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바다에서 호령하고 있을 때에도,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에도, 그리고 옥에서 풀려나와 폐허가 된 군진(軍陣)으로 돌아올 때마저도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함선을 만들고 수리하는 사람, 활을 만들고 화약을 만드는 사람, 적의 움직임을 알려오는 사람, 바닷물길을 가르쳐주는 사람, 둔전을 일으키고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군량을 마련하는 사람 … 그는 언제나 사람들로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달 밝은 밤 홀로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는 전화(戰禍)에 떨고 있는 수많은 생령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몇몇 권세가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그의 모습이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군관, 병사 그리고 마을의 고로(古老)와 노복(奴僕)들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운집(雲集) 속에 서 있는 충무공의 모습이야말로 그의 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탁월한 전략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연전연승 불패(不敗)의 신화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군량(軍糧)도 병력(兵力)도 이 풍부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서 있는 우상(偶像)은 사람들을 격려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抑壓)이다." 천재와 위인(偉人)을 부정하는 당신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광화문의 동상 속에 충무공이 없다는 당신의 말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힘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98-99쪽.)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둘 있습니다. 영웅주의 사관과 민중사관입니다. 영웅주의 사관에서는 몇몇 위대한 영웅들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워 역사를 인식하고 해석합니다. 반면에 민중사관에서는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일하는 민중들이야말로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영국의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발전에 있어서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는데, 이 역시 영웅주의 사관의 한 변형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의 고비에서 더러 탁월한 역량을 지닌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겨레의 빛나는 문화유산들 중의 하나인 한글 창제에 있어서의 세종대왕의 역할, 임진왜란 때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활약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지만 마치 세종대왕 혼자서 한글을 창제하고 이순신 혼자서 거북선을 발명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역사인식일까요? 거북선 밑바닥에서 죽어라 노를 저었을 무명의 병사들을 또한 기억하는 게 인간의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요?

사관(史觀)이란 역사의 발전, 다시 말해 물질적 측면에서는 생산력의 증대, 그리고 정신사적 측면에서는 보편적 사람들의 인식의 발전과 더불어 마땅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식이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던 시대에는 영웅주의 사관이 압도적이지만,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힘은 몇몇 영웅들의 천재적인 역량이 아니라 다수의 일하는 민중들의 결집된 역량에서 나온다는 것이 확실해진 시대에는 당연히 민중사관에 입각한 역사인식이 대두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영웅주의 사관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요 신기에 가까운 일입니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국민이나 민중들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를 대하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의 태도에서도 우리는 영웅주의 사관에 찌든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의 해방신앙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에서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나 교인들은 중노동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은 까맣게 잊은 채 모세만을 연상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교인들의 머릿속에 너무도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에도 예수만이 눈에 들어올 뿐 갈릴리 민중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성서는 모름지기 "집단적"인 역사이며 공동체적인 신앙고백인데, 영웅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성서를 읽다 보니 성서의 밑바닥에 흐르는 민중의 아픔과 희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성서는 민주주의가 태동하기 훨씬 이전의 가부장적 시대에 기록되었기에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영웅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는 소위 축자영감설에 입각한 성서해석은 영웅주의 사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빼어난 "해방의 문서들" 중 하나인 성서에는 시대를 앞질러 민중적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구절들 또한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올바른 성서해석을 위해서는 이런 민중적 사관에 따른 본문들로 영웅주의 사관에 기초한 본문들을 비판하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이 점은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에서 너무도 중요하기에 성서에서 구체적인 사례들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은 결코 완전한 성군(聖君)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다윗이 온갖 비열한 짓을 다하여 충직한 군인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몬 다음 그의 아내 바쎄바를 취하는 장면을 길게 보도한 후 맨 끝에 "다윗이 한 이 일이 야훼의 눈에 거슬렸다"(27절)는 해석이 붙는데, 이것은 독재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다윗에 대한 이스라엘 민중들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사무엘하 15장에는 압살롬이 바로 자기 아버지인 다윗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이 상세하게 보도되는데, 이것은 다윗의 통치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바로 뒤이어 16장에서는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치는 다윗에게 "사울의 친척 하나"가 "입에 담지 못할 욕설"(5절)을 퍼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꺼져라! 이 살인자야, 꺼져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사울 일족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놈, 그 원수를 갚으시려고 야훼께서 이 나라를 네 손에서 빼앗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다. 이 살인자야, 네가 이제 죄없는 사람 죽인 죄를 받는 줄이나 알아라"(8절).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 사이에 떠돌았을 유언비어로 생각되는 이 엄청난 욕설에서 우리는 다윗 권력의 정통성에 대한 이스라엘 민중들의 뿌리깊은 의심의 한 자락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의 병적 조사에 화가 난 하느님이 재앙을 내리는 장면이 보도됩니다. 병적 조사란 게 도대체 뭡니까? 침략전쟁에 백성을 총동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총사령관인 요압은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즐겨 하시렵니까?"(3절)하며 병적 조사에 완강히 반대합니다. 우리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구절에서 다윗의 계속되는 침략전쟁에 신물이 난 이스라엘 민중들의 뼈아픈 절규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더욱 준엄합니다. 교인들은 솔로몬을 지혜의 화신인 양 극구 칭찬하지만,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식의 소치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민중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상징인 계약궤를 성전에 모신 후 "야훼께서는 몸소 캄캄한 데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여기에서 사십시오. 제가 주님을 위하여 이 전을 세웠습니다"(왕상8,12~13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본래는 해방신앙인 야훼신앙을 솔로몬이 정통성이 결여된 자기 권력의 지지이념으로 교묘하게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야훼신앙은 고작 지배이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 바로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민중적 예언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양심적인 구약 신학자들의 통일된 의견입니다.

