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 정신이 광장·거리에서 살아 숨 쉬었기에 내란의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4·19, 5·18, 10·28로 이어지는 정의로운 역사를 반영한 것입니다. 20살 청년이 60대가 된 지금, 시니어 문제 해결 등 남은 과제를 ‘K-시니어’로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박준희 한신대 총동문회장은 10·28 건대항쟁 39주년 기념식에서 건대항쟁의 오늘날 의미와 과제를 이렇게 풀어냈다. 기념식은 10·28 건대항쟁 계승사업회가 주최해 10월 28일(화) 오후 7시, 건국대 10·28 건대항쟁 기림상 앞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당시 주역 선배, 총학생회, 총동문회, 교수협의회, 민주동문회,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66시간 50분의 항쟁, 그날의 기억
건대항쟁은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건국대 캠퍼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생 민주화 운동이다. 흔히 ‘10·28 건대항쟁’으로 불리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선 학생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항쟁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직접적인 선구로 평가되며,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 학생 구속 사태(1,288명 구속)를 초래했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 언론 통제, 헌법 개정 거부 등을 통해 민주화 요구를 강경 진압했다. 1980년 서울의 봄(서울대생 시위)과 1985년 노동자·학생 연대 운동이 이어지며, 학생운동은 ‘반외세·반독재·조국통일’ 등의 3대 구호 아래 전국화되었다.
건대항쟁이 일어난 1986년은 9월 아시안게임 성공으로 정권의 기세가 올라갔으나, 민주화 요구는 여전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결성되었고, 10월 3일 인천 5·3 민주항쟁이 발생하며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을 빌미로 대규모 탄압을 계획했다.
건국대는 서울 동부권 중심지로, 학생들이 집결하기 쉬운 장소였다. 1986년 10월 28일(수) 오후, 진눈깨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 속 전국 26개 대학에서 2,000여 명의 학생들이 건국대 캠퍼스에 모였다. 목적은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과 민주화 결의대회였다.
오후 2시경, 학생들은 경영관, 학생회관, 사회과학관 등 주요 건물을 점거하고 ‘민주주의 쟁취’를 외쳤다. 구호는 “전두환 타도”, “직선제 개헌”, “조국통일” 등이었다. 애학투련 결성 선언문을 발표하며 전국 학생 연대를 호소했다.
경찰은 즉시 학교를 포위하고 최루가스와 물대포로 진압을 시도했다. 학생들은 지붕과 옥상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 밤새 시가전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캠퍼스 내 고립 상태로 66시간 동안 버텼다. 물과 음식 부족, 추위 속에서 연대 농성. 외부 지지자들은 캠퍼스 주변에서 지지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의 철저한 봉쇄로 고립되었다. 당시 한신대 신학과 출신 한 학생은 “초코파이 하나로 나눠 먹었다”고 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공산혁명분자 학원증거 난동 사건’으로 규정하며, 언론을 통해 “북한 수공 위협에 편드는 학생들”로 매도했다. 경찰은 헬기, 사다리차 등 ‘황소 30 작전’으로 명명된 입체 진압을 준비했다.
새벽 5시경, 5,000여 명의 경찰이 총동원되어 강제 진압에 들어갔다. 최루가스 1만 발, 물대포, 지프차 돌진으로 학생들을 끌어냈다. 지붕 위 학생들은 헬기 사다리로 포획되었고, 일부는 창문으로 투신하거나 부상당했다. 오전 12시경 완전 해산되었고 총 농성 기간은 66시간 50분이었다.
이 당시 사회과학대 안에 있었던 85학번 한신대 신학과에 재학했던 한 여학생은 “위에서는 헬기에서 체류탄이 떨어지고, 밑에서 전경이 치고 올라오는데 무섭더라구요.”라며 긴박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튿날인가 경찰이 퇴로를 열어줘 나왔는데, 어느 순간 보니 저와 같이 왔던 후배들이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도저히 혼자 갈 수 없어서 다시 들어갔어요.”라고 했다.
39년 만의 진실 규명과 남은 과제
특히 기념 행사에서 박상희 건국대 총동문회장은 “39년간 보수·진보 정부 모두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올해 동문회장이 되어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에 신청, 박선영 위원장이 받아줘 피해 보상·명예회복의 계기가 마련됐다”고 보고했다. 박 회장은 “이 사건을 ‘공산혁명분자 학원증거 난동 사건’으로 왜곡한 정부의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며 “건국항쟁 중심의 민주화 초석임을 국민에 알리고, 국가 기념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태환 10·28 계승사업회 공동위원장은 지난 5월 20일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을 낭독했다. “국가는 구속영장 시한 초과 등 적법절차 위반으로 인권을 침해했으므로 공식 사과하고, 배상·보상을 포함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김남수 전국민주동문협의회 대표는 “86년 1학년생으로 사회과학관 옥상에서 구속됐다. 사건 명칭이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이었다”며 “언론은 ‘평양으로 보내줄게’라는 칼럼을 썼다”고 회고했다.
이에 앞서 건국대 인근 한 식당에 건대항쟁으로 구속되었던 한신대 출신들이 모임을 마련했다. 당시 구속된 한신대 학생은 모두 103명이었다. 이날 모임에는 당시 신학과 85학번과 총동문회(회장 이춘섭 목사)가 중심이 되어 20여 명이 자리했다. 건대항쟁 39년만에 처음으로 건대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모인 것이다.
이들은 “신학대 단위로 합류한 것은 한신대가 유일했다. 참여 인원으로 따지면 한신대가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많았다. 먼저 간 친구들도 둘이나 되고, 한 친구는 여전히 극심한 후유증을 안고 살아간다.”며 그 날이 남긴 흔적들을 털어놓았다. 격렬했던 항쟁은 당시에는 공식적인 사망자가 없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다섯 분의 희생자를 만들어냈고, 그 중 3명이 한신대 출신이다.
건국항쟁 계승사업회는 내년 40주년을 맞아 국가 차원의 기념일 지정, 재심 청구, 피해자 명예회복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