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1일 토요일, 맑음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 테지만 보스코는 키가 아주 작다. 그런데 자기가 작다고 느낀 일이 없다는 게 나에게는 퍽 신기하다. “여보, 당신 키 작은 콤플렉스 안 느껴?” “아니.” “왜 안 느껴?” “초.중.고등학교 땐 언제나 출석번호 1번이어서 ‘2번 좀 해 봤으면 좋겠다.’ 정도였어. 그런데 아무도 내가 키 작은 걸 시비 안했고 키 작다고 불이익을 당한 일도 없고...” 아마도 살레시안들은 사람의 장점을 칭찬해 주면서 단점을 극복하는 교육을 베풀어 주었나보다. 보스코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것을 교회로부터 받았고 살레시오 신부님들을 통해서 받았다는 얘기는 그가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누누이 얘기해 왔다.

그가 전국가톨릭교수회 회장을 할 때였다. 광주대교구 대표로 전남대에서 올라온 어느 교수님이 자기가 어떻게 입교했는지를 그에게 얘기하더란다. “날마다 통근버스를 타고 전남대로 출근하는데 살레시오학교 교문 앞을 지났죠. 버스에서 내다보면 외국인 사제 한 분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학생마다 무슨 얘긴가를 주고받고 어깨를 다독여주고... ‘아아~ 저게 참교육인데...’ 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내 발로 성당을 찾아가 입교를 했답니다.”

그리고 당시 학교에 다녔던 졸업생들은 1300명 학생들 이름을 다 외워 교문에서 만날 적마다 이름을 불러준 그 신부님을 지금까지도 결코 잊지 못한다. 보스코가 재직한 서강대 철학과에 중고등학교 후배로 노장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들어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후배 교수와 나눈 대화에서 “유치원부터 북경대학 박사학위까지 그 오랜 학교 공부 중에 중학교 3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단다. 살레시오 중학교 3년을 가리키는 얘기였다. 그 까닭을 보스코가 묻자 “그땐 선생님들에게 내가 사랑받는 느낌을 가졌으니까요.”라고 대답하더란다. 자기가 받은 살레시안 교육을 이보다 더 멋있게 발설할 수가 있을까? 그가 다니던 3년간 교문을 지키던 분이 바로 원선오 신부님이시다. 지금 한국을 방문 중이시라는데 보스코는 19일에 그분을 뵙고 인사드리기로 맘먹은 참이다.
일본에서 선교하다 한국으로 오셔서 20여년을 지내신 뒤 한국은 그래도 살만 하다면서 더 가난한 아프리카로 떠나실 적의 장면을 보스코는 잊지 못한다. 그분의 손에는 가방도 아닌 우리 보자기로 싼 조그만 보퉁이가 하나 들려 있었단다. 그 속에는 수단, 성무일도서, 내복 한 벌이 들어 있었단다! 청소년들에 대한 그 큰 사랑, 그 철저한 가난이 그분을 한번이라도 뵌 사람들에게는 깊은 감동을 남긴단다.

▲ 재작년(2012.5.19) 광주에서 뵌 원신부님

30년 내전을 치르고 있는 수단에 학교를 지으러 몇 해 전 모금차 한국에 오셨을 적 일이다. 광주에서 보스코를 만나자마자 끌어안아 주시면서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를 흥얼거리시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 많은 노래를 지으셨으면서도 엠마우스가 당신에게는 그만큼 소중한 곡인가보다. 보스코가 지은 가사에 신부님이 곡을 붙이신 노래여서 하는 말이다.

오늘 점심 무렵 미루씨 남편 이사야씨가 산청에서 어성초를 잔득 캐서 차로 싣고 왔다. 보스코가 준비차 오전 내내 밭두렁 세 곳을 괭이질해 둔 터여서 두 남자가 함께 어성초를 심었다. 다 심은 다음에 보니 보스코는 철학교수답게 그야말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비구상적으로(한 마디로 엉성하게) 약초를 심었고, 이사야씨는 이공계 인사답게 체계적으로 가지런하게 예쁘게 심어놓았다. 두 사람을 밭두렁에 세우고 “누가 심었게?” 라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틀릴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게다.

오후 3시 두 남자는 실상사 “지리산 예술프로젝트” 개막행사에 참석하러 갔다. 나는 월요일에 집 나갈 여자답게 텃밭에 유황 약초를 뿌리는 일부터 시작해서 집안 청소 냉장고 정리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실상사에서 저녁까지 먹고 돌아온 보스코는 만나는 사람마다 왜 부인이 안 오셨느냐고 묻더라고 전한다. 다른 차편이 있으면 이제는 나 없이도 간간이 나들이를 하지만 그런 인사가 성가시니 꼭 같이 가야겠다는 의도를 담은 전달사항이다.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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