무려 "칠 년"(왕상6,38)에 걸친 성전 건축을 위해 솔로몬이 이스라엘 전국에 내린 "근로소집령"(왕상5,27), 솔로몬이 자신의 왕궁을 짓는 데 무려 "십삼 년"(왕상7,1)이나 걸렸다는 보도, 그 왕궁은 철저히 "강제노역"(왕상9,15)에 의해 건축되었다는 보도, 솔로몬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 축적(왕상10,14~25), 숱한 여인들과 놀아난 솔로몬의 타락(왕상11,1~13), 솔로몬의 폭정에 맞선 여로보암의 반란(왕상11,26~40),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인 르흐보암의 계속되는 폭정과 이로 말미암은 국론의 분열과 남북 이스라엘의 분단(왕상12장) 등에 대한 보도만 놓고 보더라도 영웅주의 사관에 입각한 한국교회의 솔로몬 이해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홀로"의 예수를 생각하는데 이건 참으로 잘못된 예수이해입니다. 예수만을 생각해서는, 혹은 잘해야 예수를 중심에 두고 예수의 민중들은 복음서의 변두리로 내몰아서는 결코 복음서를 바로 읽지 못합니다. 신영복 선생이 수많은 조선의 민중들을 떠나서는 이순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듯이, 민중들을 떠나서는 예수, 보다 정확히는 예수운동의 참된 모습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민중사관으로 복음서를 한 번 읽어보면 알 겁니다. 예수는 "더불어"의 예수, 로마의 식민지배와 헤롯의 독재권력과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삼중의 지배와 억압 아래 수난을 당하는 이스라엘 민중들과 함께 하는 예수, 민중 고난의 현장 한복판의 예수, 민중 예수입니다. "홀로"의 예수, 신격화된 예수, 영웅 예수, 자신만이 하느님나라 운동의 주체로 나서고 수많은 민중들은 그 운동의 수동적 객체로 전락시키는 독재자 예수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가 있는 곳에 민중이 있고 민중이 있는 곳에 예수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채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민중들이 언제나 예수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주제넘게 신격화하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는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人子)(마가2,28)이라고 부릅니다. 이 "인자"라는 표현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지만, 제가 보기에는 참으로 비생산적인 논쟁입니다. 예수의 사후 기독론이 발전하면서 예수에게 이런저런 기독론적 칭호들이 덧붙여진 것이지, 역사적 예수는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신적(神的) 인간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는 그야말로 사람의 아들, 민중의 아들, 목수, 육체노동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요한15,12~15), 겸허한 구도자이지 신출귀몰하는 영웅이나 전능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민중사관에 따른 예수이해는 기독교 신앙의 전통에서 이탈한 "이단"으로 귀결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와 우리를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데서 오는 잘못된 예수이해에서 벗어나 복음서가 보도하는 대로의 올바른 예수이해로 돌아설 뿐입니다. 예수 따로 민중 따로의 영웅주의 예수이해로부터 민중과 함께 하는 민중적 예수이해로 들어설 따름입니다. 이로써 청년 예수가 따뜻한 가슴과 진실한 믿음으로 민중들과 함께 엮어갔던 그 빼어난 "인간적"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다는 실천적 신앙인으로 거듭날 뿐입니다.

"홀로"의 예수이해에서 "더불어"의 예수이해로! 이것은 우리의 참된 신앙과 인생살이에서 몹시 중요합니다. "홀로" 뭔가 큰 일을 이루겠다는 자세는 참으로 반민주적·반공동체적이며 독재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더불어" 살겠다는 겸허한 자세, 나눔과 섬김의 자세, 이 민주적이고 인간적이고 공동체적 자세가 바로 확립될 때에만 우리는 이웃이나 교회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신앙생활이든 운동이든 겸손하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펼쳐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그대의 삶은 그 누구로 둘러싸여 있습니까? 그대의 삶에는 청년 예수처럼 개방적인 친교가 있습니까? 그대는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그대는 이 땅의 민중들이 들려주는 숱한 삶의 사연들에 귀기울이고 있습니까?

나만의 은밀한 공간에 안주하는 고독한 "홀로"의 삶으로부터 역사의 열린 광장에서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적인 "더불어"의 삶으로! 이런 "더불어"의 삶의 품성을 훈련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의 삶, 더 나아가 이 땅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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