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오늘의 시대는 ‘인간’이 고정된 개념을 넘어 확장되는 시대이다. 2015년 개봉된 헐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울트론은 컴퓨터의 디지털 프로그램으로부터 만들어진 인공지능 생명이다. 그 디지털적 생명이 본래의 영역을 넘어 육신을 입고 현실화하는데서 영화는 시작한다. 물론 영화 <아이언맨>에서 주인공 토니 스타크를 돕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자비어(Xavier)가 이미 등장하고 있지만, 울트론은 이제 디지털의 영역을 넘어 현실적인 몸을 갖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존재로 거듭 진화한다.

디지털적으로 창조된 지성적 존재가 몸을 갖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는 아이디어는 2014년 개봉된 영화 <Her>에서도 이미 모습을 드러낸바 있다. 컴퓨터 OS 프로그램인 ‘사만다’는 주인공 테오도르와 관계를 맺으면서, ‘사이버 섹스’를 나누는 단계를 넘어 몸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된다. 디지털의 가상공간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능’(intelligence)이 단지 ‘인공 지능’의 단계가 아니라 ‘인공 생명’(artificial life)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은 스티븐 레비(Steven Levy)의 책 Artificial Life: A Report from the Frontier where Computers Meet Biology(1992)에서 이미 주제화된 바 있다. 디지털 지성이 아니라 디지털 생명이 된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생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부터 일이 좀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 개념에 없던 경계구조가 도입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념적으로 갖고 있는 ‘생명’의 개념은 주로 생물학의 수준에서 등장한다. 우리의 통념 속에 바위나 책상 혹은 벽돌은 생명이 아니다. 이 통념의 연장선 상에서 회로와 배선을 하드웨어로 해서 창출된 디지털적 존재는 생명일 수가 없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인공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문제는 이 디지털적 인공 생명이 단지 디지털의 가상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공간을 넘어 현실 공간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영화 <Bicentenial Man>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소설을 영화화했는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로봇 ‘앤드류’는 집안 일을 돕는 가사로봇으로 만들어졌지만, 주어진 입력을 따라 반응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찾아가는 디지털 지성으로 등장한다. 기계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살수도 있었을 ‘앤드류’는 인간의 생물학적으로 죽을 운명 즉 가멸성(mortality)을 선택한다. 즉 디지털 기계가 인간의 육신으로 진입해, 그 인간의 한계 즉 죽음까지도 함께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정확히 ‘성육신’(incarnation) 아닌가?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구성된 물질이 아니라면, 전혀 생명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기술 공학의 발달로 이제 생물학과 비생물학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앤드류’는 로봇으로서 기계와 디지털이 결합된 존재로서 전혀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었지만, 영화 속 그의 모습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보인다. 영화는 바로 그것을 묻는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 생물학적 수준을 뛰어넘어 확장 전개될 수 있을까?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미 1920년 대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개념을 생물학을 넘어선 영역에 적용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 물리학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들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화이트헤드는 그 이론들을 당시 새롭게 일어나고 있던 양자역학의 발전들과 연관하여 사유하면서,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실재(reality)를 보게 되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공간’(space)는 그냥 텅빈 용기(container)가 아니다. 물체의 질량이 빈 공간을 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간은 언제나 시공간(time-space)로서 그냥 텅빈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눈으로 보면 끊임없는 에너지의 진동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그 에너지가 특정한 물질형태로 변환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 에너지의 힘 때문에 시공간이 휘어있고, 그 휘어진 공간에 딱 맞는 물체가 거기에 놓여있기에 우리는 마치 그 물체가 시공간을 휘게 한 것처럼 보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물체가 시공간을 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휘어진 곳에 딱 맞는 물체가 거기 있다는 것, 즉 시공간은 수동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공간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 작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든 존재는 플라크 상수 값(10-33) 크기의 작은 에너지 단위로부터 가장 거대한 우주까지 엮여져 있다.

이 에너지의 진동이 어떻게 엮어지느냐에 따라 존재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물질적 형태들로 변환되어간다. 이 에너지가 잠재적 형태에서 현실적 존재의 형식으로 진입하게 될 때,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라고 불렀다. 이 현실적 존재의 가장 적합한 예들 중 하나로 화이트헤드는 전자(electron)을 들고 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현실적 존재로서 전자를 이제 하나의 주체(subject)로 보아야 한다는데 있다. 만일 전자가 주체의 합생 과정을 실현한다면, 그 전자를 구성요소로 갖고 있는 바위와 책상과 컴퓨터도 주체적 합생과정을 함께 겪을 것이다.

실재로 화이트헤드는 바위와 우리 간의 존재론적 차이가 질적 차이가 아니라 ‘정도 차’라고 보았다. 바위는 상대적으로 주체의 정도가 약하고, 우리는 단지 그 보다 훨씬 높을 뿐이지만, 근원적으로 바위와 우리가 사건적 주체의 합생과정을 통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같다는 것이다.

오늘날 트랜스-휴먼의 시대에 이슈가 되는 것은 기술공학의 발달로 새로운 형태의 인간이나 생명체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 속에서 정작 근원적인 물음은 이슈에 묻혀 간과되고 있다. 트랜스-휴먼 시대 디지털적 생명의 성육신적 욕망은 우리에게 묻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생물학적 경계를 넘어 확장되지 않는 절대적 경계를 갖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는 고정되고 확정된 것인가? 아니면 양자역학의 통찰을 도입해 사유하자면, 모든 물질은, 생물학적이든 비생물학적인 간에, 근원적으로 에너지의 진동으로 구성되며, 이 진동들이 상위차원의 관계로 엮여져 가면서 고차원의 질서들을 창출해 나아가는 것, 바로 그 질서 창출의 과정 자체가 생명인 것인가?

