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남의 보은기(報恩記) Ⅰ-3

1973년 봄의 ‘남산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박형규(朴炯圭;<한국기독교장로회> 증경총회장)목사 등 목회자들의 구속되는 초유(初有)의 사건이 발생하자 KNCC 총무인 김관석(金觀錫; 전 CBS 사장) 목사가 방일(訪日)하여 후지산 산록에 있는 고덴바(御殿場)의 한 여관에서 이에 대한 대책모임을 가졌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고(故) 이인하(李仁夏; 당시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목사를 필두로 하여 고(故) 오재식(吳在植; 당시<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어촌선교부<CCA-URM> 간사) 선생, 박상증(朴相增; 당시 WCC 국제부 아시아 부장) 목사, 고(故) 나카지마 (中嶋; 당시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JNCC)> 총간사)목사, 고(故) 강문규(姜汶奎; 당시 <아시아 YMCA 연맹> 사무총장 )씨 등 10여 명이 모여 성직자 구속사건을 보고 받고, 국제적인 연락망을 결성하여 국내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일단 국제적 지원을 약속받은 김관석 목사는 1973년 10월 서울 문리대 시위 사건으로 나병식, 강영원, 황인성 등 기독학생들을 포함한 다수 구속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1974년 6월에 상설기구로서 ‘인권 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해 1월에 발포된 긴급조치 1호~4호로 급증(急增)한 구속자들에 대한 대책과 인권옹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75년 제5차 WCC를 계기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이 있는 각 국의 대표단들이 제네바에서 긴급 회동(會同)을 하였다. 여기에는 출국 금지된 김관석 목사 대신 서남동(徐南東; 당시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목사를 위시하여 외국의 기독교단 관계자들과 캐나다의 김재준(金在俊; <한국신학대학교> 초대 학장) 목사, 이상철(李相哲; 당시 <캐나다 연합장로회> UCC 회장) 목사, 독일에서 장상환 (張尙煥;당시 <재독 한인 교회> 프랑크푸르트 교회 담임) 목사, 이삼열(李三悅; 당시 재독 유학생) 씨, 미국으로부터 이승만(李承晩; 당시 <미국연합장로회>PC-USA 아시아 담당 간사) 목사, 손명걸(孫明傑; 당시 <미국감리회>MC-USA 아시아 담당 간사) 목사 등 60여명이 모여, 한국의 소식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면, 독일, 미국, 스웨덴, 영국, 캐나다, 일본 등 해외 교회들이 지원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 합의에 따라 1975년 11월 7일 <한국민주화를 위한 세계협의회(World Council for Democracy in Korea)가 조직되었고, 1977년에 <한국민주화운동기독교동지회>(The International Christians Network for the Democracy of Korea;ICNDK 이하 <민주동지회>)로 명칭이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의장은 캐나다의 김재준 목사가, 총무는 WCC 국제부에 있는 박상증 목사가 담당하게 되었다.(이상 오재식 선생의 유고 자서전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대한 기독교서회, 2012년 간 219~226쪽 여기 저기에서)

<민주동지회> 동경 자료센타에서 발송된 ‘월간 민주 동지’를 포함한 한글 자료들은 1974년에 국내 ‘목요기도회’와 같은 시기에 시작된 미주 각 지역의 ‘목요기도회’를 포함하여, ‘희년기도회’<민주주의국민연합북미본부>,<북미주한국민주화인권위원회(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 R. in Korea)>, <북미 기독학자회 인권문제연구소> <북미주한국인권옹호협회> <북미주기독학자회>, <북미주민족자주통일협의회> <민주국민회의> <북미주조국통일국민회의> <재미한국여성동우회>, <한국고문희생자원호회>, <북미주정신대협의회> <북미주자주통일동포대회>등 단체와 지역의‘한인교회’를 포함한 ‘한인회’ 등에 배포 되어 국내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북미주(미국과 캐나다) 각 지역의 각종 활동의 기초자료로 사용되었다.

