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이훈삼 설교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삼하 22:47~51)2016년 7월 24일 성령강림열한번째 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6.07.22 18:06

*이번주는 이훈삼목사가 NCCK 평화협정 미국 횡단 캠페인에 참여하기에 2015년 주민교회에서 한 설교를 올립니다.

 

*영상설교: https://www.youtube.com/watch?v=c2H7ujIgxsM&feature=youtu.be

 

1. 삶의 비극성과 감사

1) 미켈란젤로 다윗 상의 도시

600년 전 피렌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기본 방향과 틀을 만든 여러 천재들이 살았던 도시였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조토, 마사초, 알베르티, 기베르티,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아메리고 베스푸치, 갈릴레오 등…! 이들은 모두 1000년 동안 지속되던 중세를 끝내고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의 세상을 여는 데 앞장선 위인들이다. 피렌체 시는 이들의 발자취를 보관하고 기억하면서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간직하고 있었다.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하는 베키오 궁과 시뇨리아 광장의 다윗 상.

그 중에서도 피렌체 시민들이 아끼는 인물은 미켈란젤로이며, 그의 조각 상 다윗은 피렌체 시의 상징이다. 피렌체 시에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 성당이 종교적 중심지라면, 그 옆에 있는 베키오 궁은 당시 집권자인 메디치 가문의 궁전이었고, 지금도 시 청사로 사용함으로써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피렌체 시청 광장인 시뇨리아 광장에는 다윗 상이 단단하게 서 있어서 피렌체의 역사와 시민들의 자부심을 지켜주고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본 피렌체 전경과 베키오 다리.

주황색 기와와 벽돌로 뒤덮인 피렌체 시를 한 눈에 보려면 도시 외곽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미켈란젤로 언덕에 세워진 다윗 상

그 언덕을 미켈란젤로 언덕이라 부르며, 그곳에도 다윗 상이 높이 서 있어서 혹시 외적이 피렌체 시를 쳐들어오는지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시 청사 앞과 이 언덕 위의 다윗 상은 사실 진품이 아니고 모두 복사 품이고 진품은 시내의 아카데미 갤러리에 보관하고 있다. 피렌체 시민들은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을 통해 피렌체 시민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들 조상들의 치열한 삶이 바로 오늘 21세기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노을

2) 미니아토 알 몬테의 공동묘지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아르노 강과 시 전체를 비추며 떨어지는 노을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우리도 붉은 노을 아래 물들어가는 시 전경을 보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미리 도착하여 기다렸다가 보았다. 기다리기는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저녁 해는 강물에 찬란하게 반사되었다가 짧은 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멋있긴 했지만, 기대한 것처럼 저녁 햇살이 도시 전체를 황금빛으로 서서히 물들이는 환상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바실리카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사실 여기서 내게 더욱 감명 깊었던 곳은 미켈란젤로 언덕 뒤의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1062년에 완성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미니아토 알 몬테 교회였다. 천년 된 건물의 벽에 그려진 빛바랜 프레스코화들,

지하 소예배실에서 드리는 저녁 미사

그리고 지하의 소 예배당에서 10여명의 사제들이 노래로 드리는 미사 등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이어지는 미사에 참여했고 이 오래된 하나님의 정원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알 몬테 성당의 앞마당에 있는 교회 묘지.
알 몬테 성당의 앞마당에 있는 교회 묘지.

그런데 피렌체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천년된 알 몬테 성당의 앞마당에는 1848년에 조성된 교회 묘지가 있었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서 도착한 낯선 도시 피렌체에서 죽음을 본다. 저 죽음마다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나이가 들어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분들도 있지만 아직 젊은데 묻힌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 눈길을 붙잡은 것은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의 무덤이었다.

저 아이는 왜 저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을까! 이 아이의 시신을 묻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렸을까! 그 슬픔을 떨칠 수가 없어서 부모는 아이의 묘에 죽은 아이와 비슷한 입상을 세웠다.
내 목숨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생명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

이런 묘지를 볼 때 우리는 학창 시절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한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하며,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진정 감사한 것이다.

2. 다윗의 감사와 찬양

신앙생활에서 찬양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찬양받기를 좋아하신다. 찬양은 우리의 정서를 표현한 여러 노래 중의 하나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고백하고 확인하고 다시 응답받는 너무나 소중한 신앙의 필수 요소다. 우리교회의 주일 오후 찬양 모임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시는 시간되기를 기도한다.

혼토르스트(1592~1656년), '수금을 타는 다윗 왕'(1622년, 네덜란드)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기를 형성했던 다윗. 그는 일개 목동에서 골리앗의 목을 벤 전장의 영웅으로, 그리고 왕실의 측근이었다가 목숨이 위태롭게 쫓기는 신세 등 삶의 우여곡절을 여러 차례 겪었다. 마침내 어렵게 왕이 되어 약소국 이스라엘의 위치를 한층 높이고 주변국들보다 우위에 서는 부국강병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윗은 밧세바를 빼앗고 우리아를 전장에서 계획적으로 죽게 하는 등 무거운 죄도 지었지만, 인생의 위험과 파멸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다윗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우러름과 감사의 찬양은 위험에서 그를 지켜준 든든한 방패요 요새였다. 다윗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었던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600년 전, 영화와 쇠락의 길을 반복했던 피렌체 시민들이 그토록 닮고 싶어 했던, 피렌체의 상징 다윗은 정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3천 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환기에 등장하여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구가했던 다윗은 많은 시와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생애 말년에 오늘의 본문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한 마디로 인생과 역사의 여러 위험 중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찬양이다. 다윗을 넘어뜨리고 죽이려는 세력을 오히려 심판하시고 다윗을 승리하게 하셨다는 고백이다.

3. 감사와 찬양의 근거 – 살아계신 하나님!

