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 길에 나선 다윗은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을 겪으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된다. ⓒWikipedia
▲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 길에 나선 다윗은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을 겪으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된다. ⓒWikipedia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16:11-12)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능력’을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오래 참음, 상황을 수용하는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 추수감사절은 본래 미국에서 유래한 전통입니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영국의 청교도들이 이듬해 11월, 첫 수확을 마치고 3일간 축제를 열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우리나라의 전통 명절인 추석에 해당하는 절기입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대개 양력 9-10월 사이, 가을 수확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을 우리 명절에 맞게 11월 셋째주일이 아니라 10월 셋째주일에 지키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절기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절기에서 농산물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초실절, 칠칠절,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초실절은 이스라엘의 종교력(출애굽 시점을 첫 달로 삼아 산출한 달력)으로는 1월 16일, 양력으로는 3-4월경, 보리 수확기에 해당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초실절부터 7주가 지난 다음날, 곧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칠칠절 또는 오순절은 종교력으로는 3월 6일, 양력으로는 5-6월경으로, 밀 수확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은 종교력으로 7월 15일, 양력으로는 9-10월경으로, 포도, 올리브, 과일 등의 가을 수확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 추석과 가장 가까운 절기는 이스라엘의 초막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3장 42절에 의하면,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7일간 초막에 거주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를 43절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초막절은 곧 출애굽 광야 시절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광야 시절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신앙의 역설과 신비를 드러냅니다. 인생에서 가장 괴롭고 고됐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감사한 마음이 드시는지요? 아니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신지요? 그 시절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그 시절이 오늘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느냐, 오늘의 나의 성장과 성숙으로 이어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다윗의 경우에는 어땠을까요?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다니던 내내 광야를 떠돌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다윗의 고백의 일부를 들어 보십시오. 시편 54편 6-7절입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사실 이 시편은 다윗이 유다의 십 광야에 은둔해 있을 때, 유다 지파 사람들이 그를 사울의 군대에 밀고했던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유다 지파 사람임을 고려해 볼 때, 당시 다윗이 얼마나 큰 배신감에 사로잡혔을지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에 다윗은 오히려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람보다 더 신뢰했고 하나님은 선하시고 환난에 처한 이를 도우시는 분이심을 확신했음을 말해줍니다. 다윗은 자신이 광야에서 당한 일보다 광야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의식을 더욱 집중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당한 그 배신마저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깊은 통치와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감사는 좋은 일 때문에 드리는 고백이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 때문에 드리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다시 광야로 들어가야 했던 때는 어떠했습니까? 이 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렸던가요? 관련된 시편으로 추정되는 시편 63편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안정되자 어느 순간 왕좌에 도취되었습니다. 그는 왕 노릇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좌에서 내려오면서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왕되심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았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영적 갈망이 타오르는 자리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63편 3-4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사울왕에게 쫓겨 전전하던 광야에서 드린 고백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감사는 육신의 만족에서 온다기보다 영혼의 결핍과 갈망에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결핍과 갈망이 우리의 시선을 좋으신 하나님께로 고정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감사는 좋은 일로 드리는 고백이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으로 인해 드리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일, 나쁜 일, 있는 것, 없는 것, 가리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현실을 흑백으로 또는 이분법적으로 가리기를 좋아합니다. 따지기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감사가 어려운 것입니다. 감사는 상황을 가리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오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가리고 따지기를 즐겨하면, 감사는 커녕 오히려 분노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내 마음에 딱 맞는 상황이 얼마나 됩니까?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문제 아닙니까? 내 마음에 딱 맞게 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됩니까?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문제 아닙니까? 내 마음에 잘 들어맞지 않는 상황이나 사람을 문제삼는 순간, 감사는 저만치 물러가고 분노가 고개를 치켜듭니다. 자기를 위협하는 부당한 공격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야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공동체를 위협하는 불의한 세태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야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감사를 좀 먹는 분노는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감사와 분노 사이의 시소를 타면서 생활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윗도 감사와 분노 사이에서 시소타기를 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다윗이 하나님께 돌이키는 심정으로 광야로 향할 때, 그에게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5장 31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데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아히도벨, 그는 본래 다윗의 책사였습니다. 다윗의 특성, 강점과 약점을 다 아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전략, 대처방식도 눈에 익었을 터입니다. 그런 그가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책사가 되었습니다. 다윗을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이니 이제 다윗에게 제일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지 않았을까요? 분노가 또아리를 틀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상황을 수용하면 분노가 잦아들고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다윗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입장에서 다윗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좋은 친구였습니다. 사무엘하 15장 32절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다윗은 후새가 내심 반가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우 가까이에서 나를 도우신다는 사실에 감사했을 터입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자기를 따르기보다 왕실의 첩자로 가길 요청했습니다. 그가 아히도벨의 모략에 맞서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다윗은 감사와 분노 사이의 시소에서 감사쪽으로 몸이 기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 행보를 볼까요?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자 이번에는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나귀 두 마리와 떡과 과일과 포도주를 챙겨 다윗과 그의 일행을 찾아왔습니다. 이것도 다윗에게는 너무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급히 빠져나오느라 먹을 것 하나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일단 시바에게 무슨 연유인지를 물었습니다. 그것이 독배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시바는 자신의 행위가 순수한 호의임을 강조했습니다. 다윗은 안심했습니다.