1987년 당시 미국 지역은<민주동지회> 미국본부가 있었던 뉴욕의 구춘회 선생, 캐나다는 토론토의 이상철 목사의 총괄하에 동경에서 보내진 ‘월간 민주동지’는 한글판은 각 지역 동포들에게, 영어판은 각국의 교회기관에 발송되고, 각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필요한 만큼 복사하여 배포되었다고 한다. 단 독일의 장성환 목사는 영국과 스위스 등지를 함께 책임지고 있었다.

한편 영문 '월간 민주 동지'도 역시 구춘회, 이상철, 두 사람의 책임 하에 <아시아 인권을 위한 교회위원회(CCHRA)> <한국지원 네트워크(Korea Support Network)> 와 <미국 연합장로회(PC-USA)> <미국감리회(Methodist Churches in USA (UMC)> <캐나다 연합교회(UCC)> 등과 각 북미 각 지역 언론사에 배포되어 미국·캐나다 양국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상황을 보도하고 양국 정부에 한국의 독재 정권에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데 기초자료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유럽의 경우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장성환 목사의 총괄하에 한글 자료는 독일, 영국, 프랑스의 한인 교회와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이하 <민건>)을 포함한 한인 민주단체와 교민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리고 영문판은 <BFW>, <EMS( Evangelical Mission in Solidarity)>, <IA>, <WCC> 등 <라운드 테이블(Round Table> 유럽 회원 단체들과 각국의 언론기관에 배포함으로서 독재정권에 대한 각국 정부의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기초자료로 사용되게 하였다. 한편 스웨덴은 유학생 신필균씨가 이 일을 맡아서 했다.

1987년 5월 1년 가까이 되던 때, <EMS> 동아시아 담당 총무 쇼여마이어 목사(Rev.Dr.Scheuermer)는 나를 스위스 베른(Bern)에 있던 <EMS> 본부 사무실에 불러, 영국 런던에서 국제회의에 참석하라는 본국의 메시지와 왕복 교통비를 전달하여 주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영국 런던 히드 공항에 도착하여 다시 전철로 한 시간 정도 걸려, 주소가 적힌 공문을 보여 가며 손짓 발짓으로 길을 물어 회의 시작 시간을 넘겨 겨우 찾아 간 곳은 런던 교외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 수녀원이었다. 회의는 이미 시작되었고, 쇼여마이어 목사를 포함한 대여섯 사람의 서양인들과 오재식 선생, 박상증 목사, 그리고 나와 또 한 사람, 나중에 동아투위, 조선투위를 중심으로 하여 창간준비 중에 있다는, 가칭 ‘한겨레 신문’에서 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최 선생(?; 죄송스럽게도 나는 이분의 성함을 기억하지 못한다)이란 분을 포함하여 10명 내외의 회의였다. 최 선생과 나에 대한 오 선생의 소개를 박수로 받은 후, 진행된 3시간 가까운 모임에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우리 두 사람은 그 시간을 지루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혼이 빠진 채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 나에게 최 선생은,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후다닥 정신 차린 나는 당황하여,
“ 아! 한겨레신문의 창간에 조금 지원하자고 하는 것 같은 데~”
하고 어물거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이야기 내용을 다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게 3시간여 회의는 끝나고, 갈 사람은 가고 남은 4~5명 만 남아 그 수녀원의 숙소에서 일박을 한 후 다음날 나는 하이델베르크로 돌아갔다.
공항에서 오 선생은 회색 잠바에 골덴 바지 차림의 내 입성을 못 마땅한 듯 위아래를 쳐다보면서,
“좀 단정히 입고 다녀야 입국심사에서 일거리 찾아 입국하는 불법노동자로 의심을 받지 않습니다.”
라고 하고 하면서, 마지막 악수를 청하며,
“김경남 목사가 동경에 무사히 들어가면, 곧바로 동경으로 날아가 사무적인 일들에 관하여 말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1986년 5월 한국을 떠나기 전 인사차 찾아간 나에게 했던 말을 재차 반복하고는,
“독일에서의 체재에 관해서는 쇼여마이어 목사를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하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 선생은 끝까지 그 회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필요 없는 것은 쓸 데 없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그 시대 우리의 생존법에 따라, 나도 구태여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15년 정도는 위인 오 선생의 깍듯한 어투가 본래 일본에서 터득한 그분의 매너라는 것을 한참 후 일본에 와서 지내면서야 비로소 알게 된 때까지 내내 신경이 쓰였을 뿐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시내 중심가 한 유명한 마트에서 양복 한 벌을 샀다. 세계에서 가장 좋고 가장 비싼 것이 이태리 제(製) 의복이라고, 그 때까지 내가 듣고 있었던 풍문과는 달리 그 마트에서 가장 싼 것이 이태리제 양복이었다.
학생 시절 내내 검게 물들여 수선한 군복을 입고 다니다 졸업식 때 비로소 양복 한 벌을 선물로 얻어 입어 본 후, 1980년대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설교 때에나 몇 차례인가 양복을 입었던 나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목사나, 교수나, 할 것 없이 간편한 옷차림으로 생활하는 독일에 익숙해 있었던 나였었다.
그러나 그 일 있은 후, 나는 독일에서나 일본에서나 가능하면 정장차림을 습관화하는 ‘거룩한’ 목사가 되고자 애썼다.

