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배의 『개벽신학』은 한국 전통 사상과 신학으로 서구 신학의 난제와 허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한국적 신학의 한축을 새로 정립했다.
▲ 이정배의 『개벽신학』은 한국 전통 사상과 신학으로 서구 신학의 난제와 허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한국적 신학의 한축을 새로 정립했다.

1. 무너진 시대, 신학의 숨 쉴 틈을 찾아서

제도권 교회를 떠난 뒤로 나는 책과 조금씩 멀어졌다. 신학 서적이라면 더더욱 손이 가지 않았다.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 안에서 삶의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어느 순간 신학이라는 언어가 삶을 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가두는 틀이 되어버린 듯했다. 교리는 정답을 말했지만, 정답이 나의 고통이나 시대의 혼란을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신학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지내던 시기, 내 손에 잡힌 책이 바로 이정배 교수의 『개벽신학』이었다. 다시 신학을 읽을 마음이 생긴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랐던 것은 이 책을 읽으며 ‘신학’이라는 단어에서 오랜만에 숨을 돌릴 여백을 느꼈다는 것이다. 책은 결코 술술 읽히지 않았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사유는 깊고, 다루는 세계는 넓었다. 오래된 신학적 전통과 동학의 개벽 사유, 생명철학, 민중의 역사, 우주론과 복잡계 과학까지 서로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이는 사유들이 맞물리며 커다란 사념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는 혼란스럽기보다 오히려 낡은 신학 언어가 허물어진 자리에 새로운 길을 서서히 드러내는 듯했다.

나는 요즘 ‘통섭’이라는 개념에 마음이 자주 머문다. 학문이 서로 벽을 세우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오늘의 위기—생태, 사회, 정치, 영성의 위기—는 어느 한 분야의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개벽신학』을 통섭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단지 ‘동학과 기독교의 접점’이나 ‘한국적 신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세계가 서로를 향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그 경계에서 새로운 신학적 언어가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책을 읽으며 저자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신학의 언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어떻게든 더 넓고 더 열린 차원에서 다시 쓰려는 의지, 신학을 생명과 역사와 우주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려는 그 진심이 느껴졌다. 그것은 교단의 교리를 지키는 신학이 아니라, 시대의 고통과 생명의 흐름 속에서 신학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놀랍게도 많은 부분에서 그의 생각은 지금의 나와 닿아 있었다. 초월적 하나님이 아니라 관계적·내재적 하나님, 교리 중심 신학이 아니라 생명 중심 신학, 분리된 종교가 아니라 세계 전체를 해석하는 신학. 제도권 교회에서 멀어진 이후 내 안에 서서히 자리 잡았던 생각들이 책 속에서 언어를 얻고, 형태를 갖추고, 더 깊은 지평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개벽신학』은 내게 “다시 읽을 수 있는 신학”을 열어준 책이었다. 신학을 떠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학이 내 삶에서 더 큰 틀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틀을 ‘개벽’이라는 사유로, ‘통섭’이라는 방법으로 새롭게 열어젖히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신학을 떠난 것이 아니라, 신학이 스스로 개벽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 개벽이라는 신학적 사건: 존재·역사·생명의 대전환

이정배 교수의 『개벽신학』은 최근 한국 신학계에서 보기 드문 밀도를 지닌 책이다. 이 책은 신학적 논쟁이나 교리적 해설의 방식으로 쓰인 전통적 학술서는 아니다. 오히려 이정배가 오랜 시간 붙들어온 생명·민중·동학·예수·존재론을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엮어내려는 종합적 시도이며, 신학이 가야 할 길을 다시 묻는 신학 내부의 성찰문이자, 동시에 신학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관의 제안서에 가깝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단 하나, “개벽”이다. 그러나 이정배가 말하는 개벽은 단순한 시대 변화나 혁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향한 막연한 열망이나 낙관적 미래주의도 아니다. 그에게 개벽은 존재의 지층이 뒤틀리고 갈라지며 스스로 다른 세계를 꿈꾸게 되는 사건, 즉 삶 자체가 새로운 리듬을 찾기 시작하는 생명의 대전환이다. 이 서평은 『개벽신학』이 제시하는 문제의식, 신학적 방향성, 동학과 기독교의 새로운 연결점, 한국 신학이 처한 현실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단순 요약에 머물지 않고, 이정배의 시도가 한국 사회와 한국 신학 전체에 던지는 문화적·철학적 함의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동학의 개벽은 흔히 ‘새 하늘이 열린다’, ‘낡은 세계가 무너진다’라는 대전환의 언어로만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정배는 개벽을 역사적 혁명의 표상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적 발아의 과정, 즉 ‘존재 내부에서 일어나는 균열’로 재해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에서부터’라는 점이다. 개벽은 바깥에서 주어진 변화가 아니라, 기존 세계의 틀이 스스로 견디지 못해 발생하는 내적 긴장의 폭발이다. 그는 이를 기존의 기독교 신학이 말해온 종말론, 즉 ‘밖에서 개입하는 신의 심판’과 대비시키며, 개벽을 생명의 자기초월 능력으로 설명한다.

