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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동참하는 성도새로운 피조물(요한복음 20:21-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3.04.09 04:03
▲ Duccio di Buoninsegna, 「Christ Appears to the Disciples at the Table after the Resurrection」 (1308-11) ⓒWikimediaCommons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기독교가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성탄절이 교회의 가장 큰 절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초대 교회가 일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죽음 이후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고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날이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날, 기독교의 시작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고난과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부활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2000년이 더 지난 지금 우리에게 부활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우리는 어떤 부활을 기념해야 할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부활 사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부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먼저 공관복음서는 여성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베드로가 첫 증인으로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신이 사라졌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당했거나 사라졌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들이 무덤을 떠나간 이후의 이야기는 적혀있지 않지만, 이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했던 것 같습니다. 장면이 전환되어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11절 이하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며 울고 있었습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첫 번째 제자는 베드로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마가복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붙들지 못하도록 하신 장면입니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에 마태복음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발을 붙들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만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이 모여있던 문이 닫힌 방에 나타나시는 장면과 어울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만지도록 하셨던 장면과는 상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부활 사건 자체보다는 예수님의 승천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는 듯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들릴 때(하늘에 오를 때) 모든 사람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있어서 부활은 예수님의 승천과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게 될 전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이후에 나타나는 도마의 의심 사건과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았다는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이를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은 복되다는 말씀까지 추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은 부활 사건 자체보다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셨다는 점에 조명을 비춥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복음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이들

우리가 오늘 본문 이후에 나타난 의심하는 도마 이야기를 읽으며 도마에 집중할 이유는 없습니다. 과거 도마는 의심이 많은 자였다고 평가했던 점이나 최근에 도마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는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앞서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죽음을 이겨낸 사건이라기보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몇 명의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 나타나셨는지 분명하진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이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이 12제자에게 먼저 나타나시고 이후에 500명의 제자 앞에 나타나셨는지도 모릅니다. 언제 누구에게 나타나셨는지 불분명하지만 분명한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교회에 속하게 된 이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천하셨기 때문에 새롭게 교회에 유입된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이들을 위해 도마 이야기를 첨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만질 수 없게 하셨지만,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만졌다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영적인 부활이라거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신체를 변형하시는 방식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 본래의 육체를 가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들의 신앙을 독려합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수님을 만나 본 적도 없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믿는 이들은 복이 있다는 선포로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요한복음이 21장까지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20장 30-31절에서 요한복음은 마무리됩니다. 21장이 왜 추가되었는지, 누가 추가했는지에 대해서 많은 연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희가 살펴보려는 내용은 21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장 30-31절은 확실하게 요한복음을 끝맺고 있습니다. 이 책에 빠진 내용도 많다는 설명과 함께 이 책을 왜 기록했는지 설명하면서 복음서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 맺음말의 바로 앞 본문은 앞서 말씀드린 도마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주심

도마 이야기가 초대 교회 구성원들의 믿음을 독려하기 위한 이야기라면, 그에 앞서 나타난 오늘 본문은 부활의 의미와 함께 우리가 부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어쩌면 초대 교회를 향한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던 것과 같이 제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복음서의 마지막과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행동을 보이십니다.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신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숨을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셨고 그가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가 생겨난 이후 성령이 하나의 인격체처럼 다뤄지게 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신앙도 성령을 하나의 인격체로 다룹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성령도 그런 형태를 띈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들이 행할 일은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죄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사하라는 명령은 과거 가톨릭에서 면죄부를 팔던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잘못된 길을 걷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만을 강조하는 경우와 누군가의 죄를 지목하는 데에 몰두하는 경우, 쉽게 말해 정죄에만 집중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에만 집중하게 될 때, 신앙은 ‘주세요’만을 말하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해주시고 다 해달라는 신앙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남의 죄를 판단하는 데에만 몰두하게 될 때, 교회는 미움과 증오와 폭력에 휩싸이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두 가지 경우 모두 죄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나의 행함’이 사라져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계속 죄를 지을테니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나를 용서해 달라는 간구만 합니다. 내 생각에 나보다는 저 사람이 더 죄인이니까 저 죄인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이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 자체를 승천을 위한 전 단계 정도로 다루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은 놀라운 이적에 조명을 비추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을 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물론 새로운 사람이 된 제자들 자신이 죄의 길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들이 죄의 길을 걸으며 남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말씀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따라 살아가야 할 삶의 형태입니다. 부활 사건 역시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됨을 이야기합니다.

부활 역시도 제자도에 관한 이야기라면, 성경이 너무나 엄격한 제자의 길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면, 부활 역시도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받아 새롭게 된 이들, 죄의 길을 벗어난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복되다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은 복된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좌절과 슬픔의 길이 아닌 희망과 기쁨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부활 주일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에 동참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길을 걸어가며, 세상의 죄를 씻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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