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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다<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11.06 14:59

장준하, 안병욱(安炳煜)을 대동 함석헌을 찾다

언론인으로서, 출판인으로서 장준하가 함석헌을 만난 것은 장준하의 생애에 더할 수 없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더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장준하의 사상계가 함석헌을 만나 장준하 자신의 말대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잡지로, 뿐만 아니라 타사(社)의 추종을 불허하는 월 4만부를 출판하는 대형잡지로(1960년에는 물경 10만부에 이르렀음, 필자 주) 경영적 측면에서도 대성을 거두었지만, 그 지독스러웠던 독화살을 맞기 시작한 것도 역시 그의 말대로 ‘함석헌의 글’ 때문이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함석헌과 장준하, 장준하와 함석헌의 역사는 필자가 본지 지상에 쓰고 있는 칼럼의 핵심인 터여서, 이후 필자의 투고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임으로 여기서 멈추기로 하고,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잇는가?’ 이후의 함석헌과 장준하의 이야기를 계속해 가려한다.

   
▲ 1959년 9월 思想界 사무실에서 시드니후크 박사와의 좌담회를 마치고- 앞줄 왼쪽부터 함석헌, 시드니후크, 뒷줄 맨 오른쪽이 장준하. (사진: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는 1956년 1월 특대호(特大號)에 실릴 함석헌의 글을 받아 정독을 했다. 어떤 필자의 글도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 장준하였지만 그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참으로 이상스럽다 하리만큼 장준하의 시선을 붙들어 매게 하는 것이었다. 글을 업(?)으로 쓰는 사람들의 눈에는 함석헌의 그 글은 결코 명문이 아니었다. 세련되지도 점잖지도 않았다. 거칠고 되는 대로고, 유아독존식의 글이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장준하였다. ‘함석헌과 나’, 장준하는 그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읽으면서 묘한 생각에 휩싸여 가는 것이었다. ‘함석헌과 나’, 꼭 전생에서 하나였던 것 같은, 나누어져 세상에 와 다시 만난 것 같은, 하늘이 한 큰일을 준비하고, 그 일을 함께 치룰 자들로 특선해준 관계 같은 그런 생각이 아주 강렬하게 장준하를 싸잡는 것이었다.

그저 있을 수가 없었다. 장준하는 새로 나온 1월호 「思想界」 한 권을 정성스레 선물봉투에 담아 가방에 넣었다. 함석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상임 편집위원 안병욱을 불렀다. “안형, 시간이 괜찮다면 오늘 함석헌 선생님을 좀 찾아뵙고 싶은데, 동행 좀 해줄 수 있겠소?”, “좋지요.” 안병욱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미 사내에서는 함석헌의 글이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터, 더군다나 그 함석헌을 사상계지에 불러낸 건 자신이었으니…….

이렇게 해서 장준하는 안병욱을 대동하고 신촌 이화여대 앞에 살고 있는 함석헌을 찾았다. 장준하는 함석헌을 만난 첫인상을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내가 대현동에서 만난 선생님은 <퍽 수줍어하는 잘 생긴 노인>이라는 인상이다. ‘이렇게 겸허한 노인이 그렇게 격렬하고, 날카롭고 무서운 글을 쓰시나’하는 놀라움을 곁들게 했다.”

장준하는 「思想界」의 발간 취지를 설명하고, “앞으로는 <사상계>를 선생님이 직접 하시는 잡지라고 생각하시고 계속해서 글을 써주십시오.”했다. 함석헌은 미소를 머금었고, “글쎄요”로 답했다. ‘글쎄요’, 그것은 함석헌의 평생의 어투였다. 장준하와 안병욱은 함석헌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안병욱이 장준하에게 웃으면서, 그러나 아주 진지한 표정의 어투로 한마디 한다.

“장형, <사상계>를 함 선생님이 직접 하시는 잡지라고 생각하시고 계속하여 글을 써 달라는 소리 말이요. 지나친 것 아니오?” 한 동안 깊은 침묵에 잠겼던 장준하의 대답이 이랬다. “사상계, 저 어른이 백번 드린다 해도 어디 받으실 분이요? 받으신다면 백번이라도 드리고 싶소.”