1) 무신(無神)의 시대
오늘 다윗의 찬양 핵심은 47절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우리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예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 신앙이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과제 중에 가장 근원적이고 광범위한 문제는 바로 무신론의 확산이기 때문이다. 경제, 독재, 인권, 평화, 생태계, 교육, 건강, 기계, 비정규직, 청년 실업 등 헤아릴 수 없는 과제들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이 시대의 문명이 하나님 없이, 인간이 곧 신이 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빠르게 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대한 흐름이다. 600년 전 서구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인류 문명의 흐름은 결국 이전의 종교를 폐기하고 인간이 곧 역사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다. 이것이 현대 우리 세계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경향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우리 시대의 방향을 결정한 르네상스에 관심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생긴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렇게 믿은 것은 인간이 우매하여 어린아이처럼 전설을 실제로 믿었기 때문이기에, 이제 이성으로 깨어난 인간, 똑똑해지고 주체적인 인간이 된 지금은 그런 어린아이의 무지를 벗어버리고 자신 있고 당당하게 신은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한 분야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의식, 그리고 사회 구조와 제도, 법, 문화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이 무섭고 두렵다.

2) 사회주의에 대한 박노해의 고백

80년대 중, 후반 우리 사회 개혁 운동의 정점에 노동자 시인 박노해가 있었다.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으로 우리 사회를 강타한 박노해는 그 후로 노동해방문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사회 변혁 운동 이론과 실천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당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시인 박노해라고 부르지 않고 ‘박노해 현상’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는 실제로 시인에 머무르지 않고 군부독재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통한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실천했다. 결국 1990년 안기부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라는 조직을 발표하고 1991년 핵심인 박노해와 백태웅 등을 검거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물론 안기부 발표는 실재를 과대 포장하여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세력을 탄압한 측면을 포함한 시국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노맹을 비롯한 당시 운동권은 실제로 사회주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환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 시대를 선도했던 시인이요 사회변혁 운동가였던 박노해는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복역하다가 1998년 복역 8년 만에 김대중대통령의 사면으로 출소하여 지금은 보다 보편적인 인권과 평화를 위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그가 출소하여 EBS인가에 출연하여 대담했던 것이 떠오른다. 사회자가 8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가 해체되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드디어 민주정권을 수립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에 온 몸으로 투신했던 박노해는 사회주의에 대하여 이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박노해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이념(Ideologie)으로서의 사회주의, 사회주의적 가치, 그리고 현실사회주의다. 박노해는 그 중 사회주의적 가치는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고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말은 이런 뜻이다. 소련, 중공, 북한 등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는 실재로는 이론과 달리 너무 모순점이 많아서 이상 사회가 아니기에 더 이상 소련이나 북한의 체제를 모델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지니고 있는 가치 즉, 평등과 자유의 실현, 노동과 상품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자가 인간답데 살 수 있는 세상의 건설 등은 여전히 인류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며 자신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은 버렸지만 그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신봉한다는 것이다. 나는 박노해의 이런 입장에 동의한다. 그것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악마 성을 극복하는 매우 중요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3) 기계적 원리나 비인격적 가치가 아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박노해의 답변과 같은 식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표현되는 신적 존재를 믿는 것
둘째, 하나님은 거대한 우주와 인류역사 그리고 인생의 작동 원리이며 이 원리가 지향하는 가치, 즉 사랑, 정의, 평화, 섬김, 나눔 등의 도덕적 가치의 소중함을 믿는 것
셋째, 현실에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신앙을 유지,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
먼저 세상에 있는 교회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하나, 실제 교회는 현재 매우 따가운 비판에 직면해 있으며, 스스로 돌이키고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진정한 교회로서 거듭날 수 있다.


4. 주민교회가 진정 새로워지려면…!

우리는 이러한 시대의 거대한 변화와 경향 앞에서 다시 한번 신앙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면 세상의 소리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으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은 괜히 시간, 물질, 에너지 낭비하는 것이다.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지 잘 모른다면 최소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결판을 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교회 개혁의 출발과 종착점은 여기에 있다.

교회의 진정한 개혁,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을 믿되 우주적 작동 원리나 도덕적 가치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 내 인생과 역사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을 때에만 가능하다. 오늘 대부분의 한국 보수 교회가 개인적, 기복적 차원의 신앙에 머무는 것이 문제이기에 이것을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지닌 교회들은 기독교 신앙이 도덕적, 사회과학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고백하고,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것이 내가 진보적인 신앙을 지닌 교회에서 목회하고 기장 총회본부에서 사회선교 분야를 담당하고, 다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사회선교를 책임지면서 깊이 느끼고 경험한 결론이다.

부르동, '모세와 떨기나무'

우리 주민교회로 좁혀서 말하면, 교회가 사회와 역사의 문제를 끌어안고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동기와 목적은 철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와 역사의 개혁에 관심하는 신앙인일수록 개인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그 신발을 벗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상한 도덕적 가치나 우주와 세상의 원리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고, 인생과 역사에 절대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에만 가능하다.

사실 주민교회 개혁의 가장 근원적인 방향과 근거는 바로 여기에 닿아있다.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 속에 계시다는 것을 머리로, 가슴으로, 영으로 온전히 깨닫고 느끼는 신앙을 갖는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사실 소소한 사항들이다.

하나님을 우주나 자연, 그리고 역사와 인생의 차가운 작동 원리나 고상한 도덕적 가치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한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은 마치 사람처럼 따뜻하게 살아계셔서 지금 내 곁에 계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요일마다 모여서 기도하는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이 내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으면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은 자동적으로 해결의 길이 열린다.

오늘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던 다윗이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 한 해의 반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반년을 시작하면서 감사드릴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이 감사가 오늘 2016년 하반기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