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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 복수의 정치학, 그리고 거래되는 고통숭고한 이데올로기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김진호 | 승인 2005.08.20 00:00

복수심

복수심에 불타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윤간당한 아내의 몸둥아리를 토막내어 이스라엘 전 부족에게 보냈다. 응징을 명분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많은 이들이 학살당했고, 많은 이들의 운명이 계획에 없던 폭력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한 잔혹한 제노사이드(인종청소)에 관한 개요다.

   
▲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 장면
도대체 그 이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떤 내막이 있기에 한 남자의 복수심에 전 이스라엘이 들고 일어나 대대적인 학살극을 펼치는 데에 이르게 되었을까?
둘째 아내가 남편과 다툰 뒤 친정으로 가버리는 데서 얘기는 시작된다. 기혼녀가 남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친정으로 갔다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선 흔치 않은 일이다.

천년쯤 뒤, 그러니까 예수 시대에, 안티파스 왕의 부인은 바람난 남편 소식을 듣자 짐을 싸들고 몰래 친정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웃나라 왕녀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남편이나 시아버지에 의해 요절날 일이다.

남편은 아내의 친정까지 가서 그녀를 되찾아 온다. 사랑일까 아니면 자기 소유물에 대한 집착일까? 아무튼 장인의 만류에 며칠을 더 머물다 냉정하게 뿌리치고 출발했다. 늦은 시각에 떠난 탓에 그날 밤을 한 마을에서 유숙해야 했다. 바로 그곳이 베냐민 부족의 땅 ‘기브아’였다.

마을 장로 한 사람이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하지만 일단의 ‘청년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낯선 방문객을 불러내라고, 성적인 야유를 해가며 위협을 가한다. 텍스트는 그들을 ‘벨리알의 아들들’, 즉 ‘악마의 자식들’이라는 부정적인 명칭으로 부르는데, 이들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문뜩 마을에 찾아온 이 ‘불청객’을 불편해하는 이들임은 분명하다.

이 소동은 뭔가 과장이 있어 보인다. 집주인은 이 남자 대신 자기 딸을 데려가라고 한다. 우연한 방문인데도 주인은 단순한 방문객 이상인 사람처럼 적극적으로 그를 보호한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길래...

복수는 복수를 낳고...

남자가 자기 아내를 내주고 서야 그 밤의 사태는 진정이 됐고, 남자는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는 저들에게 밤새도록 윤간당한다. 그의 아내가 대체물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악마의 자식들’의 위협 목적은 동성애적인 것이 아니라 낯선 방문객에 대한 모독이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아침에 잠에서 깬 남편은 밤새도록 농락당하다 문지방을 부여잡고 쓰러진 아내를 보았다.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아내를 나귀에 얹어 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몰래 도주한 것인지 조롱을 받으며 비굴하게 빠져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집에 돌아온 그는 복수심에 불타, 온 이스라엘 부족에게 충격적인 방식으로 호소한다.

   
▲ 오사마 빈 라덴
다시 한 번 이야기는 과장된 상황을 보여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 이스라엘이 들고 일어나 기브아 마을을 포함한 베냐민 부족 전체를 공격한다. 연합군의 명분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악’을 뿌리뽑겠다”는 것이다. 베냐민 부족은 저들이 말하는 ‘악마의 자식들’을 내놓길 거절했고, 이는 부족 전체를 향한 연합군의 전쟁을 정당화시킨다.

약간의 공방이 있었지만 얼마 안가서 연합군은 적을 닥치는 대로 살상했다. 애초부터 목표는 기브아가 아니었다는 듯이 말이다.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있는 청년들은 일부 살아남았지만, 여성이나 노약자는 죽임을 면치 못했다.

이젠 전후 복구 차례다. 살아남은 베냐민 청년들을 위한 연합군의 ‘배려’가 이어진다. 얼마 전까지 복수심에 불타 있던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이 부족이 몰락할까봐, 생존자에게 아내를 만들어주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연합군에 참여하지 않았던 ‘야베스길르앗 족속’을 몰살시키고, 일부 여자들을 납치하여 베냐민의 생존자들에게 ‘선사’한다. 허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이번에는 인근 지역 성소인 ‘실로’에서 축제에 참여한 여인들을 베냐민의 청년들이 닥치는 대로 납치하도록 허락한다.

