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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사람들이 일어선다마른 뼈들에 생기가 돌고(에스겔 37:1-14)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4.05.22 01:31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포하는 말씀으로서, 가장 극적인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며 성령의 역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새길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른 뼈들에 생기가 돌아 사람으로 되살아나는 극적인 사건은 성령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인상 깊은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 에스겔은 이사야, 예레미야와 더불어 세 사람의 대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예언서의 분량이 방대할 뿐 아니라 긴 시대에 걸쳐 활동을 펼친 예언자였습니다. 사제 출신 예언자로서 에스겔은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인 주전 597년에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끌려간 유배지 바빌론 그발 강가 지역에서 593년부터 예언 활동을 펼친 에스겔은 586년 유다 왕국의 멸망을 지켜봐야 했고, 포로기 말기까지 오랫동안 예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를 잃고 속박된 신민의 생활을 해야 했던 포로기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포로 생활이 끝나갈 즈음 백성을 위로하며 벅찬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역사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말씀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언제나 역사적 상황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고, 또한 그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고 체험한 예언자의 인격과 경륜을 바탕으로 합니다. 본문 말씀은 몸소 포로 생활을 겪어야 했으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언자 에스겔의 경륜과 통찰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주님의 영의 인도로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골짜기로 나섭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있을 턱이 없는 마른 뼈들을 보고 예언자는 탄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3) 의미심장한 물음입니다.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상황은 더는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뜻합니다. 누가 보기에도 가망성이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시험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시험합니다. 예언자는 답합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3). 답을 유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하는 대답입니다.

그렇게 신뢰를 보인 예언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르십니다. 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되살아나게 하겠다는 선포입니다(4~6). 그 말씀을 받자 예언자는 곧바로 마른 뼈들을 향하여 대언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른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입니다(7~8). 그러나 아직 생기는 없었습니다. 육체의 물질적 조건을 갖추었으되, 정작 사람이라 할 만한 생동력은 없는 상태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연이어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생기에게 대언하라 하십니다.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9). 그렇게 명을 받은 대로 예언자가 대언하자 생기가 돌며 살이 붙은 몸들이 제발로 일어나 엄청난 군대를 이룹니다(10). 마른 뼈들이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세력에게도 맞서 싸울 만큼 강력한 군대와 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말씀(11~14)은 그 사건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설파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11~14)

이 인상깊은 말씀에서 특별히 두 가지 진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마른 뼈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상태, 그리고 그들을 되살려내는 생기, 곧 영의 역사에 관한 진실입니다.

본문 말씀이 증언하는 대로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삶의 뿌리를 뽑혀 타국에서 설움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국 바빌론 치하에서 체념하고 적응해 살아간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 엄청난 바빌론의 위력 앞에 늘 좌절의 쓰라린 맛을 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찢긴 가슴을 부여안고 가느다란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에스겔에게 이들 모두는 썩어 문드러져 앙상한 뼈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대로 잘 적응하여 재산이라도 모으고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일신의 영달을 누리되 혼과 정신이 없으니 죽은 자들이요, 언젠가는 바빌론의 사슬에서 풀려나 그리운 고국 땅에서 다시금 새 삶을 일구어 보려는 사람들은 뜻은 가졌으되 그 뜻을 펼칠 수 없었으니 죽은 자와 다름없었습니다. 본토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제국의 치하에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11). 이 말씀은 그 실상을 전합니다.

▲ Gustave Dore, 「The Vision of the Valley of Dry Bones」 (1866) ⓒWikipedia

본문 말씀은 이들을 일러 “살해당한 사람들”이라 일컫습니다. 자연사로 생을 마감하거나 스스로 살고 싶지 않아 죽음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힘에 짓눌려 죽음을 강요당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기운이 감돕니다. 생기, 곧 성령이 이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 탓에 성령 또한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만 상상하지만, 사실 성서가 말하는 성령은 개별적 인격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어떤 능력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루아하’를 ‘생기’ 또는 ‘영’으로 혼용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는 창세기(2:7)에서 증언하는 ‘생기’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인간은 생기를 얻고서야 비로소 온전한 생명으로 탄생합니다. 바로 그 ‘생기’입니다. 우주만물에 편재해 있으되, 생명을 생명되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어떤 역능을 일컫습니다.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고 소통하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 생기를 그냥 불어넣어 준 것으로 말하지 않고, 반드시 예언자를 통하여 그 생기를 불러오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그 생기를 불러오고 불어넣습니다. 이것은 생기를 부여받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 또는 중대한 각성을 동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이 말은 절망 가운데 좌절하고 있을 것이냐 떨치고 일어설 것이냐를 사람에게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더는 이렇게 좌절하지 말고 떨쳐 일어나라는 요구입니다.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는 사건, 그것이 곧 성령의 임재입니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살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14). 이 말씀의 참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주하며 오늘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뼈아픈 진실을 들춰내야 하는 일이 어찌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말이 있지만, 밝은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두운 현실을 철저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사회 안에서 마른 뼈들의 현상을 목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가장 높은 자살률, 가장 낮은 출산율, 이보다 더 극명하게 마른 뼈와 같은 우리 사회의 현상을 보여주는 지표는 없을 것입니다. 평균적으로 보아도 끔찍한데, 특정한 연령대와 성별에는 더욱 가혹합니다. 2030젊은 세대, 그 가운데서 여성에게 더욱 가혹한 현실입니다.

이소진의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은 2030여성들의 가장 가혹하고 참담한 현실을 증언합니다. ‘조용한 학살’이라 일컬어질 만큼 2030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고통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모든 세대에게 사회적 고통이 심화하고 있지만, 특히 2030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고통은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주목거리가 될 만큼 심각한 상황입니다.

사회적 고통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세우지 않는 가운데 출산장려 정책을 세우거나 무슨 ‘저출생대응기획부’를 신설한다 한들 모두 공염불일 뿐입니다. 성차별을 해소하고, 노동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사회정책과 제도가 확립되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결혼으로 인한 사회보장 효과는 오히려 줄고 비용만 추가되는 상황에서 누가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양육하려고 하겠습니까?

젊은 세대의 의지의 박약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 뜻을 모으는 공통의 의지와 전망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기가 도는 사람들의 사회가 아니라 마른 뼈들이 나뒹구는 골짜기가 되어버린 사회가 문제입니다. 이런 사회를 만든 기성세대가 오히려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의 기운으로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충만함을 구하는 것은 자기만의 만족을 위한 것일 수 없습니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이 마른 뼈의 형상이 아니라 생기가 넘쳐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배고프고 힘겨울 때 사람들은 예민해집니다. 그 누구든 타인은 귀찮은 존재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노가 치밀고 건들면 터집니다. 분노로 가득한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먹고사는 일 걱정 없고 정신적으로도 여유있는 삶을 영위할 때 사람들은 너그러워집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어지고, 그 사회는 더욱 살만해집니다.

물질적으로 넘쳐날 만큼 풍요로운 사회 한 가운데 살면서도 각자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개인들은 결핍에 시달려야 하는 사회 안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삶을 위한 길을 깨닫고 함께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으는 사회에 대한 전망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기운인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 각성에 이르도록 간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이를 세상에 널리 펼치는 역할을 담당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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