그 때의 그 모임이, 1970년 이래 노동선교, 빈민선교, 인권선교 등 한국 기독교의 민주화·인권·선교를 위시한 한국의 운동권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유럽과 미주의 기독교 단체의 한국담당 실무자 혹은 아시아 담당 실무자들의 모임인 <라운드 테이블>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90년 여름 동경 변두리 히노데(日の出) 시 소재(所在) ‘히노데 가톨릭 수도원’의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는 상기(上記)의 유럽단체 대표 외에도, <미국연합장로회>와 <미국 감리회>, <캐나다 연합교회> 등 미국, 캐나다 단체들과 <일본 기독교협의회>(JNCC), <일본기독교단> 대표들이 모였다. 거기에 이인하 목사, 오재식 선생, 박상증 목사, 안재웅 선생(당시 ,<세계기독학생연맹> 아시아 총무, 현 한국 YMCA 연맹 이사장) 등이 옵저버로 추가된, 20여명의, 보다 확대된 회의였다.

내가 알고 있는 한, 1970년대 이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예장·기장·감리교 등 각 교단 산업선교회(노동선교), <서울특수지역선교위원회>(빈민선교)>, <KNCC>인권위원회(인권선교),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농민선교),<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_학생선교), 심지어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신구교 민중 선교단체 협의체)나 연구단체인 <한국교회사회문제연구원> 등 한국교회의 인권·노동·농민·빈민을 의식화하는 특수선교단체들의 거의 전 예산이, 매년 <라운드 테이블>에서 상기의 해외 기독교 단체들로부터 모금되고 배분된 지원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느 한 해에는 <WCC-URM>(세계교회협의회 도시산업선교)가 예산 200만 달러 중 100만 달러를 <CCA-URM>(아시아 교회협의회 도시산업선교회)에 지원했고, 그 가운데 60만 달러가 한국의 URM 단체 등에 지원되었다 한다. 그것은 노동자·농민·빈민·청년·학생 등 각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사회선교활동에 대한 신뢰와 애정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1971년부터 <CCA> URM 간사로 재직하면서 군사독재 하에서 고난당하는 한국 민중과 같이 하고자 하는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그룹을 대변하여 온 오재식 선생 등 <민주동지회>를 조직하고 이끌어 온 해외의 민주인사들은 노고가 무엇보다 중요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민주동지회> 동경 자료센터의 관장(官匠)으로 도일(渡日) 했을 때에 이인하 목사는 일본 지회 대표를 맡고 있었다. 당시 <동경 자료 센터>는 국내의 운동권 상황과 정세를 종합한, ‘월간 민주동지’를 발간 인쇄하여, 미국 지회에 한글판 100부, 영어판 30부를 뉴욕의 구춘회 선생에게, 독일에 한글판 100부와 영어판 50부를 프랑크푸르트 장성환 목사에게, 캐나다에 한글판 50부, 영어판 20부를 토론토의 이상철 목사에게, 스웨덴은 스톡홀름의 신필균(申弼均; 당시 스웨덴 유학생) 씨에게 한글판, 영어판 각각 10부 정도를 발송하였다. 한편 한글판은 이인하 목사가 동포 교회에, 그리고 일본어판은 <한국민주화운동 일본기독자긴급회의> 사무국에서 인쇄하여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역에 배포하였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센터에 나와 나의 일을 돌봐주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민주동지회>일본 지회의 대표인 이인하 목사에게 섭섭하였다.
그러나 후일 알고 보니, 이인하 목사는 <민주동지회> 일본 대표직 이외에도 1975년 .‘박종석 취직 차별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시작한 ‘지문 날인 반대 운동’을 이끌어 가면서, 재일 한국인들을 위시한 아이누인, 부락쿠민(部落民; 우리나라의 白丁), 오키나와인 등이 연대하는 <민족차별에 투쟁하는 전국연합>(<民鬪連>)의 대표의 일, 거기에다가 <JNCC> 의장직에다가 <가와사키 재일 한국인 교회>의 담임목사의 일을 맡고 있어서, <민주동지회> 대표로서의 업무를 내가 원하는 만큼 해내기에는 너무 분주한 분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 이인하 목사는 1988년 2월 어느 날, <릿교(立敎)대학>의 구약학 교수 기다 겐니치(木田憲一)선생을 찾아가 연구생 입학 면접을 받도록 지시하였다.
일본어 학원 수강생으로서는 더 이상의 3개월짜리 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되어 나를 위해 이목사가 학생비자를 받을 조치를 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50대 후반 정도의 기다 교수는 더듬거리는 나의 영어 자기소개를 들으며, “나루코도”를 연발하였다. 나중에 권 선생에게 “나루코도”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호호 웃으며 “나루코도”가 아니고 “나루호도(成程; ‘그렇군요’라는 의미)라고 가르쳐 주었다.

