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ovico Carracci, 「A fiery Purgatory(불타는 연옥)」(1610) ⓒWikipedia
Ludovico Carracci, 「A fiery Purgatory(불타는 연옥)」(1610) ⓒWikipedia

칼빈은 이렇게 회개와 중생에 대해 논하고, 로마교회의 회개론을 논박합니다. 우선 그는 스콜라 학자들이 회개를 일종의 고행으로 간주하며, 얼마간 육을 길들이고 허물을 징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의 내면적 변화와 그에 따르는 생활의 진정한 개선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입을 다물고 있다고 비판합니다(III.iv.1).

가톨릭의 회개에 대한 비판

그들은 회개를 심령으로 하는 통회(참회), 입으로 하는 고백(고해성사), 행위로 하는 보속(만족설)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위해서 이 세 가지 방식의 회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칼빈은 죄의 용서야말로 신앙의 전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어떤 조건 하에서, 얼마나 쉽게 또는 어렵게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명확히 알려져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이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을 때, 양심은 평안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평하지도 못하며, 도리어 끊임없이 떨며 불안해하고, 하나님을 보면 도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III.iv.2). 칼빈은 이 스콜라적 견해를 차례로 비판합니다.

첫째, 회개에 관한 스콜라 교리는 양심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 용서를 얻기 위해서 충분한 통회, 즉 공정하고 완전한 통회가 앞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충분한 통회를 하라는 요구 앞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진 빚의 분량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얼마나 통회를 해야 빚을 갚을 수 있을지를 분간할 수 없습니다. 스콜라 학자들은 우리의 힘이 닿는대로 하라고 말하나,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되돌아올 뿐입니다. 누가 감히 자기의 죄의 분량만큼 통곡했노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양심은 오랫동안 자기와 씨름하면서도 결코 쉴만한 피난처를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III.iv.2). 따라서 칼빈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죄인의 통회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가리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죄인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공정하고 완전한 통회란 것을 하면, 그 공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죄인이 자기의 불행과 동요와 피로와 포로된 상태를 인정하며, 새로운 원기 회복과 안식과 자유를 얻을 곳이 어딘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구하라고 죄인에게 명령하는 것, 요컨대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라고 가르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III.iv.3).

고해성사에 대한 비판

둘째로, 이른바 고해성사는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많은 역사적 문서들을 검토한 후에, 이 고백이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정한 법이 아니라 감독들이 제정한 교회 행정상의 규율일 뿐이었으며, 한 때 고대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 이 관습이 있었지만 어떤 부인이 고백을 가장􏰀여 어떤 부제와 애정관계를 가졌던 일이 발각된 이후에, 감독 넥타리우스가 고백의 행사를 폐지시켰다는 사실 을 적시합니다. 그리고 이노센트 3세(1198-1216년 재위)가 라테란 회 의(1215년)에서 다시 이 법의 시행을 명령했기 때문에, 이 고백은 교 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대단히 오래된 관습이 아니라 겨우 300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III.iv.7).

칼빈은 이 고백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분별의 연령에 도달한 신자들은 모두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그들의 사제를 찾아가 자기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하며, 그들이 죄를 고백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없으면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제공될 때에 이 의도를 실행하지 않으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들 앞에 닫힌다고 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사제는 죄인을 매든지 풀어주든지 하는 ‘열쇠의 권한’이 있으며, 이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운운하는(마18:18) 그리스도의 말씀이 헛된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III.iv.15).

이 ‘열쇠의 권한’은 『기독교강요』 제4권 ‘교회론’을 다룰 때 보다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열쇠의 권한을 교회의 재판권으로 이해하고, 누가 매이고 누가 풀릴 것이며, 누구의 죄가 용서를 받으며 누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이 사제의 직무이며, 또 고백을 받고 죄를 용서하거나 남겨둘 때, 또는 파문이나 성사 참가의 허락을 선고할 때, 이런 선언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교황 제도 하에서 이 열쇠의 권한이 남용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 권한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고 죄를 용서하며 말소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III.iv.15).

그리고 칼빈은 이 주장들에 대해 차례로 비판합니다. 첫째,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19:12, 38:4)라고 외친 다윗의 예를 인용하며, 모든 죄를 열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다는 것을 지적합니다(III.iv.16). 둘째, 완전한 고백에 대한 요구 자체가 불합리하며, 여러 가지 악영향을 초래할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예컨대, 완전한 고백이라는 것은 일 년 동안에 한 모든 행동을 기억할 수 없고, 또 그래서 전혀 실행할 수 없는 고백이기 때문에, 오히려 죄인을 정죄하고 당황하게 만들며 파멸과 절망에 빠트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은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일일이 세는데 정신이 팔리게 해서, 자기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 수렁과 비밀한 죄의 추악성을 잊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빼앗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는 위선자로 만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III.iv.18).

