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 정연복 편집위원 ⓒ 박지훈/에큐메니안

기원 후 70년 무렵에 쓰인 마가복음은 세 공관복음 중 제일 먼저 기록됐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 탄생 이야기를 보도하는 데 반해,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곧바로 들어간다. 학자들은 이런저런 이유에서 마가복음이 교리와 신학으로 채색되기 이전의 ‘역사적 예수’의 본래 모습에 가장 근접하며 동시에 가장 민중적인 복음서라고 평가한다. 또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마가복음은 1장에서부터 예수의 여러 병 치유 기적들을 총괄 보도하는데(1:21 이하), 민중들의 해방과 인간회복의 염원을 담고 있는 기적 이야기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것에서도 마가복음의 민중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1)이라는 첫마디로 막을 연다. 무슨 뜻인가?

마가복음은 전체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제부터 펼쳐질 예수 이야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 이야기 전체가 바로 복음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등 예수의 생애와 활동의 어느 특정 부분들하고만 관련되는 게 아니고, ‘전체로서의 예수(운동) 이야기’라는 그야말로 폭넓은 관점에서 복음의 의미가 파악되어야 함을 마가복음 저자는 첫머리에서부터 분명히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전체로서의 예수(운동) 이야기’는 단편적 이야기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복음서의 한 장면 한 장면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이 장면들이 모여 드러내는 핵심 주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부분적인 장면들을 소홀히 할 때는 복음서가 벽돌이 엉성히 놓인 집이 되고, 부분에 너무 치우쳐 부분들의 총화가 이루는 주제를 간과할 때는 복음서가 꿰다 만 보석 구슬들이 되고 만다.

그러면 마가복음의 예수(운동)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무엇일까? “때가 다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15)는 구절이 그 질문에 또렷이 답한다.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았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저자는 이 짧은 한마디로 예수(운동) 이야기의 핵심을 전달한다. 그렇다면 회개란 과연 무엇일까? 회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마가에 따르면,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막연히 회개하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회개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어 영혼구원 받아야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역사의 중대한 시점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지금까지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라는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생각하는 진정한 회개는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운동에 동참하는 회개다. 예수처럼 그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는 회개,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따르는 데 장애물이 되는 온갖 기득권을 내던지는 회개,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내 몸처럼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으로서의 회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세로는 회개가 불가능하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참된 회개란 모름지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기 위해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마태 6:25-34).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를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이루어져 가고 있다. 이 성스러운 일에 동참하느냐 등을 돌리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잊지 말라.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과 운명 또한 결정되리라는 것을.

2.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 누가 13:1-5

어떤 사람들이 예수에게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무차별 죽임을 당했다니, 뭔가 끔찍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지난날 이 땅에서도 독재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공권력이 이따금 교회나 성당에 난입해서 폭력을 휘두르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빌라도는 해도 너무했다는 느낌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해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구절들이 복음서에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이 사건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빌라도가 과연 어떤 인물이며 로마의 식민통치가 얼마나 악랄했을지 능히 짐작된다. 그런데 그런 비극적인 사건을 전해들은 예수의 반응이 이채롭다. 예수는 ‘어떻게 그리도 몹쓸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혹은 ‘그런 비극은 우리가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있는 약소국가이기 때문에 당하는 설움이다. 그러니 하루빨리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 사건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풀이한다.

“그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18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에 관해 예수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반응도 없이, 그 대신 실로암 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전혀 엉뚱하게 대화의 주제를 ‘회개’로 이끈다. 오늘 본문은 네 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회개라는 주제를 유달리 강조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마가 2:17)고 보도하는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누가 5:32)고 보도함으로써 ‘회개’라는 주제를 부각시킨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객관적 사실의 보도라기보다는 누가복음 저자의 신학적 관심을 반영하는 창작물일 가능성이 크다.

