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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범죄<이적의 민통선 예수 13>
이적 목사 | 승인 2015.03.15 11:45

김포시 민통선안에서 민통선평화교회를 개척해 18년간 목회를 해온 이적 목사의 자전적 성격의 에세이 <민통선 예수>를 매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나는 어린 인권운동가였다. 인권운동에 대한 기초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실수 중에 정말 하지 말아야 했을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은 성과는 없고 젊음을 소모 하는 결과만 나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말 했다던가 나는 실수함으로써 성장하였노라고, 어쩌면 나 역시 실수를 통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생적인 민족문학주의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첫 번 징역을 살고난 뒤 나는 삼청교육대투쟁위원회 성격의 삼청규명동지회를 결성했다. 서울을 오르락 거리며 동지를 규합 했고 자금 모금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첫 번째 혼자서 시도했던 삼청폭로 미수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첫째는 내가 명망가가 아니어서 더욱 그랬을테고 재정, 인맥, 모든 부분에 있어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어서 믿음이 가지 않은 원인도 컸을 터였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학맥도 인맥도 돈도 명예도 심지어는 애인 한명도 없는 그야말로 빈털터리 중의 빈털터리 상건달 이었다. 그 주제에 삼청교육대나 폭로한답시고 밤낮을 쫓아다니고 있었으니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쩌면 허황된 정신병자 취급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모우고 열심히 이삿짐 나르기도 계속하여 나는 당시 상당한 성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벌써 소개받은 사람만 하여도 20여명이나 되었고 그들 중에는 노동운동가도 있었으며 제법 말 깨나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인원수 20명 가지고는 삼청을 진상규명하는 일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적어도 백 명 이상은 모여야 집회도 하고 회비도 거출할 수도 있고 제법 조직다운 틀을 갖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느꼈다. 사람부족, 돈부족, 세력부족 이라더니 마치 내가 그 모양 그 꼴이 아니던가? 어쨌든 나는 인권운동가 흉내를 어설프게 내면서 동지회를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미 백성(국민)들에게는 대통령으로서 완전한 자리매김을 받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용서 잘 하는 민족이기도 했으나 정치에 무딘 민족이어서 전두환은 그 점을 백번 활용 하는 것 같았고 또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광주학살이나 삼청학살 따위는 담 넘어 남의 집 일 따위로 생각하는 우리 민족들의 특성 때문에 전두환 군사정권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다. 또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기 위한 우민(愚民)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즉 프로야구단을 만들어 중요한 야당정치 행사나 재야운동 단체가 집회라도 가질라치면 그들은 프로야구 경기를 열어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봉쇄하려 들었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의 전 종목을 다 동원하여 스포츠와 스포츠인들을 권력유지에 이용해 먹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대통령을 뽑는 선거인단 투표소조차도 경기장에서 치를 정도였다. 그래서 눈뜬 지식인들은 전두환을 일러 체육관 대통령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그즈음에 나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마음도 약간 안정이 되고 정신적 여유를 찾을 수 있어 작품쓰기에 열중했다. 물론 문인협회 계열에서 즐겨 쓰던 소위 자연주의 순수시가 아니라 사회 참여형 순수시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쓴 작품들이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시기를 맞고 있었다. 나는 먼저 삼청교육대를 연작형태의 시로 만들기 시작했다. 즉 체포당할 때의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배경이라든가 잡혀가는 사람들의 갖가지 형태라든가 또한 전두환 정권이 삼청교육대를 만든 배경, 시행당시의 과정, 폭압적 인권유린 등을 직유법을 써서 절규형의 작법으로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일종의 연작시였다. 연작시라는 것은 수십 편 수백편의 시를  이어서 쓰는 형태의 시를 말한다. 나는 이 연작시를 통하여 예술적 기법 이라든가 문학적 수식어는 최대한 절제해가며 삼청인권유린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시의 형태를 빌린 글이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는 시 이기기도 했다. 그중 제일 첫 번째 썼던 시가 부제 <안개 속으로>라는 시였다.

