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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에 대하여 교회는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 카이사레이아의 유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14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4.05.13 04:17

이 원고와 영상은 ‘사이너머’ 연구소에 진행하고 있는 채수일 교수의 ‘기고만장: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입니다. 기독교 고전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영상과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채수일 교수님과 사이너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요? 교회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관계를 유형화한다면, 국가권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형태, 국가권력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는 형태, 혹은 피하거나 무관심으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소극적 형태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기에서부터 일제의 식민지배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도 이런 유형화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국가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승인하고 권력에 영합한 고대 기독교회의 최초의 교회사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한 사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카이사레이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Kaisareia, 263년경-339년)가 그 사람입니다. 그의 또 다른 이름 ‘팜필루스의 에우세비오스’는 ‘팜필루스의 아들 혹은 종’이라는 뜻인데, 그가 존경했던 스승 팜필루스(Pamphilus, 240년-310년)가 그에게 준 이름입니다.

팜필루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4년-311년)와 공동재위자였던 막시미아누스 황제(250년?-310년)의 박해 시기인 310년에 순교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하게 기독교인을 박해한 황제였습니다. 303년 칙령을 발표하여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불허한다고 공표했습니다. 다음 해인 304년에는 기독교인을 고발이 없어도 추적하여 고문할 수 있게 했고, 모든 사람이 로마 신의 제의를 지켜야 했는데,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노역에 처했습니다.

유세비우스 역시 박해기간에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된 것으로 보아 그의 가족이 고위층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260경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가족이 기독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카이사레이아에서 세례를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315년 경(55세) 만장일치로 카이사레이아의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선지자, 제사장, 왕의 ‘삼중직’으로 처음 구분한 신학자로도 알려진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연대기’, ‘콘스탄티누스의 생애(The Life of Constantine)’(1),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 ‘복음의 예비’, ‘복음의 증명’, ‘신현현’(Theophany), ‘마르켈루스 논박서’(Against Marcellus), ‘교회신학에 관하여’(Upon the Church Theology) 등이 있습니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아직까지 ‘교회사’(2), 한 권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는 사도 시대부터 유세비우스가 이 책을 집필한 시대까지의 교회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오래된 역사책입니다. 그는 사도들의 계승, 교회의 주요한 변화, 교회를 혁신한 사람들의 성격, 순교와 적대감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해온 교회를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초대교회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까지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내용은 정확하지 않고, 주로 서방교회 중심으로 역사를 썼고, 유대교와 이단에 대한 태도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참고한 자료들이 많이 소실되어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어쨌든 그의 ‘교회사’는 최초의 교회역사서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아직 한국어로는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입니다. 331년에 완성된 4권으로 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는 비판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일종의 ‘용비어천가’로 평가되고, 유세비우스를 어용(御用) 혹은 궁전(宮殿) 신학자의 전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 카이사레이아의 유세비우스 ⓒGetty Images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처음 본 것은 296년 경 그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통과할 때였다고 합니다. 그 후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자문관이 되어, 콘스탄티누스의 이데올로기, 곧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하나의 교회’ 이데올로기 실현에 충실하게 기여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종식하고 후에 기독교가 국가종교가 되는 길을 닦은 인물입니다. 이른바 ‘콘스탄티누스적 전환’ 이후, 기독교는 억압받던 종교에서 로마 제국의 지배종교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공인한 이유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회심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정치적 동기설’입니다. 어느 경우든 중요한 것은 그의 기독교 공인의 배경에는 그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정적으로 놓여있었다는 것입니다.(3) 기독교가 공인된 국가종교가 됨으로써 교회는 안과 밖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 기독교의 국가종교화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첫째, 역사적 예수가 더 이상 교회를 위한 행동이나 가치의 규범이 아니게 되었습니다.(4) 초대 기독교의 순진성과 함께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혁명적 정신이 상실되었습니다. 점차 초기의 열정과 독특함을 상당히 상실했고, 임박한 재림의 소망을 포기하고 세상에 안주하기 시작한 것이지요.(5)

둘째, 부자와 권력자들이 교회 안에 받아들여짐으로써 부와 재산이 불경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했으나, 새 질서 아래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6)

셋째, 교회는 국가조직을 모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은 궁정에서 살았고, 제국의 행정에 맞먹는 행정 구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을 국가로부터 수당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노예를 소유하거나 사병을 양성하기도 했습니다.(7)

넷째,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교회, 하나의 황제’에 관심을 가진 콘스탄티누스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 적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희생자들은 아리우스파(Arius, 250/6년-336년)였습니다. 교회 내적 문제의 해결에 국가권력의 개입이 교회 측에서 기대되고 또 국가권력 측에서는 개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지요.(8)

다섯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이 기독교 노예들에게 할례 주는 것을 엄격한 처벌규정을 두어 금지했습니다. 유대교로의 개종은 처벌대상이었으나,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훨씬 관용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반유대주의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절기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살해함으로써 신을 모독하고 손을 더럽혔기 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부활절 축제는 적합하지 않다고 거부함으로써 기독교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가 정착되었습니다.(9)

여섯째, 비잔틴 예술과 건축이 개화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제국 궁정의 특색을 드러내는 권세와 부, 특권이 미술과 건축에서 표명되었습니다. 비잔틴 예술과 건축의 개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교회가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예언자적 사회적 비판을 외면하는 ‘종교의 비정치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된 이래, 기독교 역사는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국가종교로서의 제도적 교회의 역사였고, 다른 하나는 묵시문학적 전통에 서서 제도적 교회와 세계의 급진적 변혁을 지향했던, 그러나 제도적 교회로부터 반(反)주류, 이단으로 정죄 받은 비주류의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개입에 의한 파국과 역사의 급진적인 갱신을 희망했고, 하나님의 나라를 폭력적으로 이 지상에 실현시키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교회 갈등은 사실 성서 자체 안에 내재해 있는 서로 다른 하나님 나라 이해에까지 소급되지만, 지금도 있고 또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갈등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정치권력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해주면서 기생하는 종교인은 있었고, 지금도 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미주

(1) Eusebius, The Life of Constantine, Andesite Press, 2017.
(2)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엄성옥 역 (서울: 은성, 2008).
(3) 유스토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엄성옥 번역 (서울: 은성, 2012), 177, 193-197;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이승식 번역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23-26. 참고.
(4) 알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228.
(5) 데이비드 보쉬, ⟪변화하고 있는 선교⟫, 김병길·장훈태 번역 (서울: CLC, 2010), 302.
(6)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229.
(7)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232.
(8) Manfred Jacobs, Das Christentum in der antiken Welt: Von der fruehkatholischen Kirche bis zu Kaiser Konstantin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7), 173-174.
(9) Jacob, Das Christentum in der antiken Welt, 184.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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