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제사선 시각에서 오늘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제언

1. 현장과의 대화 - 현장에서 서로 배우자

<제사선>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의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NCCK)은 자기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복음적인 변혁운동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그를 위한 연합과 협력 운동의 견인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려고 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언제나 현장보다 앞서 나갔고, 현장을 이끄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한국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한국의 에큐메니칼 진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그동안 이런 자기정체성으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에 널려있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 가면서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고 본다. 그러나 20세기 세기말과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와 세계의 상황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더 이상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이 선도적 견인체 역할을 하기에 어려운 사회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제사선>의 입장에서 제언을 하는 게 허용된다면,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장과의 대화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현장에서 서로 배우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왜 현장을 지도하고 이끌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현장에서 배우고 나눌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 왜 현장의 필요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 않고, 현장의 어려움에 공감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대화강화가 아닌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기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교회 전체를 이끌고 가는 견인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를 섬기는 섬김으로 자기정체성을 개혁해야 함을 뜻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정치적인 거래와 협력이 아닌, 보다 깊은 신앙적인 나눔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진정한 에큐메니칼운동은 사회운동도 교회정치운동도 아닌 신앙운동이지 않은가? 신앙운동으로서 사회변혁과 교회변혁운동은 가능하지 않은가? 

2. 의제의 재선정 필요

현장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면 현장을 수용하고 현장과 함께 일하기 어렵다. 어떤 운동이라도 현장의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현장의 간절함과 현실성을 공유하지 못하고, 현장의 토대를 확보하지 못하면 의미 있는 운동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이 점에서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장의 간절하고 절박한 의제를 담아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본다. 현제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의제는 무엇인가? JPIC(정의, 평화, 창조보존)와 그 틀에서 통일운동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의제는 성서적인 토대와 세계교회적인 공감 속에서 확인된 매우 가치 있는 의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제가 지역 교회들과 지역 에큐메니칼 운동의 절박한 의제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야 한다. JPIC와 통일운동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공감하는 교회나 지역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해도,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긴박한 과제로 공감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지역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공동체적인 과제를 감당하기에 온 힘을 쏟게 되어 점차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의제에서 멀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무관심하게 된다고 본다. 하물며 본래부터 JPIC나 통일운동에 마음이 닫혀있거나 관심이 없는 지역교회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접촉점도 없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의식이 없는 교회나 인사라고 매도해 버리고 외면해 버리면서 현장에 견고한 뿌리를 둔 진정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장에 뿌리를 둔 새로운 의제 선정을 서둘러야 하리라고 본다. 기존의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을 전제로 하고 한국 지역에 맞는 의제를 선정하면서 그 실천 우선순위를 정하여 실천해야 하리라고 본다. 각 지역 현장의 긴박한 과제를 찾아내고 공감해야 한다. 공감된 과제를 해결할 방법과 연대를 만들어 내야한다. 다른 지역 현장의 과제와 해결방안을 나누며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제의 근원이 전지구적인 과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공감하고 확산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현장과의 대화와 현실인식의 전환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3. 의제 제안

새로운 의제를 선정하는데 한국교회 현실이 충분히 고려되었으면 한다. 우선 한국교회에 대한 현실인식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오랜 개교회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 재정적인 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전국적으로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제주지역을 보면 재정이 넉넉하여 자립하고 교회의 복음적인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많지 않다. 제주지역의 90%가 넘는 농촌과 도시개척교회와 작은 교회들이 만성적인 재정위기를 가지고 산다. 교회 자체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현실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전국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자기 생존을 염려하는 교회들에게는 JPIC나 통일 운동은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담론으로 보인다. 여기에 한국교회 대부분은 신학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우(右)편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JPIC나 통일운동은 교회가 해서는 안 되는 정치운동으로 이해되고 있을지 모른다. <사대강 살리기 운동>에 서명했다고 해서 담임목사가 교회에서 내쫓기는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현실을 혁파하기 위한 새로운 의제를 먼저 선정해서 실천해야 하리라고 본다. WCC에 참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 주체 중에는 보수적인 가치를 우선시 하는 교회와 그룹도 있는 만큼 그들을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굳이 보수적인 기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WCC 내에서도 교회의 본질을 더 추구하는 <신앙과 직제>운동을 더 많이 참고하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의 긴급한 자기 생존적 과제를 의제로 받아들여 함께 씨름하는 모습이 진정한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제사선>의 그동안의 일천한 경험은 이를 입증하기에 충분하였다고 본다. 지역교회의 절박한 자기생존적 과제를 외면하고서는 어떤 에큐메니칼 운동도 추동력을 갖기가 어려울 것이다.
 