<삼청교육대 1>
안개 속으로

서러움일랑 묻지 말게
가도 가도 찬 새벽길
내 조국이었음에도
발자국 소리에도 두려워하는
내 어머니
어. 머. 니

살아서 뜨거운 이마 위로
군홧발 날아다닐 때
살아있음보다 죽음을 부러워할 때
피에 얼룩진 비가 내림을 보았는가?

무자비한 난타와
무자비한 유린과
죽어 자빠진 시체들의 원한에 찬 소리를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들어나 보았는가?
벌겋게 눈을 뜬 채로 시궁창 물을
벌컥 벌컥 마시다 개머리판에 맞아
죽어나자빠진
주검에조차 군화발을 가하던
젊은 하사는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홀로 있어도 두렵고
둘이 있어도 끔찍한
팔십년도
팔십년도
원한의 팔십년도
피의 역사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Ⅰ전문(全文)>

후에 이 시(詩)는 내 등단 작품의 대표작이 되며 이시는 전국 대학가의 대자보나 유인물로 만들어져 뿌려졌던 유명한 시가 되었다. 물론 처음 쓸 당시에는 이 시가 그렇게 유명한 시가 될 줄은 몰랐고  이 시로 인하여 삼청교육대를 폭로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 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쉽게 말하자면 전두환 정권의 최대 약점이었던 광주학살과 삼청학살이라는 아킬레스건 중에 삼청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화약고의 심지 역할을 한 최초의 폭로시였다.
 
특히 지식인 계층인 민족운동진영의 문인들에게 시를 통하여 폭로되었으니 이 시가 갖는 화약고 역할은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어쨌든 이 시 외에도 연작시 1편에서 약 50편까지 썼으니 그 시를 전부 발표하는 날에는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줄 시한폭탄성 경고문이기도 했다.

실제 이 시가 발표된 「민족문학」지는 나중에 안기부에 의하여 압수 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문예지를 압수할 정도로 이 정권은 자신들의 도덕적 취약성과 삼청교육대의 폭로가 그 만큼 두려웠던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어쨌든 당시 나는 열심히 시를 쓰고 있었고 삼청교육대 폭로에 미쳐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삼청규명동지회 사무실을 부산 초량동 친구 사무실 한 귀퉁이를 빌려 운영하기 시작했다. 제법 인권단체 사무실답게 전화도 놓여 있었고 회원들 명단까지 확보해 놓고 있었다. 물론 위험한 수준인, 간판까지는 달아놓지는 못하였다.

당시, 영도에 사는 최동수 라는 피해자가 나와 한 부대에 있었던 사람임을 알고 나는 그와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는 내가 있었던 부대의 조교따까리(조교 수발 드는 임무)노릇을 했는데 수감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감독하는 임무까지 맡아 수위 밀정꾼 노릇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 만나니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있는 듯 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이형, 나도 이제 사람답게 살고 싶소. 이형 일을 돕게 해주시오.> 하고 제법 당당하게 나를 돕겠노라고 포부를 밝혔다. 나는 그의 당찬 자신감에 매우 흡족해했다. 당시로서는 내게 돕겠노라고 선뜻 나서주는 사람이 없었던 때였으므로 나는 최동수의 출현에 도리어 고맙고 감사하기까지 했다. 나는 최동수와 함께 삼청동지회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초량동사무실을 중심으로 삼청피해자들이 많이 몰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독이며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무실에 들러 동지회 사무실을 잘 이끌어나갔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내게 사무실 한 귀퉁이를 빌려준 고등학교 동창 녀석의 얼굴 색깔이 차츰 변하기 시작함을 나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때인가부터 변하기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을 어렴풋이 감지한 것은 그가 내게 자기 불만을 털어놓기 이틀 전에서야 처음으로 친구의 변화를 읽고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너, 아무리 봐도 뜬 구름을 쫒는것같애, 지금이 어떤 시긴데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려고 해? 자넨 감옥살이가 무슨 자랑인가 보는데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러다간 또 감옥살이 길로 갈지도 모르지, 관두는게 좋을 것 같아. 솔직히 자네하고 어울려 다니는 최동수라는 그 친구도 웬지 싫어, 눈빛도 싫고… 그런 친구들이 내 사무실에 들락거리는 것이 꺼림칙 하단 말야‥>
동창친구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다른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주장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한 달만 기다려주게,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길테니까….>그는 내가 딱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다음날부터 사무실에서 만나면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며 나는 나의 불확실한 미래를 내 스스로가 담보 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서글픔만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땐, 나는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두고 보아라 꼭, 해 낼테니까. 꼭 해낸다….>그것은 오기였다. 세상이 내게 보내는 그 불신만큼이나 나는 차츰 오기 투성이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슴을 불태웠다. 동창 녀석은 나로 인하여 자신이 피해를 당하지나 않는가 하는 불안감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동창 녀석은 내게 전혀 말을 걸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녁식사나 한 끼 하자며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그가 하자는 대로 저녁 밥자리에 힘없이 불려나갔다. 그는 저녁식사와 함께 반주(술)를 곁들였다. 몇 잔의 술을 혼자서 몇 차례 퍼마시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쯤 내게 독백하듯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하지만 말야, 나도 인간이야, 겁난단 말이야, 자네는 자주 감옥에 갔기 때문에 겁이 없는지 몰라도 나는 자네로 인하여 감옥에 까지는 가고 싶지 않거든. 자네 같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내가 꼭 역적들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동창이 하는 일을 돕는다는 명분이 있긴 하지만 도대체 동창이 하는 일을 믿을 수가 없단 말야. 우리는 반공국가이고 또, 대통령 각하께서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부르짖고 계시는데 깡패 같은 쓰레기들을 끌고 가 몇 명 죽였다는 것쯤이 무에 대수야 그런 인간들 몇 명 죽였다고 해서 우리 인구가 줄 것 같애? 한번 봐봐, 길을 지나가는 사람 열 명이면 열 명, 백 명이면 백 명을 불러 세워놓고 물어봐봐. 삼청교육대를 잘 만들었는가 잘못 만들었는가를……

