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성 연구원은 정체정 정치에 따른 대결의 원리가 아니라 대화의 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병성 연구원은 정체정 정치에 따른 대결의 원리가 아니라 대화의 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체성 정치의 부상과 적대의 문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을 위한 긍정적 운동으로 등장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대감(敵對感)의 새로운 근원으로 변질되었다. 정체성 정치의 핵심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동일성(identity)을 정치적 주체로 설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 중심의 정치가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강화함으로써, 우리와 다른 존재와의 상호 인정 가능성을 파괴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현대 사회의 대표 사례 중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미국이다. 트럼프주의(Trumpism)는 백인 우월주의·반이민정서·강한 국가주의와 함께 반공적 정서 및 중국 혐오(Sinophobia)를 결합시켜 ‘적대의 정체성’을 정치적 에너지로 전환하였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양상이 나타난다. 혐중(嫌中) 현상과 반북주의(反北主義)이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다문화주의와 인정의 정치(Multiculturalism: Examining the Politics of Recognition, 1992)』에서 현대 사회의 갈등을 인정(認定, recognition)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하였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상호인정적 존재(mutually recognizing being)”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테일러는 인정(recognition)을 “존재의 상호적 구성(the mutual constitution of being)”으로 보았다.  즉,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며, 인정은 단순한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요구이다. 그러나 인정이 권리로만 해석될 때, 그것은 도덕적 경쟁의 장으로 전환된다. 더 나아가, 젠더·인종·민족·국가 집단 같은 집단이 ‘인정받을 권리’를 절대화 할 때, 그것은 공존의 윤리가 아니라 적대감의 구조를 낳게 된다.

이 때 인정의 정치는 ‘피해의 서사’로 귀결되곤 한다. ‘누가 더 정당한가’, ‘누가 더 억압받았는가’를 겨루는 윤리적 서사는 대화의 공간을 정죄의 공간으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인정받을 권리’는 도덕적 상호성의 언어가 아니라 도덕적 무기로 변하며, 정치적 대화의 공간은 도덕적 전장으로 변한다. 집단적 고통과 피해의 기억이 도덕적 우위의 근거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적대의 정치가 형성된다. 이러한 ‘피해의 도덕화’는 상호인정의 윤리를 파괴하고, “우리 대 그들”의 정체성 전쟁을 낳는다.

한국 사회의 혐중과 반북주의는 바로 이러한 “인정의 정치의 역설(paradox of recognition)” 현상의 대표적 사례이다. 한국은 식민지 경험, 전쟁의 상처, 냉전의 분단 속에서 자신을 ‘항상 위협받는 피해자’로 인식해 왔다. 이 ‘피해의 국가서사’는 국가적 결속을 유지하는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되었으나, 동시에 타자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급속한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의 패권주의의 부상과 북한의 고도화된 핵전력은 이 서사를 갱신한다.  ‘우리를 위협하는 그들’이라는 감정적 구도가 형성되며, 혐중 정서와 반북주의는 서로 공명한다.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인간은 고립적 존재가 아니라 “대화적 존재 (dialogical being)”이다. 그는 “인간은 혼자서 자신을 규정할 수 없으며, 타자의 목소리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이 대화적 자아는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의 관계 속에서만 성숙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혐중 정서와 반북주의는, 찰스 테일러의 용어로 보면, “대화의 붕괴”이다. 피해의 서사가 도덕적 정치로 전환될 때, 정체성은 “상호 인정의 관계(mutual recognition)”가 아닌 ‘상호 정죄의 관계’로 형성된다. 이때 사회는 ‘대화적 존재’가 아닌 ‘비대화적 존재’로 퇴행한다. 혐중과 반북 정서는 모두 이 ‘비대화적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타자를 침묵시키는 정치적 감정 체계다.

▲ 인정의 정치가 도덕적 서사로 변모해 우월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상호인정의 정치로 변해야 한다. ⓒGetty Images
▲ 인정의 정치가 도덕적 서사로 변모해 우월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상호인정의 정치로 변해야 한다. ⓒGetty Images

악마와의 대화와 상호인정의 정치

한반도의 적대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피해의 서사를 절대화하는 대신, 피해의 기억을 대화의 계기로 전환해야 한다. 즉, ‘우리는 피해자였다’는 서사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공감의 서사로 재구성해야 한다.