큰 방향으로는 한국교회의 영성 개혁과 제도적 개혁과 하나의 교회를 향한 개혁이 그 의제 범주가 되리라고 본다. 이는 WCC 틀에서 보면 <신앙과 직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다소 소홀히 해온 영역에서 현장의 긴박한 과제와 연결해서 의제와 실천방안을 만들자는 뜻이다. 물론 WCC의 또 하나의 축인 <삶과 봉사>의 의제인 JPIC와 통일 의제도 지역 교회나 지역 에큐메니칼 운동이 실천할 수 있게 만드는 구체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주로 해 오던 일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변환하자는 말이다. 이는 이러한 의제들이 선언적 표명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의제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 때 WCC에서 JPIC 후속 운동으로 JPIC를 더욱 심화시키려고 준비하던 <경제백서>를 새로운 의제 삼아 바닥공동체에서부터 숙성시켜 실천하면서 세계화 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양극화의 극복과 정의로운 경제의 실천은 오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데도 반드시 필요한 의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의제의 선정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되리라고 본다. 이 모든 작업을 아래로부터 에큐메니칼 운동과 위로부터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함께 해야 한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주도는 좋은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이어지기가 어렵다고 본다.

4. 자생도식(自生圖式)의 도출과 교육과 실천

이러한 새로운 의제를 선정하고 실천하면서 일정한 도식(Schema)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WCC의 BEM문서나 JPIC도 한 지역교회공동체에서 시작하여 세계화된 도식 중 하나라고 이해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고난과 성취의 경험으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도식의 밑그림을 세계교회에 내 놓을 수 있다고 본다. 한국교회와 사회는 세계 열강의 힘의 만남(Encounter)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고, 체질화 된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갈등 위에서 살아왔다. 또한 양극화의 심화로 대변되는 천민자본주의적인 폐해를 매일 피부적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으며, 교회가 세속가치에 함몰당하고 있는 현실을 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다종교 사회임에도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모습 또한 흔하지 않는 경험이라고 하겠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러한 전지구적 문제의 총체적인 경험에서 선정된 의제와 그에 따른 복음적인 실천을 신실하고 지속적으로 해 나간다면, 우리 자신의 과제를 감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어느 한 문제로 고통 중에 있는 세계 지역에 소망과 길을 열어 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실천을 통해서 어느 정도 검증된 도식을 세계교회 앞에 내 놓고, 세계교회의 기도와 지혜를 힘입어 새로운 도식을 만들 수 있다면, 온 세계 교회와 세상이 함께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실천을 통하여 검증된 모범적인 방안(도식)은 지속적인 실천과 그 운동의 확산을 위하여 꼭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도식의 일반적인 위험만 넘어설 수 있다면 교육과 실천에 모두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에큐메니칼 공동체의 필수 요소인 공동 목표, 공동 언어, 공동의 삶의 스타일을 형성해 나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II. 맺는 말

제주지역의 자생 에큐메니칼 운동인 <제주사랑선교회>의 시작과 사역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제사선의 시각으로 오늘의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을 평가해 보고, 이에 따른 제언을 붙여 보았다. 오지랖 넓은 이야기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이 현장과 단단한 연대와 결속 속에서 하나님나라 구현을 위해 섬기는 자기정체성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끝)

서성환 목사(사랑하는교회, 제주사랑선교회 초대회장)

이 기사는 『농촌과 목회』제 48호에도 실렸습니다.

 

서성환 목사  ssh326@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