죄송하지만 몇%가 아니라 100%가 다, 잘 만들었다고 할 걸? 그들이 잡혀가는 바람에 사회가 얼마나 조용해졌는가, 나는 자신해. 자네가 인권차원에서 삼청교육대의 불법성을 고발하려는지 몰라도 사회는 결코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 국민들에게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삼청교육대 자네들이야, 자네들을 쓰레기로 본단 말이야, 국민들이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데 정보기관이 자네들을 보호해 줄 것 같아?두고 봐라 자네는 또 당할 것이야 그리고 자네까지도 소리 소문도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나는 그의 주장을 들으면서 섬뜩해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긍정했다.
“자네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네 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네 , 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거창하게 역사의식을 들먹거리진 않겠네. 그러나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있지… 그런데… 보호는 커녕 도리어 국가기관에 끌려가 개 맞듯이 맞아죽고 총맞아 죽고…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그것도 깡패로 누명을 쓴 순백한 양민들의 경우…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본인이 피해자라면…”
“억울한 건 나도 알지….”
그도 담배를 한 번 깊숙이 빨아 당기곤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내일 죽을지라도 내겐 폭로를 해야 할 책임과 임무가 있네, 특별히 나를 믿고 죽어간 사람이 있어. 그 사람과의 약속 때문에라도 나는 중단할 수 없지… 자네가 나 때문에 감옥 가는 일은 없을 걸세, 나도 그렇게 무책임한 놈은 아니니깐…”
그러나 나는 나의 그 장담과는 달리 주장이 얼마 있지 않아 패배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동수!
내게 비교적 쉽게 접근한 최동수는 정보기관의 끄나풀 노릇을 아주 쉽게 해내고 있었다. 회원 수급에 목말라하던 내게 최동수는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 주었다.
그 중에는 진짜 피해자도 있었고 가짜 피해자도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최동수가 소개하는 사람이라면 의심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원래 사람을 잘 믿는 나의 단점이 나에게 스스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정말 큰 조직을 해 낼 일꾼이었다면 적어도 몇 사람쯤은 검증작업을 거쳤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의 그 큰 단점이 최동수의 전략에 휘말려 들어간 것이다. 최동수가 데려온 인물 중에 세 명의 사내는 내게 가장 협조적이었다.