에프라임 부족은 이스라엘 부족 연합의 헤게모니 세력이었다

언뜻 납득할 수 없는 이 과장된 이야기의 실마리는 복수심에 불탄 남자가 ‘에프라임 부족 성소에서 일하는 레위인’이라는 정보에서 풀리기 시작한다. 에프라임 부족은 이스라엘 부족 연합의 헤게모니 세력이다. 이 연합은 인근 왕국들로부터 팔레스틴 동부 산악 지역의 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지역 방어 결속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연합이 깨지면, 저들의 군대에 의해 약탈당할 것이고 많은 이들이 노예로 팔려갈 것이다. 연합은 부족들의 생존을 위해 지켜져야 한다.

또한 연합은 군주제 사회로의 이행을 막기 위한 결속체다. 당시 인근 서부 평야의 군주국들은 모두 군소국들이었다. 원시적인 사회에서 왕이 모든 것을 독점할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한정적이었고, 반면 역사적이고 사회생태학적인 요인들로 인해 군주제가 발전하지 못했던 산악지역에서 우연히 형성된 ‘다른 제도적 길’인 부족 연합은 인근 왕들의 군대를 막아낼 수 있었다. 아무튼 ‘반군주제로의 길’은 부족간, 씨족간, 가문간의 평등한 연합의 이상을 통해 지켜지고 있었다.

한데 문제는 인근 군주국 가운데서 가끔씩 꽤나 강한 세력이 등장한다는 점이고, 반면 부족 연합은 대체로 견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등장한 ‘영웅’들은 군주제로의 대중적 열망을 불태웠다. 이런 상황에서 헤게모니 부족인 에프라임의 장로들은 다른 부족 출신 영웅들의 욕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합의 이상은, 적어도 그들의 시각에선, 다른 무엇보다 숭고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부족들은 믿을 수 없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마치 고립된 요새에 외롭게 갇혀있다는 강박증을 낳았다. 그리고 그것은 여타 부족들에 대한 신경증적 간섭으로 이어졌다.

베냐민 부족의 강한 전투력에 에프라임의 지도자들은 예민해 있었다. 필경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베냐민 부족의 장로들은 에프라임을 자극하기 않으려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부족 연합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주역인 에프라임 성소의 사제가 우연하게 베냐민의 마을에서 유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행동주의적 청년들은 달랐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에프라임의 패권 의식에 불만이 팽배해 있던 차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의 거들먹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숭고한 이데올로기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한편 남편에게 끌려가던 레위인의 아내는 시댁에서 자기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기회만 닫는다면 도망했겠지만, 홀로 떠도는 여인이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날 밤엔 남편을 모욕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에게 날이 새도록 당했다. 그토록 남편에게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선 남편만이 유일한 보호자였다.

겨우겨우 기어 문지방을 붙잡은 그녀는 죽은 듯 쓰러졌다. 남편은 기절했거나 혹은 죽은 여자를 치료해줄 생각도 장례를 치러줄 생각도 아예 없었다. 그에겐 단지 자신의 치욕스런 그날의 기억만이 뼈아프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의 선동은 어렵지 않게 응징을 위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은 베냐민 부족 자체의 위험을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수행된다. 에프라임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연합의 안보를 위한) 예방 전쟁이었다. 그 전쟁이 성공했을 때, 즉 에프라임의 헤게모니에 의한 연합이 확고하다는 게 분명해졌을 때, 비로소 베냐민은 연합의 일원으로 남아 있는 게 허락된다. 전후 복구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것은 베냐민을 복원하기 위해 다른 희생자를 필요로 했다.

   
▲ 미군의 포로 학대
숭고한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지켜냈고 또 많은 이들을 위기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숭고함의 내적 위기는 테러리즘으로 나타났다. 이는 응징을 위한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응징과 ‘복수’를 통해서 연합은 지켜졌고, 이데올로기의 ‘숭고함’은 지속될 수 있었다. 한데 이런 ‘복수의 정치학’은 언제나 희생자의 침묵 위에서 정당화된다.