이 관점은 한국 사회가 처한 시대적 조건과 깊이 연결된다. 기후위기, 민주주의의 후퇴, 사회적 양극화, 젊은 세대의 불안과 고립, 신앙의 제도화와 관습화. 이정배는 이 모든 현상들을 “낡은 세계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증상”으로 읽는다. 이 세계의 틈에서 들리는 신음과 균열은 단지 비극적 징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비집고 나오기 위한 절박한 몸짓이다. 개벽은 바로 그 틈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통증이자 희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벽은 사건이면서 감각이다. 거대한 변혁의 순간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스며드는 작고 사소한 변화의 움직임조차 개벽의 일부이다. 이정배의 개벽 개념은 세계를 거대한 구조적 단위로만 보지 않고, 작은 생명·작은 움직임·작은 기척을 신학적 사건으로 읽는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3. 개벽예수와 동학: 신학 언어를 다시 짓는 시도

『개벽신학』의 가장 도발적인 지점은 ‘예수의 재해석’이다. 이정배는 기독교가 예수를 지나치게 교리화하고 초월화하여, 예수가 실제로 살아낸 생명의 연대를 가린다고 비판한다. 고난받는 민중의 자리에서 생명의 숨을 나누던 예수는 사라지고, 대신 ‘죄를 용서해주는 초월적 존재’, ‘죽음을 이긴 신적 영웅’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정배가 불러내는 예수는 전혀 다르다. 그는 성전 밖으로 이동한 예수, “민중의 자리에서 하늘의 숨을 나누는 생명의 친구”이다. 예수는 해방을 선포한 혁명가도, 교리의 완성자도, 제도 교회를 정당화하는 기초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계에 갇힌 생명들을 깨우고, 억눌린 존재들을 일으키는 관계적 힘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초월적 계시가 아니라 현존하는 생명의 깊은 울림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개벽예수”라 부른다. 예수의 역할은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 서로를 살리는 관계를 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먼 하늘에 있는 이상적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생명이 깨어나는 순간,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순간, 낡은 질서를 넘어서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다. 예수는 그런 개벽의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이다. 이 예수는 기독교 제도가 붙들어온 다양한 이원론—구원과 심판, 성과 속,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을 모두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존재의 연결성을 열어젖힌다.

이 책의 가장 창의적 기여는 동학을 기독교 안에 단순히 ‘참고 자료’로 삽입한 것이 아니라, 두 사유 체계가 서로의 결핍을 보완하며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연 데 있다. 특히 동학의 핵심 문구인 “하늘·사람·땅은 하나”는 개벽신학의 출발점이 된다. 이 원리는 서구 기독교가 구축해온 초월적 신·이원론적 존재론·위계적 질서를 근본에서 흔든다. 동학에서는 하늘이 인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은 인간 안에서, 자연 안에서, 생명의 호흡 안에서 감각되는 힘이다. 이정배는 이 원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관계적 힘으로 재정의한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해석의 수정이 아니다. 이정배는 신학이 더 이상 서구에서 수입한 개념을 번역하고 조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신학은 한국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스스로 발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개벽신학』이 제시하는 중요한 신학적 틀 중 하나가 바로 세 가지 ‘공(空)’ 개념이다. 이 공 개념은 개벽과 통섭 신학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1. 역사적 공(歷史的 空): 기존 사회 질서와 권력 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틈이다. 민중과 공동체가 새롭게 삶을 모색할 수 있는 역사의 여백이며, 낡은 질서가 균열되는 순간 느껴지는 생명의 긴장이다.

2. 공동체적 공(共同體的 公): 기존 공동체의 분열, 배제, 권력 중심적 구조에서 벗어나, 연대와 상호 책임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민중적 신학에서의 공동체를 확장하여, 인간뿐 아니라 자연과 생명 전체의 연대적 가능성을 포함한다.

3. 영적·신학적 공(靈的 共): 신앙, 삶, 존재를 제한하는 전통적 신학적 틀을 넘어, 관계적·내재적 하나님과 생명 중심 신학을 경험하는 열린 공간이다. 예수와 민중, 생명과 현실이 만나 새롭게 걸어가는 신학적 사건을 감지할 수 있는 장이다.

세 가지 공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개벽신학』은 이를 통해 존재·공동체·신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에게 동학은 종교적 대안이 아니라, 한국 땅이 스스로 길러낸 존재 철학이고, 그 철학 위에서 한국 신학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 기독교가 오랫동안 ‘서구 신학의 하위 번역체’에 머물러 있었던 지적 구조를 비판하고, 신학의 토착화 담론을 넘어 땅에서 우러나오는 신학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정배의 개벽신학은 민중신학의 계보 안에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단순한 연장선은 아니다. 민중을 억압받는 모든 존재—인간, 짓밟힌 자연, 말 없는 생명, 침묵 속의 고통—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한다. 기후위기 시대, 인간 중심적 신학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신학은 생명을 일으키는 일에 봉사해야 하며, 그 첫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고통받는 생명의 울음은 어디에서 들리는가?”가 된다.