다윗은 이번에는 그의 주인인 므비보셋의 근황을 물었습니다. 시바는 이때 본심을 드러냅니다. 그는 므비보셋과 다윗을 이간질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3절입니다.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므비보셋이 누구입니까? 다윗의 소울메이트였던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직후 요나단의 혈육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게 므비보셋입니다. 다윗은 그에게 큰 땅을 하사하고 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그와 다윗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또 화가 머리 끝까지 났겠지요. ‘나는 그에게 진심이었는데, 그는 겉으로만 좋은 척 했지 사실 나를 증오하고 있었구나. 사람을 이렇게 기망해도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사무엘하 16장 4절입니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은 시바에게 덜컥 므비보셋에게 하사했던 땅을 빼앗아 전부 주겠다고 약속해 버렸습니다.

다윗은 시바의 모략에 놀아났습니다. 무엇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것일까요? 므비보셋에 대한 분노 아니었겠습니까? 므비보셋의 속내가 너무 괘씸했겠지요. 이번에는 분노가 다윗을 짓눌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반응은 아히도벨의 배반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옵니까? 다윗이 아히도벨의 배반에 대해선 그 상황을 수용했지만, 므비보셋의 배신에 대해선 그 상황을 수용하지 못했던 데 있지 않습니까?

분노 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다윗에게 이번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다윗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의 친족 중 시므이라 하는 사람이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다윗을 보자마자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다윗과 다윗의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뭐라고 저주했을까요? 사무엘하 16장 7-8절입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이번에는 또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화가 폭발하지 않았을까요? 시므이는 다윗을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을, 사울의 족속을 부당하게 살해하고 왕좌를 차지한 야비한 인물로 몰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화를 낼 법도 합니다.

다윗 곁의 신하들도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 중 아비새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하 16장 9절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그의 분노의 크기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무엘하 16장 10-12절입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은 이 순간 너무나 차분합니다. 앞서 므비보셋의 속내 때문에 흥분했던 그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입니까?

다윗의 고백을 다시 잘 살펴 보십시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하나님의 개입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시므이의 행동은 사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행동입니다. 아무리 도망자 신세라지만, 객관적으로 시므이는 다윗의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그는 비무장의 단신이지만, 다윗은 장수이고 다윗 곁에는 맹장들이 즐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말들을 대놓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다윗은 그래서 더욱 이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바라시는 뜻이 무엇이냐입니다. 다윗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라봄으로써 분노의 상황을 수용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므이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과 통치와 인도하심을 신뢰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므이의 인식은 당시 사울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대변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살해하고 왕좌를 빼앗았다는 그 부당한 인식 말입니다. 그러나 시므이 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그 수많은 사람들 마음속의 인식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다윗도 그점을 인정한 것입니다. 상황을 통제하려들기보다 그 상황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 분노는 그 힘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감사와 분노 사이를 시소탈 때가 많습니다. 그 때, 그저 분노를 억누르거나 무작정 분노를 참는다고 해서 저절로 감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상황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이자 그리스도인의 참 능력인 오래 참음의 핵심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한, 우리는,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일이 많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좋은 것들을 누리고 손에 넣었는지를 헤아리며 감사하는 일을 넘어서야 합니다. 롤러코스터와 같이 굴곡진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보았는지,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아집을 내려놓고 얼마나 오래 참았고, 얼마나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를 기다렸는지를 헤아리는 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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