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예수를 먹다영생에 이르는 양식(요6:22-33)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6.04 00:08
▲ 영생을 산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따라 산다는 것이다. ⓒGetty Images

모세를 따라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합니다. 뒤늦게 황급히 뒤쫓아오는 바로와 그의 군사들을 피해 바다에 길을 내 주십니다. 그리고는 그 군대들을 바다 속에 수장시켜 버립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겪었던 열 가지의 재앙과 홍해 바다에서의 엄청난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강한 확신과 새로운 삶의 터전에 대한 희망에 가득 차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광야길은 희망의 길로 보였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떨쳐버리고 새로운 터전에서 어떻게 행복한 삶을 설계할 것인지 부푼 꿈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실제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삶을 준비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마음가짐에 대해서 하나님이 철저하게 그 마음을 정화하시는 것입니다. 광야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껏 가져왔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으로 가득할 수 있도록 철저한 연단을 받게 됩니다. 광야의 사십 년의 세월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자격을 갖춘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아무런 마음가짐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는 모든 일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옛 생활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그렇게도 울부짖던 옛 생활이 차라리 낫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도 어리석고 나약하며 몰염치하고 은혜를 모르는 백성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숙연해지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을 끝까지 돌보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무한한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시편의 시인이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시편 103편의 말씀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출애굽기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버린 상황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풍요로운 땅에서 가난한 땅으로의 넘어왔습니다. 풍요로웠던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떠나왔습니다. 갑작스럽게 나오느라고 먹거리를 준비하지도 못하고 나왔습니다. 또한 홍해를 건넌 후에 진을 쳤던 엘림에서도 떠나왔습니다.

엘림은 샘이 열 두 곳이나 있고 종려나무가 일흔 그루나 있는 풍요로운 오아시스 지역입니다. 그곳에서도 떠나 지금 신 광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육신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에서 떠나 물질의 부족함, 육신적 가난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고통에 직면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제 배우게 됩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현재 상황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또한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리려 합니다. 적극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어 주저앉아 버립니다. 현재의 고통을 확대하고 과장하고 비관함으로 위로받으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렇습니다. “차라리 이집트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때가 좋았는데, 모세와 아론이 끌고 와서 이 고생을 하는구나, 괜히 따라왔다. 이 모든 것이 너희들 책임이다. 다 굶어죽게 생겼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질의 풍요로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먹고사는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 것인지, 정말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먹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는 누구에게나 골고루 임하는 비입니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능력이 많은 자나 능력 없는 자나, 가진 것이 많거나 가진 것이 없거나, 나이가 많거나 나이가 적거나, 비는 누구를 가려가면서 내리지 않습니다. 골고루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리는 것이 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비처럼 만나를 내려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만족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부족하거나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남지도 않게 골고루 채워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분명 우리는 물질적인 차이, 차별을 경험하며 삽니다. 풍요로움과 빈곤함이 존재합니다. 풍족하기는커녕 채우고 채워도 부족한 듯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의 은혜는 분명 동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욕구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험하심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나가서, 그날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 들여라. 이렇게 하여 나의 명령을 따르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먹을 것, 물질은 우리가 날마다 그날그날 필요한 만큼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여야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된 영문인지 나에게 허락된 풍요로움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 합니다. 내게 허락된 것 이상을 누리고 가지고 소유하는 것이 행복인 양 생각합니다. 풍요로움이 선이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미덕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풍요롭기 위해 소유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정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은 정해져 있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안에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을 것이 많아도 우리의 배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먹을 만큼 먹으면 더 이상 먹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 더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체하거나 탈이 나고 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우리 삶의 질서입니다.

로마 귀족 이야기를 다들 들어보셨지요? 먹을 만큼 배터지게 먹어 놓고서도 더 먹고 싶어서, 이미 먹은 것을 다 토해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토해놓고서 다시 꾸역꾸역 뱃속을 채웠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탐욕이지요. 하나님이 정해주신 육신의 질서마저도 무시하고 더 채우려고 하는 것, 하나님의 질서마저도 무시하고 더 소유하고 가지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양식인 만나는, 결코 그런 식으로 소유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욕심대로 누릴 수 없는 풍요로움이었습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명하십니다.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하며 자기 장막에 있는 식구 수대로 한 명에 한 오멜 씩 거두라고 하십니다.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놀랍게도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것 이상으로 소유하고 모아두면 그것은 벌레가 생기가 악취가 풍기며 뜨거운 해에 다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많은 노력과 수고와 노동을 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이 많아 많이 거두어들인 것 같아도 나에게 필요한 만큼이어서 남지 않으며, 능력이 모자라 적게 거두어들인 것 같아도 그것 역시 나에게 필요한 만큼이어서 결코 모자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 이상을 소유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 봐야 얻을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허락된 것, 그 이상의 만나는 우리의 풍요로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 곳간 안에 내 창고에 쌓여 있어서, 언제라도 내가 원할 때 나를 즐겁게 해 줄 것만 같지만, 그것이 나를 빛나게 하고 우러러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게 할 것 같지만, 실은 그것으로 인해 내 삶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를 풍기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채우십니다. 더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무의미한 노력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까?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합니까? 또한 무엇으로 삶의 행복을 찾아야 합니까?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무슨 일을 하느냐 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고 있느냐 그 마음 상태인 것입니다. 믿는 것이 곧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입니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것으로 이미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먹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영생은 즉,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100년 200년 계속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 ‘죽지 않는다’고 말하신 것은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내 살을 먹지 않으면,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그래서 생명다운 생명을 살지 못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있으나 실은 죽어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 단순히 숨 쉬고 있으므로 살아있다고 말하는 그 생명의 차원을 넘어서서, 생명을 생명답게 사는 그런 생명을 영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으나 죽었습니다. 맞습니다. 육신의 양식을 배불리 먹었으나 영을 채우지 못하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먹을 때 죽어있던 새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적은 것으로 만족하게 되면, 나머지 시간을 많이 모으기 위해 허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내 창고를 위하여 만나를 모으던 내가, 내 가족을 위하여, 내 장막의 식구를 위하여, 내 이웃을 위하여 만나를 모으는 나로 변화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온 삶을 두고 고민하고 상상하며 마음에 그리고 이상으로 꿈꾸던 하나님 나라를, 내 온 삶을 두고 고민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피땀 흘려 실천하셨던 그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나 또한 피땀 흘려 실천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내 풍요로움을 위하여 내 부유함을 위하여 내 욕망을 위하여 살던, 그리하여 죽어있던 내가 사라지고, 살아있는 나로 태어나게 됩니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영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노력하고 실천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생을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했던 부자청년을 기억합니다.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네 소유를 팔아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르고 싶습니까? 일합시다.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먹여주십니다. 

이제 배부르십니까? 그러면 진짜 일 합시다. 내 배가 부른데도 내 곳간을 채우기 위해 창고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지 맙시다. 이제 영혼을 배불립시다. 영원히 사는 빵을 먹읍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에 들어섭시다.

예수님을 먹고 예수님으로 나의 온 존재를 채웁시다.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처럼 되어서 주님이 살아내신 그 삶을 우리도 한 번 살아내 봅시다. 생명에 이르는 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봅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