희생 제사를 드리다가 졸지에 들이닥친 빌라도의 공권력에 무참히 학살당한 사람들. 그리고 실로암 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들. 하나는 다분히 정치적 색채가 깔려 있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부실공사로 말미암은 우연한 죽음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참으로 슬픈 운명의 주인공들이다. 온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이 그런 식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다니. 그런데 예수의 말씀에 담긴 메시지는 그런 비극적인 사건들에 못지 않게 살벌하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라니,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닥칠 운명이란 그리도 끔찍스러운가. 예수의 말씀은 회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일깨우려는 일종의 충격요법 같다. 회개하면 더욱 좋겠지만 회개하지 않고 대충 살아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회개는 삶의 장식품이 아니라 절대 필수조건’임을 뼈아프게 깨우치려는 극약 처방인 것이다.

오늘 본문 앞에서 예수는 군중들에게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누가 12:56)고 꾸짖는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서 예수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한다.(누가 13:6-9) 그렇다면 예수는 ‘이 시대의 뜻’을 바로 인식하고 그 ‘뜻’에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에로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뜻’을 바로 읽고 있는가? 우리는 삶의 모습이 달라질 만큼 충분히 회개했는가? 두려운 물음이다.

3. 초월 경험

나는 예수체험을 했는가? 나의 삶은 예수를 만나 변화되었는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그 무엇이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인가?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무슨 뜻인가? 히틀러의 나치즘 치하에서 기독교 신자의 정체성, 그리고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독일의 예언자적 목사요 탁월한 신학자였던 본회퍼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의 전 존재의 전환이 일어나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이것은 초월 경험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전적인 자유 안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에서 비로소 전지, 전능, 편재가 유래한다. 신앙은 예수의 이런 존재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렇다. 예수는 ‘자신의 전적인 자유 안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삶을 살았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의 그러한 삶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연대하여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사회를 만드는 일에 목숨 바쳐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역사의 서글픈 아이러니다. 예수의 제자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일체의 권력과 제도와 이념에 맞섰던 예수운동의 핵심 인물들은 운동의 지도자인 예수의 일견 무기력한 십자가 죽음에서 그들 앞에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 있는 현실의 두터운 벽을 느끼며 한동안은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했던 지난 세월을 절망과 망연자실 한복판에서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예수를 만나 하늘을 날던 그 꿈같은 세월. 갈릴리의 어중이떠중이 농민이나 뱃사람이나 말단 세리였던 그들이 예수와 만나 불의한 현실에 눈뜨고, 그 현실 너머의 새 세상에 대한 꿈을 키우고, 그 꿈을 하나 둘 예수운동으로 펼치던 고달프면서도 행복했던 날들. 예수를 만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자신들의 영적인 키를 보면서 자랑스러웠던 날들을.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다니며 그에게서 느꼈던 깊은 인상들, 예수의 말씀과 행동들에서 그들이 받았던 가슴 벅찬 감동들, 예수의 여러 하나님 나라 비유들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자유와 사랑과 평등과 정의의 아름다운 인간 세상에 대한 꿈. 이것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마음 한 구석에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그들은 소스라치게 발견했다.

이윽고 그들은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비록 몸은 우리들 곁을 떠났지만 그의 생명사랑·민중 사랑의 고귀한 정신(靈)은 아직도 우리 한가운데 살아 있다! 그 죽음은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했던 자의 죽음, 바로 우리를 위한 죽음이었다! 세상 권력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진리의 목소리를 잠재우려 했지만, 진리는 무덤에 갇힐 수 없다. 예수가 우리의 가슴 깊이 새겨준 생명사랑·민중 사랑의 정신이 망각되지 않는 한, 예수는 결코 죽은 게 아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의 분신이다! 이것이 그들의 예수체험이었다. 부활 체험이었다.

예수가 생명사랑·민중 사랑의 활활 타는 불꽃으로 살고 죽어 따뜻한 인간 세상의 “밀알 하나”(요한 12:24)가 되었듯이, 이제는 우리가 예수의 뜻을 이어 살아야 한다는 “초월 경험”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예수체험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예수의 죽음으로 얻어진 믿음이기에 또한 ‘은총’으로 베풀어진 믿음이기도 했다. 이제 물음은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예수를 만나 ‘전 존재의 전환이 일어나는 초월 경험.’ 나에게는 이런 예수체험이 있는가? ‘자신의 전적인 자유 안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삶을 산 예수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의 이런 존재에 참여하는’ 믿음. 나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는가?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연복  pkom54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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