복수를 위한 희생양

"구약성서"의 「판관기」 마지막 부분에 실린 이 이야기는 ‘복수의 정치학’에 관한 하나의 시사적인 교훈을 남긴다. 우선 복수는 사사로운 원한과 집합적이고 공적인 위기의식이 결합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복수의 행위는 사적인 앙갚음인 동시에 공적 응징의 차원에서의 정당성의 게임이다. 그리고 쌍방의 폭력은 엉뚱한 제3자(희생양)에게 특히 가혹하다. 가혹할수록 희생양의 존재는 복수를 꿈꾸는 주체들에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희생양’은 복수를 위한 대체물이며 거래물이다. 또한 희생양은 침묵해야 한다. 희생양 자신의 고통은 은폐되는 반면, 그 고통의 소리는 복수를 선택한 주체의 분노로서 번역된다. 혹은 복수의 정치를 수습하기 위한 관용의 상징으로 소비됨으로써 은폐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 나의 관심은 바로 희생양의 강요당한 침묵의 언어에 있다. 특히 뒤에서 좀 더 언급하겠지만, 테러리즘은 그러한 침묵의 메커니즘의 전략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런 점에서 복수의 정치학은 테러리즘을 통해서 업그레이드된다. 또 역설적이게도 비정상적이고 비제도적인 폭력의 한 형태인 테러리즘이 정상적이고 제도화된 세계의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그 사회들의 각 행위자들의 욕구체계를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아브 그라브의 수인(囚人)들에서 김선일로 이어지는, 이라크를 진원지로 하는 복수의 정치, 희생양에 대한 그 난무하는 폭력적 언어의 향연 속에서 나는 국가들에 의해, 시민사회에 의해, 매스미디어에 의해, 그리고 나/우리 자신에 의해 소비되는 희생양의 강요당한 침묵의 언어 혹은 변조된 가해자의 언어를 들춰내 보고 싶은 것이다. 그 희생양의 텍스트들은 테러리즘을 통해 ‘고통이 어떻게 (우리 주위에서) 거래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테러리즘의 공모자인 나/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 형성의 의제는 복수와 폭력의 제도화에 있었다

이 「판관기」의 복수극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18,1)로 시작해서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21,25)로 끝맺는다. 즉 전체 이야기를 왕이 없던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어처구니없는 야만적 이야기로 처리한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법제사가 보여주듯, 복수와 폭력의 제도화가 국가 형성의 주된 의제임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사회 체제들은 폭력을 제도화함으로써 그 체제 위협적 성격을 순화하고자 했다. 나아가 국가간, 체제간 관계 또한 폭력의 제도화를 지향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은 복수와 폭력의 소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정당한 복수/폭력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경험적 실체로 구성해 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복수와 폭력의 공포로부터 사람 혹은 집단을 해방시키는 효과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폭력이 에프라임 부족을 위해 일하는 레위인이 아니라 그의 둘째부인에게 가해진다거나, 그것의 응징이 그 일을 수행한 ‘벨리알의 아들들’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부족 전체, 즉 헤게모니 세력인 에프라임 부족에 의해 부족연합의 질서를 흐트러뜨릴 위험이 있다고 판정된 베냐민 족속 전체에게 가해진 것처럼, 테러가 엉뚱한 제3자(들)를 향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복수의 행위자가 표적을 무작위적으로 선택한 것이든 상징적 대체물로 전화될 수 있는 대상으로 선정한 것이든 간에, 표적이 된 희생양의 입장에서 그것은 뜬금없는 불행이다. 바로 이러한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의 공포를 해소시키는 데 복수와 폭력의 제도화는 중요하다.