동석(同席)한 다른 교수의 이러저런 질문에 요령 있는 대답을 한마디도 하지 못 한 나에게, 기다교수의 “나루호도” 몇 마디로 연구생 입학이 허가되고 <릿교대학> 대학원 구약학 연구실 연구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다선생은 그 이후 나의 4년 동안의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 한 학기 2~3번 밖에 선생의 세미나를 청강하지 않는 ‘불량한’ 연구생에 대해 못마땅한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때 내 머리에는, 14년 전인 1974년 <한국신학대학교> 학사편입 면접 때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 당시 신입생 후보자 면접은 안병무 교수가 주심(主審)이었고, 황성규 교수가 배심(陪審)이었다. 영어와 성경 두 과목의 학사편입시험에 나는 성경시험은 거의 영점(零點)에 가까울 것이라고 짐작하고 기죽어 있었다. 입학원서 접수 전날까지 입학을 위한 ‘신앙고백서’ 작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필기시험은 거의 포기하고 있던 나였다. 주로 내가 제출한 신앙고백서의 내용에 집중된 질문 끝에,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는 안 교수의 마지막 질문에,
“목사가 되면, 양심을 속이지 않고도 먹고 살아 갈 수 있어서....”
라고 우물거리고 있는 나에게, 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황성규 교수가,
“자네는 성서를 무시하는가?”
라고 하며 나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러자 안 교수는,
“아 그건 입학한 후에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하며, 나의 입학을 허가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안 교수는, 향후 2년 반 동안(지금은 사라진 제도이지만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에 편입한 ‘학사편입생’은 2.5년을 수강하여야 했다)의 등록금을 면제받게 해주었다. 거기에 더하여, 가정교사를 해서 다섯 식구의 생계를 꾸려나가기로 작정한 나의 고단한 삶을 알기나 한 것처럼, 매월 4만원 거금(巨金)을 ‘생활 장학금’으로 마련해 주었다. 당시 안 교수 자신이 개척한 평신도교회 명동 <향린교회>의 장학금이었다.

나에 대한 이런 과분한 배려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당시나 지금이나 ‘빵잽이 운동권’에다 입학시험 점수 영점 맞았으니 당연히 낙방감인 나였는데.....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고 강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몇 날 밤을 고민하고 나서 작성한 나의 이런 ‘신앙고백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대학 후배(안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인 나에 대한 ‘봐주기’이었을까?