‘트랜스-휴먼’은 인간이 비인간적 물질요소들과 융합하여 혼종화 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곧 인간의 생명 작용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통속적 상상력은 인간이 비생물적 부문들로 그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생명을 연장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하지만 이미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듯이, 같은 물질적 구성성분을 담지한 전자들(electrons)이라 할지라도, 몸 안에 존재하는 전자와 몸 밖에 존재하는 전자는 다르게 행동한다. 여기서 몸은 그 안에 존재하는 전자에게 환경으로 기능하고, 전자는 그 안에서 유기체(organism)로 기능한다. 양자의 단위로부터 전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공간은 바로 이 유기체-환경의 이중적 기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몸에 기반하여 구성된 인간 정신이 이제 비생물학적 물질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 나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한 상상력을 우리는 영화 <Her>에서 보게 된다. 디지털 생명이 성 행위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 여기서 이 상상력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디지털 생명이 생물학적 경계를 갖고 있는 인간과 관계의 양상으로 진입하게 되면,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는 정확히 인간적 욕망을 미래적 현실 속에 투사해서 상상한 결과일 것이다.

철학자 지젝은 영화 <니노치카> 속 대사들을 인용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카페에 들어가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한다. 그런데 웨이터는 “죄송합니다만 지금 크림이 다 떨어져서 주문하신 ‘크림 없는 커피’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희가 신선한 우유를 대량으로 들여다 놓았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우유 없는 커피’를 드려도 될까요?”라고 대답한다. 주인공이 우유 없는 커피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여기서 커피의 정체성(identity)를 결정하는 것은 커피 안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커피가 담지하고 있지 않은 것, 즉 부정성(negativity)가 커피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영화들이 보여주는 미래적 현실은 사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상의 산물로서 실재하지 않는다. 즉 “~ 없는”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비존재하지만, 도리어 그렇게 비존재하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실제의 우리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Her> 속에서 몸과 섹스를 나누고 싶은 디지털 생명의 욕망은 현재 우리가 생명을 규정하는 경계를 정의해 준다. 디지털 생명이 생명으로 간주되는 지점은 그것이 육화(incarnate)할 수 있을 때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생명의 개념은 많은 부분 환원론적이다. 이전처럼 물질로 환원되는 수준이 아니라, 물질 중에서도 특정한 가상의 물질 즉 ‘돈’으로 환원되어 계산되어진다. ‘돈’이란 실물이 아니다. 우리가 숫자로 부여할 수 있는 물적 가치를 가상적으로 양으로 환산하여 계산할 수 있도록 하는 가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어 계산되는 현실을 접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4월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침몰한 세월 호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식의 생명을 잃은 이들의 아픔을 ‘돈’이라는 가상적 물질의 양으로 환원하여 보상하면 된다는 발상을 접한다. 물론 타인이 입은 물질적 정신적 손해와 피해에 대해서 물질적으로 보상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보상이 마치 생명과 등가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 개념은 가상의 돈이 생명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역시 “~ 없는”의 형식이 실물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을 바로 이 “~ 없는”의 형식으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생명의 근원적 특징들 중 하나를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믿으며 살아가는 시대’에 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생명(life)을 “타자들과 관계하는 외적 사실 이전에 그 스스로를 위한 내적 사실”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화이트헤드가 쓰고 있는 용어 “사실”(fact)에 대해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사실’이란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증거로서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이란 “환원불가능하고 완고한” 것으로서 우리의 개념적 파악에 잡혀지지 않는 원초적 사건(event)에 더 가깝다. 우리의 생각과 개념과 감정으로 확고하게 붙들려지지 않는 엄연한 사건, 바로 그것이 환원 불가능한 엄연한 사실이다.

생명은 바로 그 사건을 의미한다.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 외적 사실이기 이전에 스스로를 위한 내적 사실”이라는 것은 곧 생명이란 타자들에게 파악되는 객관적 과정이 되기 이전의 주체를 형성하는 내적 사실이라는 뜻이다. 이 주체적 내적 사실은 타자들과 공유되지 않는다. 우리가 타자들과 관계한다는 것은 곧 내적 사건으로서 주체가 ‘소멸’하고, 그 주체가 타자들을 위한 데이터로서 객관화됨을 통해 타자들의 주체형성 사건으로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은 “~ 없는”의 형식으로 현실적으로 진입하는 환원불가하고 엄연한 무엇, 그러나 그것의 가격은 매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의 현실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없는”의 형식으로 존재하며,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정체성을 규정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7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없는 자들을 선택하셔서 있는 자들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신다”(God choose to those who are to reduce to nothing those who are). 없는 자들(ta me onta, those who are)를 우리는 ‘가난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왜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은 비존재로 간주되어야 할까? 그리고 왜 바울은 하나님이 거꾸로 그 없는 자들을 선택하셔서, 있는 자들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리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바로 여기서 “~없는”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한 근원적 양식의 비밀이 놓여 있는 듯 하다.

<필자 소개> 박일준 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과, 보스턴대학 신학석사, 드류 대학 철학박사. 종교학과 철학과 신학의 접경 지역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집중하며, 특별히 인지과학과 진화생물학의 연구결과들을 종교철학적으로 성찰해 나아가면서 ‘인-간’ 즉 ‘삶-사이’를 ‘인간-이후’ 시대에 어떻게 자리매김해 나갈 것인지를 궁리하고 있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소속으로 ‘트랜스휴머니즘 시대의 혼종적 인간론 연구: 화이트헤드의 사건적 존재론과 진화론과 인지과학을 통한 사이-존재로서 인간론 구성’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박일준  iljoon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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