테일러에게 진정한 공존은 ‘차이의 부정’이 아니라 ‘차이의 인정’에서 비롯된다. 그는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를 통해 각 집단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인정은 배타적 동일성의 추구가 아니라, 타자와의 대화적 조율을 통한  평화적 공존이어야 한다.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에 적대적 대결 대신 평화적 공존의 길을 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후 2006년도에 행한 한 연설에서 “국가 이익이나 세계 평화에 필요하다면 악마하고도 대화를 해야 한다고”고 말했다. 이 발언은 현실 정치의 언어로는 도발적으로 들리지만, 철학적으로는 테일러의 대화적 존재론과 깊은 접점을 가진다.

이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대화를 인간 존재의 근본 윤리로 본 사상적 선언이었다. 그는 적대의 부정이 아닌 적대의 초월을 평화의 본질로 이해하였다. 그는 상대가 악하다는 이유로 대화를 포기하면, 결국 악은 구조화되고 폭력은 지속된다고 보았다. 대화는 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고착을 방지하는 윤리적 행위이다. 이 점에서 김대중의 평화 철학은 테일러의 대화적 존재론과 만나고 있다. 그에게 대화는 타자를 설득하는 수단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

김대중에게 대화는 상대의 악(惡)을 부정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현실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도덕적 용기의 행위였다. 그가 ‘악마’라는 상징적 언어를 사용한 것은, 적대의 극단마저 대화의 장으로 포함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관계적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평화철학이었다.

김대중의 “악마와도 대화해야 한다”는 말은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기독교 전통에서 악마는 절대적 악의 상징이지만, 김대중은 이를 적의 제거가 아닌 악의 전환의 가능성으로 보았다. “악마와도 대화해야 한다”는 말은 곧 ‘인간의 악마화를 멈추라’는 뜻이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Love your enemies)”는 예수의 말씀(마태복음 5:44)의 정치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명령은 단순히 ‘적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가 아니다. 그것은 ‘적을 규정하는 인식 구조 자체를 해체하라’는 선언이다.

즉, 적대(敵對)를 인간 존재의 본질로 삼는 정치적 인간학을 아가페적 사랑(agape)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삼는 신학적 인간학으로 전환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적대적 인간관을 해체하고, 대화적 인간관을 기반으로 한 관계적 정치를 요구한다. 사랑은 ‘정복’이 아니라 ‘대화의 지속’이다. 예수의 명령은 곧 “적과의 대화가 인간됨의 조건”임을 선포한다.

적대의 정치에서 대화의 정치로

21세기의 한반도는 여전히 적대(敵對)의 구조 위에 서 있다. 남북한의 분단은 단순한 군사적 분단이 아니라, 존재론적 단절이며, 그 안에서 ‘적’은 단지 정치적 타자가 아니라, 정체성(identity)을 구성하는 부정적 거울로 기능해 왔다. 북한과 남한은 서로를 ‘위험한 타자’로 규정하면서, 정체성의 위협을 상호 증폭시켜 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한반도 평화는 단순히 군사적 정전(停戰)이 아니라, 감정의 치유와 상호인정의 회복이라는 철학적 과제를 요구한다.

김대중과 테일러의 시각에서 보면, 남북 관계의 핵심은 대화의 부재다. 대화가 중단된 상태에서 서로는 존재론적 고립으로 빠진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한 협상이나 선언이 아니라, 존재의 회복이다. 한반도의 적대적 정체성은 대화의 부재로 형성된 것이므로, 그 해결은 정치적 대화의 재개가 아니라 존재론적 대화의 회복이어야 한다. 즉, 서로를 정치적 대상이 아닌 ‘함께 존재하는 인간’으로 인정해야 한다.

한반도의 냉전 구조는 ‘우리 대 그들’의 적대적 언어 체계를 강화해 왔다. 이 구조를 유지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김대중과 테일러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란 침묵이 아니라 ‘대화의 지속’이다. 대화는 타자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기 위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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