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칼럼 연재
놀라운 제의<이적의 민통선 예수 15>
이적 목사 | 승인 2015.03.30 11:42

김포시 민통선안에서 민통선평화교회를 개척해 18년간 목회를 해온 이적 목사의 자전적 성격의 에세이 <민통선 예수>를 매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나는 한동안 야학 일에 미쳐 있었다. 야학은 오후 6시쯤 수업이 시작 되었는데 내가 잡지사에서 일을 마치고 야학교에 가면 빈틈이 없는 시간이었다. 보통 국어과목이 하루 두 시간 정도 배당이 되었는데 나는 2시간을 한 번도 빠뜨림 없이 수업진행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당시 대학생교사들도 있었으나 만학도였던 윤기순이 교무를 맡고 있어 야학생활은 교사, 학생이 한데 어우러진 성숙한 분위기로 잘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 10시쯤 수업을 마치면 영도 영선동 2송도 방파제에 나가 소주를 들이키며 나이 많은 야학생과 교사 구분 없이 조국의 현실을 걱정하는 대화를 밤새도록 나누며 여명이 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기가 일쑤였다. 야학에서 만난 교사와 학생들은 사회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지만 순수한 영혼들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겪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들을 얘기해주면 그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경청했다. 그들은 젊기 때문에 나의 말에 금방 동화되어 시대에 대한 울분으로 주먹을 떨곤 했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고 그들은 나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 주었다. 좋은 길동무가 되어 주었으며 함께 외로움도 털어내기도 하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정의 편에 서는 시를 가르쳤다. 시를 가르치면서 가슴속에서 울분을 털어내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들 역시 사회의 소외자들이었기에 한이 많았고 할 말도 많았다. 우리는 시를 써서 그 많은 한들을 날려 보내려 하였다. 야학 아이들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시도 잘 썼고 공부도 곧잘 하였다. 앞날이 있어 보였으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아이였다.  나는 그를 아꼈다. 함께 시공부도 했으며 고민도 함께 가지려 애썼다.

그런데 그 아이에겐 남모를 우울증 같은 것이 있어보였다. 말수가 적어 그의 속을 들여다보기가 힘들어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한 일 년 가까이 야학에서 공부를 하더니 다시는 야학에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어디로 갔단 말일까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늘 궁금해 하고 그의 안부를 알아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가 해양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출근을 할 때 서울의 염창동 어느 골목길에서 그를 부딪친 것이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혹시 이적 선생님 아니십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고개를 돌려보는 순간 그가 김영대 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거의 15년 만에 다시 만났고 그가 사회생활을 너무도 잘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도 어느덧 서른의 나이를 먹고 한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출근길이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다음에 만나 그간의 깊은 속 얘기를 듣기고 하고 헤어졌으나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 명함에는 축협 지점장이라는 직책은 기억이 났으나 어느 축협인지 찾을 길이 막연해 아직까지 다시 만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가 이 땅 하늘 아래에서 너무도 건강하게 생존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는 김영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김영대는 어린 시절을 야학에서 공부하는 등 그의 생활은 힘겨웠지만  세상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제자중의 하나였다. 어쨌든 야학은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보다 야학의 생활이 내게 가르침을 많이 준 인생 학교였다.

잡지사 일을 마치고 야학에 막 출근 했을 무렵, <이 선생님 전환데요>하고 교무주임이 전화 왔음을 알린다. 나는 무심코 송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뜻밖에 서울 <자실>에서 만난 이승철 시인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이형, 나요 나, 이승철> 그는 전라도에서 호남대학을 나온 후 서울에서 문필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직업상 인동출판사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도 부지런한 친구라 <자실> 사무국 일도 함께 봐주고 있었다.