▲ 이정배는 감리교 신학대학을 조기 은퇴해 거리의 신학자로 살았다. 지금은 강원도 횡성과 서울을 오가며 한국적 신학의 재정립에 큰 힘을 쏟고 있다.
▲ 이정배는 감리교 신학대학을 조기 은퇴해 거리의 신학자로 살았다. 지금은 강원도 횡성과 서울을 오가며 한국적 신학의 재정립에 큰 힘을 쏟고 있다.

4. 개벽의 감각, 시대의 윤리, 그리고 저자에게 던지는 질문들

『개벽신학』은 독자를 미래에 대한 기대나 비전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개벽은 이미 시작된 현재의 움직임이다.

“개벽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감지되는 것이다.”

이정배의 이 표현은 개벽을 감각의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 개벽은 폭발적 사건보다 작은 진동, 미세한 균열, 살아 있는 생명의 떨림 속에서 경험된다. 그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현장을 개벽의 징후로 읽는다. 독자는 이를 듣는 순간 당대의 개벽에 참여한다. 이 책의 철학적 깊이는 신학의 개념적 틀을 해체하고, 생명과 감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신학 형식을 제시한다. 전통적 신학은 이론→해석→실천 순서지만, 이정배 신학은 감각→사건→언어 순서다. 신학은 먼저 “느끼는 일”에서 출발해야 하며, 생명의 떨림과 세계의 균열을 감지해야 한다. 개벽은 사건이며, 언어가 아니라 몸짓이고, 교리가 아니라 생명의 현장이다. 『개벽신학』은 기존 신학의 틀을 넘어서는 책으로, 신학을 깊이 사고하려는 사람에게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서평으로서 비판적 관점을 덧붙이자면, 개벽이라는 개념의 광대함이 한계이자 장점이다. 정치적 변화, 생태적 위기, 개인 영적 각성, 사회적 저항 모두 개벽으로 묶일 수 있어, 구체적 실천 모델은 부족하다. 그러나 이정배는 책이 실천 전략서가 아니라, 새 세계를 향한 감각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개벽신학은 체계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놓고, 생명과 역사 속에서 감지되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것. 이것이 『개벽신학』이 던지는 질문이자, 시대의 틈에서 솟아오르는 새벽을 향한 신학적 상상력이다.

『개벽신학』은 신학을 생명과 땅, 민중과 연결하는 전환의 책이며, 무너진 시대의 틈에서도 새벽의 시작을 믿게 하는 희망의 신학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개벽을 준비하고 있는가? 초월과 내재, 전통과 토착, 교리와 생명 사이에서 신학은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새롭게 품어야 하는가? 『개벽신학』은 그 질문에 답하기보다,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개벽신학』을 덮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계의 문을 열고 있는가? 이정배의 신학은 거대하고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다. 그는 신학을 하늘로부터 끌어내려 땅 위에 세우고, 생명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게 한다. 개벽은 과거의 동학이 남겨준 사상적 유물도 아니고, 미래에 올 혁명적 사건의 예언도 아니다. 개벽은 이미 진행 중이며, 그 개벽의 중심에는 민중의 숨결과 상처 입은 생명과 움직이는 존재의 힘이 있다. 이정배의 『개벽신학』은 한국 신학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미래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이다.

이 책은 신학을 다시 생명으로, 땅으로, 민중으로 돌려세우는 전환의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벽신학』은 이론서가 아니라 시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신학적 나침반으로 읽힌다. 이 나침반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떤 개벽을 준비하고 있는가?”

마치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가 13,37)

『개벽신학』을 읽고 저자에게 던지는 몇 가지 질문

1. 개벽을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삼을 때, 기독교의 초월적 하나님 개념은 어떻게 재정의되는가?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2. 동학·민중·생명·우주론을 통합한 신학이 실제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 개벽신학은 기존 교회의 구조·예배·실천을 변화시킬 실제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가?

3. 생명 중심적·관계적 신학이 제도권 교회의 권력 구조와 충돌할 때, 개벽신학은 어떤 대안을 마련하는가? 한국교회의 보수성 속에서 이 신학은 현실적 실천력을 갖출 수 있는가?

4. 위기의 시대(생태·정치·사회)에서 개벽신학은 어떤 ‘행동의 윤리’를 제안하는가? 단순한 사유의 틀을 넘어, 구체적 실천을 위한 기준이나 원칙이 있는가?

5. 개벽신학은 기독교를 ‘닫힌 종교’에서 ‘열린 종교’로 전환시키는 프로젝트인가?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기독교는 어떤 요소를 내려놓고, 무엇을 새롭게 품어야 하는가?

6. 동학의 개벽 사유를 차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화적·종교적 오해에 대해 어떤 해명을 준비하고 있는가? 단순한 종합이 아니라 진정한 상호 변혁이 가능한가?

7. 궁극적으로 개벽신학은 ‘새로운 신학’인가, 아니면 ‘신학의 회복’인가? 저자가 바라보는 개벽신학의 최종 목표—신학의 재건, 교회의 변혁, 인간의 변형 중 무엇이 중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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