이렇게 해서 장준하는 후에 「씨ᄋᆞᆯ철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함석헌과의 첫 대면을 가졌다. 그러나 장준하가 함석헌을 직접 대면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지만 그는 이미 중학생 시절부터 함석헌의 이름을 귀가 닳도록(?) 듣고, 또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 맨 왼쪽 계훈제와 그 옆에 장준하, 맨 오른쪽에 함석헌이 함께 찍은 사진.
1982년 도서출판 「福祉」(복지)사에서 발행한 「現代史의 證言」 제5집 ‘평화주의자 咸錫憲’에는 장준하의 글 ‘자유혼의 몸부림’이 담겨있다.(p145~157)

“말로만은 어려서부터 들어오던 이름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함 선생님이 봉직하시던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가 있던 평북 정주(定州)의 바로 이웃 군(郡)인 선천(宣川)에 있었기 때문에 그 학교 소식은 자주 들려왔다. 오산중학교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함 선생님의 이야기는 빠짐없이 따라 다니곤 했다. 모르는 것이 없는 선생님, 그렇기에 오산 학생들은 감탄한 나머지 <도깨비>라는 별명까지 붙였던 선생님이다. 내가 오산학교 시절에 오산 학생들에게서 흔히 들었던 이름도 함 도깨비였다. 오산 학생들은 그 함 도깨비 이름을 자세히 물어야 비로소 함석헌이라고 일러주었다. 학생들의 존경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던 선생님이다”

함석헌에게 대한 같은 얘기를 장준하와 신성중학교(信星中學校) 1년 선·후배 관계였던, 박정희(朴正熙) 치하에서의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알려졌던 계훈제에게서도 듣게 된다. “제가 함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성중학 3학년 때(1936년, 이 해 장준하는 4학년으로 계훈제의 1년 선배였음, 필자 주)인데, 우리가 두 분 존경하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삼꼬챙이’로 알려진 심인곤 선생, 그리고 오산의 일본말은 아예 안하신다는 ‘함 도깨비’ 함석헌 선생…….”(씨ᄋᆞᆯ의 소리1989.2, p145).

<함석헌과 장준하, 장준하와 함석헌의 만남>에 있어 필자는 칼럼이스트로서 에큐메니안 독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일정한 공기(公器)의 기고자로서 금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탄하는 적지 않은 독자들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만이라며, 오도(誤導)라며 거센 반론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그것은 함석헌, 장준하를 지나치게 신격화 내지는 우상화하는 것 아니냐며 거센 항의가 속출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다 해도 적어도 자유, 양심,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며, 창조세계의 핵심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향하는 에큐메니안들이라면, 한국 현대사에서는 물론 한국전사(韓國全史)에 한 획을 긋고, ‘民’을(함석헌은 그 ‘민’을 씨ᄋᆞᆯ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러냈다, 필자 주) 역사의 불멸, 불변의 주체로 세워내는 일에 그 생(生)을 몰수히 드려간 <두 사람>을 주목, 주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단언이다.

기독교를 포함해 종교란 모든 종교의 과제는 “과연 그것이 삶이란 말이냐?”를 묻는 것이다. “삶이란 뭐냐?”,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냐?”를 묻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삶을 물을 뿐만 아니라 답하는 것, 답하게 하는 것이다. ‘삶’이란 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냐? 그것은 완답(完答)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영원히 찾아가야 하는 것이지만 다만 한 가지, 어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개의치 않고, 제 속에 받은 명(命)이 있어 그 명의 수행에 몸까지 드렸다면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죽지 않는 삶을 이룬 것이다.

기독교는 물론 모든 종교가 말하는 영생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영원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죽어서 사는 두 사람(인자, 人子)이 있다. 함석헌과 장준하, 장준하와 함석헌이다. 필자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번갈아 바꿔 쓰는 것은 차서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나이로 한다면야 1901년생인 함석헌은 역시 1901년생인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張錫仁)과 동갑내기이니 확실한 아버지뻘이라 할 것이나 이 두 사람이 밀면서 당기면서 살아낸 그 민중, 민주주의의 대장정은 ‘한 올, 곧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가 함석헌, 장준하를 가졌다는 것은 별별 반론이 있다 해도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명령, 나의 뜻을 따르라”는 이승만, 칼을 뽑아들고 살기 등등 인간개조를 호령하는(?) 박정희의 면전에 대고, “물러가라, 이 시대는 민(民)의 시대다”라며 결전을 벌여간 두 ‘사람의 아들’은 민중의 위로요, 감사요, 기쁨이었다.

죽어서 산 사람들! 그 점에서 두 ‘사람의 아들’은 쌍태아였다. 자기(개인) 살림이란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데서, 의의 싸움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 본 적이 없다는데서, 모든 것을 다 바쳐 ‘민(民)을 주(主)로 섬기고 갔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함석헌과 장준하를 가진 역사가 이제 새 숨을 들내쉰다! 장준하는 함석헌의 글을 다시 요청했고, 함석헌은 여느 때와는 달리 일자에 맞춰 글을 보낸다. 1957년 사상계 3월호에 보도되는 저 유명한 “할 말이 있다”이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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