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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보내셨는가흩어진 교회(마태복음 10:5-1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3.15 15:52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교회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고 말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예배 모임 자체를 진행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가 감염지, 전염지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각 지자체가 예배를 드리지 않기를 권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는 이에 응한 상태입니다.

저희 교회는 지난 두 주간 동안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떤 교회는 설교를 영상으로 찍어서 배포하기도 하였고, 어떤 교회는 예배 영상을 실시간 라이브로 제공했습니다. 지난 주일 오전 11시에는 유튜브 서버가 폭주하여 예배 실시간 방송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번 코로나 사태는 교회의 플랫폼이 바뀌는 큰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들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보다 지금 마주한, 앞으로 닥칠 큰 어려움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주일헌금의 공백일 것입니다. 저희 교회처럼 주일헌금보다는 작정 헌금이 중심인 소형 교회들은 헌금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을테지만, 최소 200명 이상의 성도님들이 계신 교회들은 주일 헌금의 공백으로 인한 타격이 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교회 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영업에 큰 차질을 빗고 있는 자영업자 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성도님들이 장기간 출석하지 않음으로 인해 신앙생활, 신앙 습관이 안이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입니다. 저도 군대에 있을 때, 산속에 있는 단독 소대였기 때문에 교회 출석에 어려움이 있었고, 2년간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특히나 상병 5호봉, 흔히 상병 꺾였다고 표현하는 시기를 지나서는 주일 아침에 딱히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주일은 늦잠을 자기에 딱 좋은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보냈습니다. 만약 제가 목회자의 자녀가 아니었고, 제대 후 살던 집이 아버지께서 시무하시던 교회 3층 사택이 아니었다면 저는 제대 이후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목사님께서 아마 이런 점을 걱정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달 가까이 예배로 모이지 않을 경우 성도님들이 다시 예전처럼 모임에 참석하려 할지, 혹시 우리 교회가 모이지 않던 기간 동안 문을 열었던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실지도 모릅니다.

이는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걱정거리입니다. 이와 다르게 신앙적인 걱정도 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는 점에 대해서 자신이 죄를 범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주일 성수, 십계명 제5계명인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어긴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고 여기실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예배 중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어떻게 마스크를 쓰냐며 마스크를 벗어버리신 성도님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염려가 지금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목회자와 성도 모두 걱정과 염려 속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일들이 바른 걱정거리인지, 우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파송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신 후,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시작으로 훗날 이름을 남기게 되는 제자들을 모으십니다. 베드로, 안드레 다음으로는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후에 세리 마태 또는 레위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 미국 텍사스 엘 파소에 위치한 Cathedral Parish of Saint Patrick 교회에 설치되어 있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형상화한 스테인드 글라스 ⓒWikipedia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이 사람의 이름을 레위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의 경우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목록에 레위는 없습니다. 알패오의 아들은 야고보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의 가능성이 있지만, 마태복음은 그 사람이 레위가 아니라 마태라고 말하며, 그 마태가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라고 명시합니다.

그 마태가 이 마태가 맞는지, 혹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이 레위인지, 혹은 이 레위라는 사람이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는지 분명하진 않습니다만, 세리였던 누군가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커 보입니다.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세리였다면, 세리 출신을 놔두고 가롯 유다가 재정 관리를 했을 이유가 없습니다.

각설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둘 제자를 모으시다가 그중에서 열두 명을 선발하셔서 그들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여기에 병 고치는 능력도 주셨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의 경우, 예수님께서 권능을 주신 목적이 나타나지 않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이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물론 마가복음도 6장 12-13절에서 제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면, 능력을 주신 목적이 드러나기는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모으셨습니까? 특히 능력을 가진 열두 제자를 왜 세우셨습니까? 떠나보내시기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그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하셨고, 아픈 이들을 치유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으신 이유는 흩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여행의 조건은 혹독했습니다. 옷은 한 벌 밖에 입지 못하였고, 마가복음은 지팡이와 신발을 허용하고 있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신발, 지팡이, 배낭, 식량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과 나머지 복음서의 차이는 아마도 도시 중심 선교와 지방 중심 선교의 차이로 보입니다. 길이 잘 닦인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할 때는 맹수를 쫓아낼 지팡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 신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방은 다릅니다. 길이 닦이지 않은 곳, 로마 병사가 경계하지 않는 길에는 맹수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지팡이가 필요합니다. 길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신발도 필요합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통해 각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복음서가 보여주는 이런 차이점을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변경하여 선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쁨의 귀환

지팡이와 신발의 허용 여부를 떠나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수행과제는 혹독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제자 파송’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놓았지만, 예수님께서는 혹독한 과제와 함께 제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떠나보내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들에 대해 걱정하셨을까요?