그는 대뜸 <이형, 거 있잖소, 삼청교육대! 그거 책으로 냅시다. 우리 이형 시 읽고 충격 먹었어, 한번 까발립시다.> 나는 이승철시인의 갑작스런 제의에 <머, 뭐라고했소>하고 거의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삼청교육대, 그냥 덮어둘 순 없잖소. 단행본으로 냅시다.> 나는 이승철 시인의 두 번째의 제의에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며 송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하였다. 그날 이승철 시인은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놀라운 제의를 하였던 것이다. 지금부터 원고를 집필하여 3개월 이내에 마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책은 인동출판사에서 출판하고 기획, 홍보, 모든 것은 출판사에서 알아서 할테니 원고만 써달라는 제의인 것이다.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지금부터 빨리 원고 집필 작업에 착수해달라고 하며 이승철시인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원고 집필은 절대 보안에 붙여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나는 이승철시인의 전화를 받고 난 후 며칠간을 아무 생각도 없이 멍청하게 지내고 말았다. 이렇게 위험한 폭로작업을 아무리 책이라 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용기 있는 출판사가 있을까 하고 의심이 갔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 이승철 시인에게서 온 한통의 편지를 받고 나서부터는 나의 그 생각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 하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승철시인은 이미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도적 보완과 위험성에 대하여도 나름대로의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 한 편지를 내게 보내온 것이었다.
이 편지 한통은 삼청교육대이 전모를 밝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이어서 그때 그 편지 그대로를 첨삭 없이 싣기로 한다.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저희 출판사를 여러 가지로 염려해줘서 고맙습니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영진 형께도 이적형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적 형의 체험은 현 단계 민족 민중운동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엄청난 운동량으로 질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소중한 체험,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작업을 빨리 끝내주시면 저희들로선 그 이상 고마움이 없겠고 공개 출판으로서의 제반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할 작정이니 신변의 위험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책의 출판에 있어 기술적으로 처리해내는 것이 (내용면에) 여러 가지로 좋은 듯싶습니다. 아무튼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틈틈이 작업하십시요. 책이 한권 분량이 되려면 원고지 1200매에서 1300매 가량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분량에 구애 받지 말고 가급적이면 구체성과 총체성 객관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집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느 정도 작업이 진척되는 가운데 서로 만나서 뵙도록 하지요. 아무튼 이적형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덧붙이자면 책의 출판 때까지 가급적 보안을 유지해주시는 것이 순조로운 출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언제 연락드리고 제가 부산에 한번 내려가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1987년 8월 27일 이승철 배상

이 한통의 편지는 내게 집필 작업에 있어서 용기와 가속도를 불붙도록 만들었다. 나는 앞뒤를 가릴 필요 없이 그동안 챙겨두었던 자료를 바탕으로 그야말로 체험 그대로를 <쓱쓱>써나가기 시작하였다.
붙일 것도 뺄 것도 없이 겪었던 그대로를 쓰는 데는 꺼리 낄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이미, 엄청난 비밀일기를 써놓았던 터라 기억에 나지 않는 사건은 일기를 바라보며 기억을 되살리며 써나갔다.

막상 글을 써 나가다보니 때로는 울분이 치솟기도 하고 때로는  까닭 모를 서글픔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체험 외에 사견(私見)은 절대 문장에 포함을 시키지 않았다. 감정을 절제하며 체험했던 글을 써나가는 데에는 인내가 필요했다. 특히 임근실이 폭행당하여 숨지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혼자서 <꺼억 꺼억> 이무기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근실씨, 나는 이제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나의 약속이 지켜지는 날 당신은 하늘에서 미소 한번 짓겠지요. 기다리세요. 아직은 그 쓸쓸한 하늘나라로 올라가지 마세요. 당신의 원한이 세상에 까발려 지는 날 그날 조용히 이 세상을 하직하십시오 아직은 가지 마십시요>

나는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임근실의 죽음은 세상이 알게 될 것이라고… 아니 임근실의 죽음은 이미 나의 시에서 발표 되었고 이것이 이제 시작임을 나는 자신했다. 나의 글쓰기는 밤낮 주야로 쓴 덕분에 채 석 달 만에 탈고를 끝낼 수 있었다. 나는 원고를 탈고하면서 이 원고로 인하여 이 나라가 역사 앞에 정직해지고 또 정직한 역사 앞에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한다는 머리말을 썼다. 누구든 백성 앞에 권력자가 되지 말고 권력 앞에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현자가 되어 어진 지도자로 다스려지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고도 하였다.