한편 폭력의 제도화의 관점에서 ‘테러’는 제도화되지 않은 폭력의 한 두드러진 양상에 속한다. 즉 어떤 복수 혹은 폭력 행위를 테러라고 규정하는 사회 체제는 그것을 ‘정당하지 않은 폭력’이라고 간주한다. 개인간, 집단간 나아가 국가간의 관계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복수와 폭력에 대한 평가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은 그런 행위를 규정하는 데 있어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테러리스트는 동시에 다른 한편의 시각에선 자유투사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어떤 행위를 테러라고 이름 짓는 문제는 대립 쌍방간의 폭력의 정당성에 관한 ‘정치적 정당성’을 누가 더 누리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정당하지 않은 폭력일지라도 지배집단이든 도전집단이든 그것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것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 게임에서 그것이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테러가, 제도화의 특징인 수단의 정당성보다는, 그 결과 혹은 효과에 더욱 의존하는 폭력의 유형이라는 정의적 설명과 맞물린다. 레이몽 아롱의 시사처럼, 복수 그 자체보다는 복수의 정치적 효과를 증폭시키는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즉 테러는 그 폭력의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 ‘의미의 잉여를 과도하게 발생’시킨다.

테러는 희생자 고통의 이미지 극대화를 통해 완성된다

일단 테러가 발생하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다양한 행위자들은 온통 관심이 테러에 집중하게 되고, 사적이든 공적이든 그들의 사고, 판단력, 행위 등이 테러가 의미화할 수 있는 차원에 구속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 속에 실재하는 수많은 폭력들 속에서 이러저러하게 상처받은 대중의 숨겨진 원한이, 테러리즘이 의제화하고자 하는 갈등의 이분법적 틀 속에서 폭발하곤 한다.

요컨대 테러리스트는 테러 이후의 상황 전개에서 거시적으로 ‘해석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찰머스 존슨이 사회적 혁명이 가능하게 되는 배경으로 촉진제적 요소를 강조할 때, 테러가 바로 이러한 촉진제적 요소의 가장 핵심일 수 있는 것은, 테러의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다.

이것은 테러의 수행이 희생자의 고통을 충격적으로 이미지화할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테러리스트와 그 적대자, 나아가 그 정치적 게임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모두에게 희생자의 절규하는 신음은 행위자 각자의 정치적 욕구를 위해 거래되는 썩 좋은 상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자의 고통의 감각적 이미지는 수많은 이미지로 복제된다. 각 행위자들의 전략적 혹은 무의식적 욕구를 위해 재현된 이미지다.

이때 희생자의 절규하는 고통의 소리는 더 이상의 그(녀) 자신의 소리가 아니다. 토막난 레위인의 둘째부인의 몸둥아리는 그녀 자신의 고통을 나타내기보다는 레위인의 상처난 자존심, 나아가 에프라임 부족이나 전 이스라엘의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소리로 변조되며, 악의 축을 제거해야 한다는 거룩한 전쟁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신의 목소리로 성화되었다.

이를 위해 결국 그녀는 침묵해야 한다. 몸둥이가 갈가리 찢기는 절망적인 고통을 내지를 때조차도 ‘웅대하고 신성한 가캄를 위해 침묵해야 한다. 그 침묵의 소리를 세상은 수많은 소리로 더빙해서 재현할 것이다. 이것이 테러의 정치학, 테러로 표상되는 복수의 정치학인 것이다.

관타나모의 기억, 그 대중의 보신욕망

아부 그라브 수용소의 포로학대 사건과 김선일 사건도 그랬다. 이 둘은 각각 미군병사들과 이슬람 전사들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리즘이었다. 이들은 상대방을 악마적 존재로 보면서 서로를 증오하고 있고, 이 증오를 한편은 민주주의, 다른 한편은 신의 뜻을 이유 삼아 가학적으로 표현했다. 자기 식의 ‘숭고한 가캄와 연루시키면서 그들은 사적인 복수심과 공적 정의를 연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오는 충격적인 영상을 통해 표현되었다.

   
▲ 고 김선일 씨
물론 이 테러들은 ‘잘 기획된’ 복수의 정치학에 포섭되어 있다. 양자는 세계가 허용하는 폭력 사용의 규칙(제도화된 폭력)을 고의로 위반하여 희생자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극화시킴으로써, 그 의미의 잉여를 도모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의도한 대로 되었든 아니든, 다양한 방식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 양식에 개입해 들어갔다.