허겁지겁 면접을 마치고 나오던 나는, 그 면접실에 ‘제3의 면접관’(?)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백발의 긴 머리를 하고 있는 70대의 노인이었다.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의 기독교의 개혁에 앞장섰고, 1970년에 들어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로서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던 그 전설의 어른, 장공(長空) 김재준(金在俊) 선생이었다. 그리고 나의 면접 주심인 안 선생은 1975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나의 빵잽이 동지가 된 것, 그리고 그 후 ‘해직교수’가 되고, ‘민중신학’의 선구자가 된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라 어떤 그 시대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나의 과장일 따름이었을까?

그리고 14년이 지난 1988년에 나는 두 번째로, 장공 선생을 뵙게 되었다. <한국민주화운동기독교동지회>의장으로서의 장공 그분을.....

기다 선생은 <햐쿠닌초 (百人町) 교회>를 소개시켜 주어 2년 가까운 (독일채제 기간 포함) 기간 동안의 낭인(浪人)의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해 구원해주었다.
야마노테션(山の手線) 오오쿠보에끼(大久保驛)에서 <릿교대학>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일본기독교단교후카이>(日本基督敎團矯風會;한국의 각 교단 여신도회?) 회관의 방 하나를 빌어 예배처로 삼아 기다선생이 개척하고, 아소(阿蘇) 목사라는 분이 무보수 목사로 설교를 맡고 있는, 청년들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50명 정도의 작은 예배처였다.

나는 거기에서 <게이오(慶應) 대학>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조용래(趙容來; 현 <국민일보> 편집인 겸 논설주간)씨와 부인 정구은(鄭求恩)씨를 만났다.
정구은 씨는 1973년 박형규 목사님과 권호경 전도사 등 두 목회자가 ‘남산부활절예배 사건’으로 감옥에 가고 없는 <서울제일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자를 잃은 양떼와 같은 교인들의 어머니역할을 하였던 박성자(朴成子) 목사의 장녀이다.


▲ 기다선생댁에서 박성자 목사(왼쪽)와 조용래 군(오른쪽)과 함께

박 전도사님의 노력으로 제일교회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는데, 그때 기다 목사도 그 소식을 듣고 서울제일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후 <긴규까이(긴급회의)>의 소식지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심화해 가면서, 여러 방식으로 후원을 하게 된 일본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했다.

국내의 명동 <향린교회>가 애초에 안 박사의 신학사상에 동조한 기독교 교인들이 모이는 평신도 중심 교회였던 것처럼, 기다선생과의 개인적 인간관계로 모인 <햐구닌초 교회> 교인들도 자연스럽게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관심과 지원을 하게 이른 것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점심 겸 친교시간에 가다 목사는 나를 ‘한국의 민주 투사’로 교인들에게 소개하였다. 나의 소개가 끝나자, 한 20대 청년이,
“긴상(김씨)은 감옥에 몇 번이나 들어가 봤소?”
하고 물었다. 국내에서는 항상 “김 목사”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나이어린 사람의 버릇없는(?) 말투에 순간적으로 결기를 이기지 못하여,
“다섯 번이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청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교인들이 “뻥이지?”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가 세 가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더럽다. 두 번째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다. 세 번째는 허풍이 세다. 이런 이유들에 대해 나 나름대로의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나는 “나루호도”라고 생각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동경 유수의 신문사 부장들이 같은 급의 한국 신문사 신임 특파원의 환영회식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 대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 부장들의 주택들은 대체로 3LDK 맨션이 대세였다. 일본을 아직 잘 몰라 입을 닫고 있는 한국 특파원에게 한 부장이 물었다.
“팍상(박씨), 팍상의 서울의 집은 어느 정도입니까?”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46평 쯤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일본인 부장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역시 뻥쟁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그리고 그 후 이 한국 특파원은 그 부장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었다. 일본 특파원직을 마치고 돌아와 한국 주재 특파원이 되어 있는 부장들을 다시 만나게 된 때까지는.
고등학생 시절인가 어느 신문에서 25평 정도의 주택에 사는 한 대기업 사장을 소개하면서 ‘청빈하게 사는 일본인들’을 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생각이 난다. 참조로 그 당시3LDK란 방 세 칸에 큰 거실과 부엌, 화장실이 딸린, 25평정도의 한국의 아파트의 넓이로 1980년대 당시에는 대회사 부장급 정도의 중산층이 사는 주택인데, 잦은 지진(地震) 때문에 베니어와 같은 얇은 판자로 지은 서민들의 아파트와 관계없이, 크기와 상관없이 내진성(耐震性)의 철근과 시멘트로 지어진 이런 주택을 일본에서는 ‘맨션’이라고 한다.