나의 원고는 이승철 시인에게 전하여 졌다. 원고를 전하는 자리에서 어떤 문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야, 역사는 거짓이 없고 비밀이 없다더니 오늘이 바로 그 자리야 우리 그런 의미에서 한잔 하자.>그날 밤 문우들은 삼청교육대를 최초로 단행본화 시킨다는 긴장감 때문에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었다. <자고로 선비가 용감해야 나라가 바로 된다고 했어, 우리 겁먹지 말고 이 원고로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야. 밝힐 것은 밝혀야지. 자 자 한잔 하자고, 전두환을 민족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사죄시켜야 돼>
 
우리는 흥분으로 들떠 삼청교육대의 폭로 후를 예상하면서 향후 대책과 위정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며 문우들끼리 동지애를 과시했다. 나는 든든한 우군들이 생긴 셈 이었다. <자실>회원 문인들은 정의감이 강했고 누구보다도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지성미가 넘쳤고 그 지성미만큼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감옥 따위에 굴복할 수 없다는 자존심까지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문인 이었지만 애국지사였고 투사였으며 사상가이면서도 철학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 틈 속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든든해했으며 내 자신 또한 그들과 닮아야 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이 정직한 글쟁이로서의 본분임도 등단 이후에 더욱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자실>측 문인들은 바깥에서 보기보다도 그 결속력은 더 단단했다. 그것은 권력으로 누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폭력으로도 그들의 정의감을 누를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단, 민주주의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었으며 인간애적인 모습에는 무릎을 꿇어버리며 스스로 무너져 내려 버릴 그런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런 매력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 매력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낮은 직업을 천시하지 않았으며 가난하고 버린 자들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구조적인 모순들을 타파하려 애썼고 또 스스로들 실천하고 있었다. 당시 김사인 이라는 시인은 노동해방문학을 창간하여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글 쓰는 공간을 열었으며 그 공간을 통하여 사회구조적인 모순들에 의하여 희생되는 사람들이 스스로 깨어나도록 그 길목을 틔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박노해 같은 시인을 발굴해내기도 했다.

소설가 김영현은 실천문학의 창간을 주도적으로 도우며 글이 풍류가 아니라 삶의 실천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일들을 직접 해내고 있었다. 소설가 윤정모는 팔방미인이었다. 문학을 통한 사회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여성들의 구조적 아픔을 소설화시켜 여성을 남성의 예속화에서 탈출토록 집요하리만큼 그 방면으로 부지런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하여튼 <자실>측의 든든한 문사동지들을 만나면서 나의 삶은 한층 자신감에 불타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애숭이 인권운동가도 아니었고 정보형사들에게 농락당하는 그런 수준 낮은 아마추어도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든든한 우군들을 얻으면서 권력의 위정자들과 한판 붙을 수 있는 철학과 사상을 바로 갖춘 문예 전사인 민족문예운동가로 변신해가고 있었다.

나는 사르뎅(Pierre Teihard de Chardin)이 말하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려는 한 시대의 시인으로 사상가로 그 꿈을 키워 나가고자 기존의 낡은 틀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있는 내 자신과의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원고를 이승철 시인에게 넘겨주고 되도록 빨리 출판을 하여 삼청교육대의 억울한 원혼들이 이 지상에서 떠돌아다니지 않도록 일을 빨리 매듭을 짓자고 부탁을 거듭했다.

당시 집필을 하기 전에 내게 원고지 뭉치를 사가지고 와서 부산 다대포 단칸방에 함께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격려를 해 준 부산일보 안봉모 기자의 부탁을 이 시인에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삼청교육대 출판은 한 개인의 영달이나 어떤 특정인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민족의 역사 발전을  위하여 쓰여야 하는 주춧돌 같은 역할을 하여야 하지요> 이시인도 나의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눈치였다.

