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 이야기를 생략하고 그 대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요한 13:1-20)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보도한다. 제자들의 존경을 받는 “스승이며 주(主)인”(14절) 예수가 이제는 자신의 죽음으로 작별해야 할 제자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그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는 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모습이 ‘세족식’이라는 전통으로 남아 오늘도 교회에서 이따금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또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15:13-15). 무슨 뜻인가?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주인-종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벗-벗의 수평적 관계라는 말이다. 예수와 자기 사이를 무엇 하나 서로 숨길 게 없는 다정하고 대등한 벗의 관계로 설정할 수 있는 신자라야 진실로 성숙한 신자라는 말이다.

비단 요한복음만이 아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가 10:43-45; 마태 20:26-28)고 말함으로써,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짓누르는 세상 질서와는 반대되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대안적 삶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제자들을 주인에게 딸린 종에 빗대어 말하는 오늘 본문은 얼핏 예수가 몹시 경계했던 주인-종의 엄격한 상하 관계를 강조하는 것 같아 불쾌감을 준다. 어쩌면 하루종일 들판에서 농사를 짓거나 양치는 일을 하고 돌아와서도, 배고픔을 참으며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들고 난 다음에야 밥을 먹을 수 있으며, 주인이 명령한 대로 모든 일을 하고 나서도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종의 마땅한 도리라니, 이건 예수의 평소 가르침과는 전혀 상반되는 게 아닌가.

예수가 누구인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누가 5:30) 자,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누가 7:34) 자, 한마디로 말해 숨막히는 위계질서적 사회 분위기를 거스르는 파격으로 당시의 신분사회를 뒤흔든 민중적 평등주의의 주창자요 실천가가 아닌가? 그런 예수가 똑같은 입으로 주인-종의 신분이 뚜렷이 구별되는 반민주적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다니, 도대체 예수의 진의는 뭘까?

예수가 한 입으로 뜻이 전혀 상반되는 두 말씀을 했을 리가 없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을 풀이함에 있어 예수는 주인이고 제자들은 종을 의미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개인적 차원에서의 상하 질서가 엄격히 구분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제자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자세라는 관점, 즉 ‘운동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운동이 뭔가? 집단적 해방실천의 몸부림이다. 운동이 순조롭게 풀리려면 그 운동에 참여하는 개인들과 그 개인들이 모여 이룬 집단(운동체, 조직) 사이의 관계가 올바로 설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집단을 위해 개인은 얼마든지 희생되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집단은 개인을 존중하되 개인은 기쁜 마음으로 집단의 민주적 규율과 실천에 따르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민중사랑·생명사랑의 보람찬 인생의 길(道)을 깨우쳐 준 위대한 스승이며 또한 나의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늘 동행하는 다정한 벗 예수. 하지만 그 예수에 힘입어, 예수 안에서, 예수를 따르며, 예수와 함께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삶에 헌신하기 위해 내게는 그 얼마나 겸손한 “종‘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인가!

예수의 벗된 하나님 나라의 이름 없는 종, 무명(無名)한 일꾼. 나는 그런 보잘것없는 존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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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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