이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이들이 혹시나 사고를 당했으면 어떻게 하지? 이들의 여정 속에서 영적으로 고갈되면 어떻게 하지? 예수님의 태도 속에서 이런 염려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담대한 마음으로 이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마태복음 10장의 파송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루살렘 입성 후에 전하셨던 말씀과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실제 파송 장면이 아니라 훗날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이후를 위한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떠났다가 돌아오는 장면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오병이어 사건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이른바 선교 보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0절에 따르면,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라고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9장 10절은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라고만 적었기 때문에 조금 건조한 느낌이 있습니다만, 마가복음의 기록은 조금 더 생동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이 행한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자신이 잘한 일에 대해 말할 때는 꼼꼼하게 하나도 빼먹지 않고 이야기하듯이 예수님께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고 싶어서 낱낱이 말씀드렸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지겨우셨던 건지, 아니면 이들이 피곤하리라 여기셨던 건지, 마가복음 6장 31절에서 제자들을 향해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아이가 자기 잘했다고 옆에서 재잘거리고 있으면 알았으니까 이제 방에 가서 놀라고 말하는 편이라 예수님께서도 지겨우시지 않았을까 생각은 듭니다만, 그래도 예수님이신데 제자들을 염려해서 가서 쉬라 말씀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누가복음은 열두 제자의 귀환에 대해서는 조금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독자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70인의 제자 파송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은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전합니다. 이들 역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오히려 기뻐하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흩어짐의 목적

지금의 우리와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오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도, 돈에 대한 걱정도 없으셨습니다. 영적 고갈 현상에 대한 걱정도 없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자신들에게 맡겨진 소명을 다하고 기쁨으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최근 어떤 분의 글에서 지금까지 교회는 모이는 교회만을 지향해왔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고,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의 교회 형태가 무너져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교회 형태 속에서 성도님들 간의 바른 교제가 이루어지고 교회가 참된 은혜를 나누는 공간이 된다면, 그 공간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우리는 흩어짐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걱정과 염려가 없던 이유는 하나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다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에게도, 이를 실천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교회가 흩어져버린 상황입니다. 흩어진 이후의 목적을 고민하고 성도님들께 전해드릴 시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영상 예배를 통해서든 설교문을 통해서든 새로운 형태의 모임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목적을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지금 교회의 태만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는 일주일 중 6일은 사회 속에서 보냅니다. 오직 하루만을 교회에서 모입니다. 우리가 대부분 생활하는 공간은 교회가 아닌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미 예전부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했어야 했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삶의 목적을 성도님들에게 전해드렸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6일의 삶을 무시하고 오직 ‘주일’ 하루만을 바라보도록 가르쳐왔습니다. 이날만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신다고만 가르쳤기에 6일은 비신앙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하루만 거룩하게 살아가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늘어만 갔습니다.

물론 어떤 교회들은 이미 삶에서 신앙인으로 가져야 할 목적을 전하셨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셨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교회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하지만 최근 많은 목사님이 예배로 모이지 못하는 현상황에 대해 염려하시는 모습을 보면, 삶의 목적과 태도를 전해 온 교회는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성도님들의 흩어짐에 어떤 목적을 전해야 하는지는 각 교회의 상황과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앞서 초대교회도 예수님의 말씀을 유연하게 전달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 목적에 대해 제 생각을 제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각각의 교회에서 이를 고민하고 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목적이 ‘살면서 교인 몇 명 전도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치 사회 속에서 우리 삶의 목적과 자세로 보이지만, 결국 자신이 속한 교회만을 생각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였습니다. 그리고 아프고 병든 이들을 안아주고 고쳐주는 일, 귀신 들려 소외당한 자를 감싸주고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아닌 사회 속에 흩어져 있는 이 시기에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사회 속에 살아가는지, 그리스도인인 내 삶의 태도는 어떠한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흩어져 있더라도 오히려 영과 기쁨으로 차고 넘치고,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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