후일 안봉모기자는 노무현 대통령비서관으로 참여정부에서 일하게 되지만 그때의 고마움을 아직 전하여 준 바는 없다.  어쨌든 이제 활시위는 내게서 떠나 있었다. 삼청교육대 인권학살은 얼마 후면 시한폭탄이 되어 전두환 정권의 정면에서 폭탄이 되어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희생을 불러오고 누구의 안녕을 말 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만약을 대비하여 원고를 세 묶음으로 복사를 하여 1부를 국제 PEN앞으로, 또 1부는 국내의 정의구현사제단 앞으로, 또 1부는 재야 쪽에 보내기로 하였다. 혹시 모를 출판 방해와 납치를 염려해서였다. 만약 책이 출판된다면 출판사 책임자와 나는 잠깐 잠적을 하였다가 정세를 살펴보고 난 뒤 나타나기로 하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다. 혹, 잡혀 갈 것에 대한 대비책도 단단히 하였다. 나는 지인들에게 내가 만약 하루라도 연락이 없으면 납치당한 줄 알라, 그리고 신문사나 방송사에 연락을 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나는 책이 출간되기 전 하루하루를 가시방석에 앉아 지내는 것처럼 초조하게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야학에서도 몇몇 교사나 절친한 제자들에게 나의 상황을 미리 일러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늘 나의 안녕을 확인하곤 하였다. 아직 책이 출간되기 전이라 하지만, 혹 출간계획이 탄로 나더라도 작가와 출판인을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초조감에서였다. 그러나 책은 예상했던 것보다 1년이나 뒤늦게 출간이 미뤄지고 있었다. 이승철 시인이 편집장으로 있는 인동출판사에 이유 모를 사정이 생겼고 그들은 이렇다 할만한 소식도 없이 차일피일 하다가 1년여를 허송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워낙 위험한 책이라 그들이 미리 겁을 먹고 책 출간을 포기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거친 얼마 후 나의 원고는 다시 외국어대학교 김진 홍교수가 경영하는 <전예원>으로 옮겨졌고 지금 문예진흥원 사무총장으로 있는 강형철 시인이 편집주간이 되어 책 출간을 책임 맡게 되었다.
도서출판 인동에서 책 출간을 전예원 강형철 시인에게 넘겨버린 이유를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어쨌든 시대를 폭로하는 책이라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을 처지는 못 되어 책은 소리 없이 전예원에서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전예원에서 김진홍교 수와 출판계약을 맺으며 삼청교육대 폭로의 정의를 불태웠다. 김 진홍 교수도 군사 정권 중에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라 불의 앞에 저항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다. 김 교수도 출판인 이전에 민족사적 비극을 다룬 이 책의 출간에 대하여 사뭇 긴장하고 있는 눈초리였고 강형철시인 역시 긴장된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출판계획을 어는 정도 알고 있는 <자실>문단 일각에서는 삼청교육대 책 출간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책의 출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마치 태풍전야의 밤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올림픽이 계획되어 있던 다음 해를 두고 그해는 유달리 떠들썩했지만 우리들은 초조함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88올림픽으로 국제적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키려 온갖 모양새를 다 꾸미고 있었지만 우리는 삼청교육대란 화약고를 88 올림픽 중에 정권에 치명타를 가할 요량이었다.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가도록 저주의 폭발물을 우리는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 소개>

이적 목사 약력

-1957년생 경남 통영 출생.

-1986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민족문학에 <안개속으로><연작시 삼청교육대10> 등으로 신인추천.

-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3년 구금, 88년 <미주중앙일보> 정화작전 연재 91년 <대한매일 창사기념/ 장편소설 적도> 당선, 80년대 군사독재 저항문인 단체였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회원> <민예총 창립회원> 1987년 삼청교육대사건을 최초로 폭로한<삼청교육대정화작전/전예원 87>발간. 이후 <장편소설 북방산계곡의비밀/90광야> 장편실록 <청송감호소 죽음의 그림자> 정치평론<대통령의 늦바람/남풍89>등이 있으며 시집 으로 <바스티유의땅/한겨레 88><이별과절망의둔주곡/ 푸른숲91>< 바다가 된 그대에게/ 새암바다/2000>등 기타 <김대중 살리기 공저><분단과통일시 1,2집/공저><사람과문학/ 공저>등 20여권의 작품집이 있다 현재 저항문인 단체인 <분단과통일시 동인>, <우리시대의시인들 동인>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경기도 김포시 <민통선평화교회담임 목사>로 시무 하고 있음.

이적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관련기사 icon이적을 죽이시오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