 ‘알라, 부처’는 가짜신입니까? 아닙니다. 달고 있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신이 참된 삶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추한 욕망을 감추고서 거짓된 삶을 조장하는가?’ 그것을 꿰뚫어보면 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무리 외쳐도 그 삶이 거짓되어 있다면, 그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수많은 예언자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슈브, 슈브!’ 하고 외치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 야훼’라고 하는 그 이름으로 돌아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무슨 교회라고 간판 내걸고 있는 종교, 교단, 그런 데로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고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참된 삶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사랑의 하나님, 하나됨의 하나님, 포용하시는 하나님,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 구분짓고 구별하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으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4.

다시 창조로 돌아가면,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거짓됨을 폭로하는 선언입니다. ‘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서 1급신, 2급신 그 위계를 나누고, 헛된 권력과 위계질서로 실제로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을 억압하는 거짓된 신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겁니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신의 명령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실제로는 추악한 인간의 욕심을 채워가는 세상에 대한 폭로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명령하는 자가 따로 있고 실행하는 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획하시고 스스로 실행하십니다. 최고신이면서 동시에 조물주입니다. 높은 보좌에서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 직접 흙을 주무르십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가장 높은 권력자이며 동시에 가장 낮은 일꾼입니다. 영과 육을 나누고, ‘영(靈)적인 것은 고상하고 육(肉)적인 것은 천하다’ 그러지 않습니다. ‘누구는 다스리고 누구는 복종해라’ 그러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2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꿰뚫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헛된 위계질서, 권력관계, 착취와 피착취, 억압과 수탈, 그런 것들이 없는 세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리석은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둘로 나눠버리는 그 양극단을 모두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그 둘 모두를 끌어안아 버립니다.

창세기 1장은 뭐라고 말합니까? 말씀으로 창조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 고상한 영적 진리,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착착착 조직적이고 유기적으로 구성된 완벽한 체계, 소위 고매하다는 이념, 지배자들의 가치, 영적 질서,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1장의 창조입니다.

2장의 창조는 어떻습니까? 그와는 반대되는 가치들입니다.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의 세상입니다. 이지적이고 이성적인 세상이 아니라 흙으로 물질을 만들어내는 유물론적인 세상입니다. 감정에 따라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잘못하기도 하고 고쳐가기도 하는 엉성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돌보는 세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홀로 있지 못하고 만나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창세기 2장의 모습은 이렇게 1장과 대비됩니다.

성서는 이렇듯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세계를 ‘창조’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묶어 놓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 하나님 신앙의 위대함이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렇듯 서로 다른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를 옳다하고 다른 하나를 정죄합니다. 하나가 선이면 다른 하나는 악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만들어가는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세상은, 소위 인간이 생각하는 여러 가지 수많은 이상들 이념들 가치들,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감싸 안는다는 겁니다. 결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치우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입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구분합니다. 나와 너를 구분하고, 우리와 너희를 구분합니다. 나라를 구분하고, 인종을 구분하고, 지역을 구분합니다. 서울과 지방을 구분합니다.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를 구분합니다. 대졸과 고졸을 구분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어른과 아이를 구분합니다. 여당과 야당을 구분하고 진보와 보수를 구분합니다. 자가냐 전세냐 월세냐 사는 집을 구분합니다. 아파트 단지를 구분하고 매매냐 전세냐에 따라 아이들 놀이터도 구분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구분합니다. 내가 믿는 믿음이 최고고 내가 다니는 교회만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창조이야기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그 옛날 세상이 처음 시작될 때 이랬다더라’ 하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모습을 보아라. 나는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러니 내가 만든 세상은 이래야 한다. 내가 만든 세상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시는 겁니다.

5.

오늘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 옆에서 여인을 만나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바로 그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 말씀입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 오늘 예배를 시작하면서도 이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저 막연하게 ‘예배를 잘~ 드리라는 말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성건성으로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집중해서 진실하고 간절하게 예배하자’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말도 맞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씀이 창조 이야기와 함께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이, 다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영’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 영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기운이 바로 이 ‘영’입니다. 창세기 1장에 온 세상을 만드시면서 ‘아~ 좋다’ 하고 기뻐하시던 그 마음입니다. 둘로 나누지 않고 모두를 감싸안는 그 마음입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함께 있는 존재로 만드신 그 마음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모든 생물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스리라고 부탁하신 그 마음입니다. 유일하신 분이시지만, 스스로를 일컬어 ‘우리’라고 부르시는(1:26) 그 마음입니다. 모든 동물들까지도 만나서 대면하고 이름 부르게 하시는 그 마음입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내 마음, 인간의 마음, 그것을 잘 챙겨서 간절하게 예배한다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마음, 그것으로 예배한다는 겁니다.

그럼 ‘진리’는 뮙니까? 진리라고 번역하는 ‘알레테이아’라는 말은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겁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만 있지 않고, 숨기고만 있지 않고, 드러내놓는다는 겁니다. 보여준다는 겁니다. 증거한다는 겁니다. 삶으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럼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예배당에서 드리는 그런 예배, 예전, 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엎드리는 겁니다. 복종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내 삶으로 그 마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것,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6.

우리는 우물가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우물가에서 넋을 놓고 신세한탄이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기 어딘가에 가면 신을 예배한다던데…’ 하고서 하나님을 동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몸소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마음’을 주십니다. ‘예배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지만, 마음 속에 하나님의 창조의 마음을 품어봅시다.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모두를 끌어안아 봅시다.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불어넣어주셨으니, 억지로가 아니라, 내 안에 그 마음을 느껴보고, 그 마음에 이끌려서 그러해봅시다. 그렇게 우리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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