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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오펠 공장노동자평의회, 나를 울리다<파독광부 교회를 졸업한 이야기 19>
최정규 | 승인 2016.04.07 11:08

아직도 나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시를 읽어보고 싶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김준태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우리도 히틀러 경험 있다" 
 
1980년 5월은 참으로 잔인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노동자는 출근을 해야 했다. 출근해서 일하려고 준비하는데 작업관리 마이스터가 와서 물었다. "어제 뉴스 봤나? 아는 사람이나 친척 없냐" 나는 대답했다. "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집에 가 쉬어라." 

그의 말이 어어 졌다. "너무 힘들겠지만 잘 견뎌라. 우리도 아돌프 히틀러를 경험한 역사가 있다. 우선 일주일 휴가 줄 테니 쉬고 나오라"고 말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나는 "괜찮다"면서 그냥 일을 했다. 막상 닥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연일 속보와 특집 방송을 통해 전해져오는 5월 광주항쟁 소식은 유럽 사회와 재독 한인동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광주의 시민들이 도청을 점거하고 정부와 협상이 진행된다는 소식에 희망을 걸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있지 않는가?'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피를 말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텔레비전에 젊은 청년들이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서 끌려가고, 옷이 벗겨진 채 뛰어가는 청년을 향해 군인들이 곤봉으로 내리치고, 묶여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년을 전깃줄 같은 거로 목을 조르는 장면들을 보니 목이 메고 눈물이 났다.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휴가를 냈다. 아무리 권력에 욕심이 나도 제 나라 국민들을 저렇게 학살할 수가 있다니. 마치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공격하듯 그런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상상도 못해본 나는 도무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한 채 모여서 기도회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우리들의 한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신없이 좌충우돌하면서 뭔가를 하려고 뛰어다닐 때 알고 지내던 도르문트에 사는 친한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야! 북한의 김 주석은 뭐허고 있다냐? 광주사람들을 저렇게 죽이는데 말이다. 남쪽으로 쳐 들어가야 허는거 아니냐!" 

광주가 고향이었던 이 형은 독일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자기 처지를 보고 나한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 형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리고 마치 부탁이나 하듯 외쳤다. 내가 대답했다. 

"형 맘 알것네. 근디 그건 형 말대로 김 주석이 결정 헐 거 아닌가?" 
"미안허다. 피가 말라강게 누구한테 이야기 헐 수가 없더라. 그려서 너한테 했다." 

5.18 광주항쟁 상황을 독일 언론들은 신속하게 보도해 주었다. 같은 분단국가여서였을까? 나는 이때까지 복흠(Bochum)교회라는 활동 공간 외에는 잘 몰랐다. 당연히 내 활동 영역도 거기에 그쳤다. 교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광주학살 소식을 알리는 일, 추모기도회를 여는 일 그리고 모금 정도였다. 

텔레비전 뉴스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화면을 보는 우리들의 가슴은 정말 답답했다.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자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귀국을 서둘렀다. 그 중에 나와 같은 학습조로 함께 했던 이삼열 박사도 귀국하겠다고 했다. 그들의 영향으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어느샌가 그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귀국한다고 하니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기분이 '참 그랬다.'  

한국의 상황은 박정희 때보다 더 험악해져가는 분위기인데도 그들은 갔다. 자기들이 가야 할 곳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환송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멋지게 만나자"고 말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재독 민주단체와 유학생, 교인들이 중심이 된 집회와 농성 투쟁이 프랑크푸르트와 서베를린에서 있었다고 했다. 독일 전역에서 활동하는 민주단체들이 모여서 74년에 설립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 75년 재독한인노동자연맹(노연), 78년 재독한국여성모임(여성모임)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오펠 자동차공장 공장노동자평의회 
 
자동차공장 일은 광부 일과 비교하면 너무 달랐다. 나는 느닷없이 화이트칼라가 된 기분이었다. 광산 일은 매일매일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작업환경인데 자동차공장을 긴장도 필요 없고, 매일 샤워를 해야 하는 일도 없어서 신이 났다. 생각해 보니 5리터짜리 마실 차를 갖고 석탄가루 휘날리는 1천 미터 지하 광산에 들어가 탄을 캐는 작업과 지상에 있는 커다란 자동차공장에서 작업을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었다. 

어느 날 출근하여서 작업준비를 마치고 있는데 모두 다 일어서서 일하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다. 나는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오늘이 공장노동자평의회 공장총회(Belegschaftsversammlung)가 열리는 날"이라고 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함께 갔는데 커다란 창고 같은 곳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80년대 복흠 오펠 공장에서는 약 2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했다. 조금 있으니 공장노동자평의회가 시작되었다. 

1차로 공장노동자평의회 의장이 나와서 그간 평의회 활동에 대해 보고했고, (공장총회는 3개월에 1회 연 4회 열렸다) 그 후에 경영자 대표가 나와서 경영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리고는 각 정파 대표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발표를 하는데 그렇게 잘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나는 소리만 들었지 이해는 못하지만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독일어는 빵점이다. 
 
또 관중석에는 마이크가 3개 정도 설치되어서 질문을 하거나 자기 의견을 발표할 수 있어 치열한 논쟁을 하는 것 같았다. 난 눈물이 났다. 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투쟁하면 자연히 노동자들이 꿈꾸는 평등한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노동조합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었다. 그때는 말이다. 독일에서 본 상황은 동시대인 80년 한국 상황과 너무 달랐다. 눈물이 났다. 그날 나는 주먹을 다시 불끈 쥐었다. 언젠가 우리도 독일 노동자들이 만든 것과 같은 세상을 만들 것 이다. 그러나 지금 보니 전노협을 거쳐 민주노총이 만들어졌어도 여전히 내가 꿈꾸었던 그런 것과는 너무 다른 세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해보고자 한다. 

2004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나선 오펠 자동차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복흠시민들

그때 오펠자동차공장노조는 유니온숍이 아니라 오픈숍이었다. 어느 날 평의회 의원(Betriebsrat)이 내가 일하는 작업장에 왔기에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고 했더니 이 의원은 내 얼굴을 몇 번이나 바라보더니 노조에 가입하면 가입비를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가입하지 않아도 당신이 우리에게 연락만 하면 항상 여러분 편에서 일합니다."라고 말했다. 

참 이상했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이자, 공장노동자평의회 의원이 이렇게 말하니 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독일금속연맹이 어용이라고 생각하는 활동가였다. 나중에 배우고 보니, 1980년도 독일 금속공장 노동운동 상황은 임금협상을 산별노조가 하는 방식이었다. 산별협상 합의를 기본으로 각 공장단위가 협상을 하는데 그때는 노조가 아니라 ‘공장노동자평의회 (Betriebsraet)’가 협상했다. 헌데 이 노동자평의회는 오펠공장에 일하는 모든 노동자가 선거를 할 수 있는데 정파투표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금속연맹도 한 정파였던 것이다. 재미있었다. 그때 독일 노동조합운동을 이끌어가던 금속노조도 오펠자동차공장이라는 단위사업장 ‘공장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는 한 정파로 되어졌다. 후에 나의 인생을 치열하게 만들어준 오펠자동자의 자랑스런 노동운동 활동가조직이자 68년 학생운동 후 현장으로 침투한 노동 조직인 게오게(GOG)도 정파로 등록되어서 독일금속연맹과 경쟁하는 단체가 되어서 금속연맹의 최고의 표적이 되어서 치열했다.

재미있게도 평의회의원으로 첨 만났던 그 활동가가 게오게 활동가가 균터(Guenter)였다. 그는 녹색당 당원으로 오펠에서 노동운동하는 활동가였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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