마지막으로, 비밀고백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사제에게 은밀하게 고백한 사람들이 밖에 나와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 하였다”(잠30:20)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앞으로 일 년 동안은 고백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거나 정신을 차리는 일이 없이 계속 죄에 죄를 거듭하는 악행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III.iv.19).

그러나 칼빈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실한 고백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이라고 주장합니다.

죄를 용서하며 잊어버리며 씻어버리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주께 죄를 고백하자. 주님은 의사이시므로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보이도록 하자. 우리의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하며 노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주께 화해를 구하도록 하자. 마음속을 아시며, 모든 생각을 아시는 이는 주님이시니(히4:12 참조), 우리는 그의 앞으로 속 히 가서 우리의 속마음을 쏟아 놓자. 끝으로 죄인들을 부르시는 이는 주님 이시니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자(III.iv.9).

따라서 주일마다 목사는 자신과 교인들의 이름으로 죄의 고백문을 작성하여 하나님께 고하고, 주님의 용서를 간구해야 합니다(III.iv.11). 주께서는 친히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 8:13 참조)고 하셨습니다. 죄인이 주님께서 정하신 이 원칙을 따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받기만 하면, 이 간단한 조건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용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III.iv.22).

보속교리에 대한 비판

마지막으로, 칼빈은 가톨릭의 보속교리를 비판합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과거의 악행을 그치고 행실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며, 그가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보속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보조적인 방법에는 눈물과 금식과 예물과 자선 행위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죄책을 용서하셨으나, 공의의 법에 의하여 벌을 보류하셨기 때문에, 보속에 의해서 속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의 요점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우리의 범행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행위의 공로가 그 사이에 끼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공로로 죄의 피해에 대한 값을 치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보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보속교리를 “거짓말”이라 부르며, 그 까닭은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죄인에 대한 값없이 주어지는 용서에 반대되기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사52:3; 롬3:24-25; 골2:13-14; 딤후1:9; 딛3:5)(III.iv.25). 그리고 칼빈이 보속교리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이 교리가 면죄부와 연옥교리의 바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면죄부가 보속을 위해서 우리의 부족한 힘을 보충해준다는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논박이 불필요할 정도로 어리석은 오류이지만,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라 말하며 비판합니다.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되며(III.v.2), 교부들이 면죄 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고(III.v.3), 잘못된 성경해석에 근거하고(III.v.4),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무익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습니다(III.v.5).

연옥설에 대한 비판

그런데 칼빈은 연옥설은 사탄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거짓말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연옥은 사탄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거짓말이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연옥 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부숴버린다. 그 자들의 이 연옥은 죽은 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죄에 대한 보속을 치른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보속이라는 생각이 깨지면 연옥 자체도 송두리째 뽑혀지고 만다.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을 죄를 위한 유일한 보속과 유일한 속죄와 유일한 정화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연옥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서운 모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 에 없지 않은가?(III.v.6).

성경에 연옥을 증명하는 성구들이 있다는 저들의 주장에 대하여 칼빈은 면밀한 성경주석을 통하여 논박합니다. 예컨대,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바울의 말에서(빌2:10) 그들은 연옥의 증거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땅 아래”는 영원한 저주에 떨어진 자들을 의미한 것으 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생각이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그 말을 연옥에서 괴로워하는 영혼들에 적용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로부터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그러므로 “땅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려와서 공포와 전율로 심판자를 인정할 마귀들을 의 미한다고(야2:19; 고후7:15 참조)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III.v.8).

칼빈은 연옥과 성자들의 중보기도와 은밀한 고백 같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문제들이 로마교회의 중요한 교리와 관습이 되었던 것은 그것들이 교회 회의들의 결정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진정한 해석(1)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러나 칼빈은 제1권에서 확인한바 있는 ‘성경원리’, 성경의 우위성의 원칙을 따라서 “교회 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즉 주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장하며 가르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IV.viii.15)고 주장하며 명백하게 거부합니다.

미주

(미주 1) 예컨대, 콘스탄스 회의(1415)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의 잔을 단지 사제에게만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전혀 반대되는 이 결정을 “해석”이라고 하였습니다(IV.ix.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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