그것은 일종의 혐오상품이다. 잔인한 도살과 육질의 적나라함이 효능의 신화를 낳고 그것이 소비를 촉진시키듯, 테러리스트들이 시장에 내 놓은 희생양의 충격적 고통을 까발리는 이 혐오상품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열광적으로 소비되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위기의식을 타자의 신체를 훼손하고 그 훼손된 신체를 먹어치움으로써 만회하려는 이른바 ‘보신욕망’처럼, 국민 혹은 시민의 보신욕구는 희생양의 훼손된 육체를 소비한다.

테러리즘의 욕망의 정치학이다. 아부 그라브와 김선일, 이 두 사건의 의미론적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관타나모’는 미국의 국민 혹은 시민의 보신욕망의 정치학이 미국 정부의 테러리즘과 어떻게 공모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어퓨굿맨>(A Few Good Man)에서 관타나모 기지 사령관 잭 니콜슨은 자신을 기소하려는 톰 쿠루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진리를 감당하지 못한다.” 영화 에서 ‘공동경비구역(JSA)’을 “진실을 은폐함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라고 표현한 것과 부합하는 말이다. 즉 한국인에게 공동경비구역 혹은 DMZ이 그렇듯이, 관타나모는 미국인에게 바로 그런 ‘예외공간’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관타나모에 수감된 ‘죄수들’의 범례적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국민/시민 자신에게 다가온 “예기치 않은 긴급사태”의 예감,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시민사회라는 역사의 육체가 벌거벗은 무법상태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관타나모라는 예외공간을 설치하도록 허용하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세상이 온통 ‘적’으로 포위되어 있다는 위기의식, 자칫하면 자신들이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이 산화해버릴지 모른다는 국민/시민의 예감된 공포감이 그 배후에 있다.

모든 곳에 편만한, 그래서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특정한 이를 ‘모든 적’의 상징으로 환치시켜버리고 그들에게, 나다나엘 호손의 소설 "주홍글자"를 연상시키는 주황색 유니폼을 입혔다. 혐오의 대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재앙을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것을 액땜하는 존재다. 요컨대 그들은 알게 모르게 저질렀을 수 있는 자기들의 죄악들을 상징적으로 대리하는 존재인 것이다. 기독교적 대속(代贖) 제물, 바로 그것이다.

한데 이러한 혐오와 구원의 역설적 조합, 혐오적일수록 더욱 소비적인 포스트모던적 결합은 국가나 국민/시민만의 소비 성향이 아니다. 후기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존재론적 위기를 극도로 심화시켰다. 가족, 직장, 그 밖의 공적 사적 네트워크로부터 퇴출될 가능성이 극도로 높아진 세상, 자기 자신이 벌거벗겨진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개개인의 존재론적 위기는 개개인을 탐욕스런 혐오식품의 소비자로 만든다. 불행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고. 누가 가해자인지도 모르는 상황, 그 속에서 개인의 보신욕망은 테러리즘의 예외공간을 필요로 한다. 복수의 정치를 실현하고, 또한 대속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공간 말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매스미디어는 국가와 국민, 시민만이 아닌 개별화된 대중에게 이러한 공간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데 효과적인 매체다. 나아가 인터넷과 같은 쌍방향 매체를 통해서 개별화된 대중은 자신의 보신욕망을 테러의 예외공간 속에서 개걸스럽게 소비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공범자

2002년 9월 22일, 자크 데리다는 아도르노 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9.11의 희생자에게 건네는 나의 무조건적 연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리 높여 말해야겠다. 이 범죄에 관해 나는 어느 누구도 정치적으로 무죄라고 믿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아부 그라브의 수인들이나 김선일에 대하여도 전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다만 뭘 하든 우리 자신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범자로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사고와 행위 구조, 나아가 정치적 전략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을, 나/우리 자신 또한 가담되어 있는 테러리즘의 현장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김진호  kjh5594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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