그들은 사무실 운영비와 경비를 작은 돈 이나마 서슴지 않고  쾌척했다. 그들은 동지들의 점심값도 치루고 어쩌다 밤에 마시는 소주 값도 그들이 자청해서 먼저 지불해 주곤 했다. 심지어는 서울 상경 집회 계획이라도 가질라치면 상경 차비까지도 서슴지 않고, 뒷돈으로 대주었다. 그들은 절대 앞서서 나서거나 조직에 대하여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내가 정한 투쟁 전략을 수정 없이 지지해주곤 했으며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들은 힘들어 해 하는 내게 언제나 격려해주었으며 어떨 땐 진상규명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하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만 믿는다며 두 손을 꼬옥 잡아주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정보기관의 첩자라니, 나는 온 몸이 전율했다. 집회계획을 가지면 번번이 세어나가는 정보. 우리가 말한 한마디 한마디가 정보형사가 먼저 알고 있으니 도대체 환장 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쥐도 새도 모르게 계획을 세웠어도 그것은 허사였다.

한번은 측근들 몇 명이 범어사 계곡에서 민정당사 정문 집회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서울로 향했다. 인사동 근처에 흩어져 있다가 기습적으로 민정당사에 난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두 눈과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렇게 치밀하게 세웠던 집회계획이 누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정당사 앞에는 이미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골목길에서 튀어나오는 우리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보기 좋게 포로로 잡히었다. 그리고 닭장차(전경차)에 실리어 난지도 쓰레기장에 내팽개쳐졌다. 나는 그때부터 조직에 첩자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회의라는 것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누가 누군지 모르니 마음 놓고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구포에 살던 성동지가 급하게 나를 찾았는데 <지금 빨리 중부경찰서 옆 ××주점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눈을 의심 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평소 우리가 죽어라고 싫어했던  경찰서 정보과 형사와 정보계장, 그들이 최동수와 최동수가 소개해준 그 동지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형사 나부랭이를 만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쌀장사를 한다던 그들, 그들이 형사 나부랭이와 함께 있다니….>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확인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주점 정문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얼굴이 백지장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복수를 다짐했다. 복수하리라. 우리는 그놈들이  쌀 도매상을 하면서 평소 변칙 도매를 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을 기억에 되살려 그들의 약점을 캐기로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신분이 탄로 난 후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사무실에 나타나던 그 정보형사도 나타나지 않았고 담당형사의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구청공무원을 사칭하며 그들 가게에 잠입을 했다. 종업원들은 우리 얼굴을 모를 것이었으므로 평일 오전에 가게에 들이 닥쳤던 것이다. 불법 장사를 하는 증거를 찾아낸다는 명목이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찾아내어 그들을 사직당국에 정식으로 고발하자는 것이 그들에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을 해내었던 것이다. 즉 기준에 부합되는 저울로 쌀을 팔아야 하는데 구식 되박으로 쌀을 판다든가 정부미와 일반미를 섞어서 판다든가 하는 약점들을 잡아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보들은 평소 때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무용담처럼 들려주던 것이어서 우리는  그 약점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행동도 그들은 이미 정보를 알고 있었는지 추측을 했었던지 우리가 양곡상에 도착하여 구청공무원이라고 공무원사칭을 한 뒤 너스레를 떨고 있을 때  형사 기동대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우리는 즉시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경찰서로 연행이 되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아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완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추어 인권운동가도 못될 부끄럽고 참담한 패배였던 것이다. 정보기관은 이런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던 것인가를 지금 생각해 봐도 부끄럽기만 할 뿐이다. 그들 정보기관은 심청교육대를 폭로하려고 하는 나에게 정보를 이미 상부기관에 보고 해놓고 있었고 24시간 나에 대한 관찰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삼청교육대는 광주학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최대의 인권유린 사건으로서 그들 정권의 최대의 약점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 약점만큼이나 광주와 삼청은 어떤 형태로든 온 몸으로 막으려 들었다. 그런 와중에 피라미 인권운동가인 내가 멋모르고 껑충거리고 있었으니 정보기관은 코웃음을 치며 나 같은 피라미 인권운동가는 손바닥에서 갖고 놀 것은 뻔한 위치였다.