조용래 군의 보충설명 덕택에 어찌어찌 ‘뻥쟁이’라는 오명(汚名)을 벗고(?) ‘한국민주화운동권의 대표’로 인정받게 된 나는 <햐쿠닌쵸 교회> 신도들의 신뢰와 사랑 속에 그 후 4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무난히 보낼 수 있었다.
1989년 8월의 어머니 조촐한 환갑연 자리인 무사시노시(武藏市)에 나의 두 번째 아파트를 채워준 사람들도 이 <햐쿠닌쵸 교회> 청년들이었다.


▲ 하쿠닌초교회 신도들과 함께, 기다선생(왼쪽 두번째), 박성자 목사(세번째), 아소 목사(네번째), 건방진(?) 청년(맨 뒷줄 두번째).

이인하 목사님은 기다 교수와 공동으로 조용래 군이 번역한 안병무 교수의 저서(著書), ‘민중신학 이야기’를 감수(監修)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인하 목사와 더불어 기다 선생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민중신학과 후원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분들의 은덕에 나는 일본의 동경에서 행복할 수가 있었다.

1988년 9월 경, <자료센타> 옆방에 자리 잡고 있던<재일한국인인권문제연구소> 소장인 배중도 장로는 오사카까지 나를 데리고 가 <민족차별에 투쟁하는 전국연합>(민투련<民鬪連>) 연례 전국모임에 참석시켜 주었다. <민투련>은 일본에서 민족차별 받는 것은 재일동포가 민족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일 동포와 마찬가지로 차별받고 있는 ‘아이누족’(이들은 원래 홋카이도 원주민이었으나 최근에는 전국에 흩어져 차별받으며 살고 있었다), ‘오키나와 인’(오키나와 원주민으로서 이들 역시 일본 전국에서 차별받고 살고 있다), ‘부라쿠민’(部落民-백정; 이들은 일반 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살지 못하고 따로 떨어진 일정한 부락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들과 연대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인하 목사가 제창(提唱)·조직하여 대표를 맡고 있었고, 배중도 장로는 이 조직의 사무국장직 맡고 있었다.

그 후에도 배 장로는 니가타, 아오모리, 심지어는 홋카이도의 하코다테까지 <민투련>모임이 열리는 곳 마다 나를 데려가 주었다. 그 덕택에 나는 그 때까지 알지 못하였던 차별받고 있는 재일동포의 상황뿐만 아니라, 그 외 다른 민족적 차별이 일본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 행사에서 무뚝뚝하고 우리말이 아직 서툴렀던 배 장로대신 부인 정월순 집사가 누님처럼 살갑게 대해 주었다.

이런 행사는 배 장로가 연구소를 그만두고, 이인하목사가 가와사키 시와의 협상으로 얻어낸 성과의 하나인 <후레아이칸>(ふれあぃ館~만남의 집: 가와사키 시의 위탁으로 일본인 주민과 재일동포 주민들이 함께 만나 공동의 친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업으로 관장을 포함해 전 직원이 가와사키 시의 준공무원의 자격을 가졌다.)의 관장(館長)으로 옮기게 된 1990년 까지 계속되었다.

<필자 소개>

김경남

1949년 (66세) 전남 완도 생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법대, 한국신학대학 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한국민주화기독교민주동지회> 동경자료센터 관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무주<푸른꿈고등학교> 교장,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업본부장, <한국교회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경남 gisoo9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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