이로써 나는 어이없게도 삼청교육대  폭로 미수사건으로 두 번째의 구속수감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공무원자격사칭 등 이었고 공갈 죄 등 온갖 죄를 다 갖다 붙여 피라미 인권운동가를 파렴치범으로 조작 구속했다. 만약 내가 삼청을 폭로하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런 죄쯤은 형사사건도 아니 단순 경범죄 구류쯤으로 처리했을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배경도 물질도 사회적 인맥도 갖지 못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정보기관의 노리개로 쉽게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의 참담했던 심경을 한편의 시로 남겼다.

한 폭의 기를 내린다
잃어버릴 이의 얼굴도 함께 내린다
내 과거
내 미래 내 사랑의 기(旗)까지
이 가면의 법정에서
내려 놓는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기도드리던
회춘(回春)의 거리는
다시 긴-
동면으로 빠져들고
마음씨 고운 가난들이
적지(謫地)로  가는
길목에서 손을 흔든다
잘 있거라
이름 없이 내려진 깃발
언젠가는 드세게 휘날릴
거리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깃발을 내리며 全文 85.8.3>

나는 결국 그 사건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것도 출소한지 3개월 만에 기가 찰 일이었다.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열정을 갖고 뛰고 있던 나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죄도 아닌 죄, 단순 주거침입죄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경범죄 수준의 죄를 징역 8개월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조작해내는 정보기관의 가증스런 폭력 앞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좀 더 치밀한 폭로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마추어 조직으로 폭로가 될 일이 아님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으며 재야세력과 연계를 통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꿈을 깨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우리 집 가족들 그러니까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 형제들은 내가 왜 그곳에서 고생하게 되었는가를 아직까지도 확실히 모른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는 절대 입을 열지 않는 나의 성품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단순범죄 사건쯤으로 생각 하고 있었다. 나는 도리어 그것이 좋았다. 이미 6,25때 북으로 월북한 5촌의 공안사건으로 안기부를 끌려갔다온 경험이 있는 우리 가족들에게는 그 같은 내 생각을 전했다면 엄청난 부담감을 안을 것이었다. 특히 나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안기부에 끌려갔다 온 공포를 고통으로 간직 하고 계셨다. 

나는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가족들에게 <나라죄>를 범하는 미수 사건을 말하여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내 생각 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가족들 에게 일체 말하지 않았고 연락조차도 취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내가 사라지거나 명절 때 나타나지 않으면 <간>이 덜컥 떨어진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긴 기간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잡혀 갔다>는 의심부터 먼저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징역 8개월을 살고 또다시 출소를 했다.  잡혀갈 당시 나를 향하여 빈정거리던 정보기관원이 하던 말 <삼청만큼은 잘 안 될거야, 폭로, 좋아하시네.> 하며 조롱하던 기억이 출소 당일 날 크게 부각되어 떠올랐다.

나는 이빨을 깨물었다.
“두고 보자 이놈들……”
나의 가슴속에는 군사정권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으로 이글거렸다. 특히 군사정권의 위정자들을 향한 나의 저주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필자 소개>

이적 목사 약력

-1957년생 경남 통영 출생.

-1986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민족문학에 <안개속으로><연작시 삼청교육대10> 등으로 신인추천.

-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3년 구금, 88년 <미주중앙일보> 정화작전 연재 91년 <대한매일 창사기념/ 장편소설 적도> 당선, 80년대 군사독재 저항문인 단체였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회원> <민예총 창립회원> 1987년 삼청교육대사건을 최초로 폭로한<삼청교육대정화작전/전예원 87>발간. 이후 <장편소설 북방산계곡의비밀/90광야> 장편실록 <청송감호소 죽음의 그림자> 정치평론<대통령의 늦바람/남풍89>등이 있으며 시집 으로 <바스티유의땅/한겨레 88><이별과절망의둔주곡/ 푸른숲91>< 바다가 된 그대에게/ 새암바다/2000>등 기타 <김대중 살리기 공저><분단과통일시 1,2집/공저><사람과문학/ 공저>등 20여권의 작품집이 있다 현재 저항문인 단체인 <분단과통일시 동인>, <우리시대의시인들 동인>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경기도 김포시 <민통선평화교회담임 목사>로 시무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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