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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 안에 계시는 주님(에베소서 4:1~6)2016년 10월 30일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6.10.31 12:15

*영상셜교: youtu.be/vbiCsBJIYAs

 

■ 주간 단상  사이비 종교집단의 포로가 된 국정 

1) 국기 문란의 현실

박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를 조롱하는 패러디가 넘쳤다.

대통령을 언니라고 부르는 일반 국민 최순실이 정부 정책을 미리 보고 받고 방향과 내용을 디자인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이 재벌들에게 거액의 모금을 종용했고, 대통령의 힘을 업은 최순실은 딸을 승마 국가대표가 되게 하고 유명 대학에 편법으로 입학시키는 일 등 사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국정의 외교, 안보 문제까지 관여하며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부를 축적했다.

무엇보다도 목사가 아니라 사이비 교주인 아버지 최태민과 대통령의 관계가 오래전부터 의혹의 중심이었었는데 더 나아가 그 딸인 최순실이 대한민국 대통령 위에서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모두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동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개성공단 폐쇄 등 대북정책과 세월호 사고 당일 사라진 대통령의 7시간, 비상식적인 일본군 위안부 합의 등에 대한 의혹에 소문처럼 또 최순실이 관련되어 있다면 이건 정말 국가의 운명을 걸고 온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

NCCK 시국대책회의 대표 김상근 목사.

박근혜 대통령의 국기문란 행위에 대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비상시국대책회의의 입장
국정의 최종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국기문란행위를 자행하고 국정의 책임을 회피했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질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큰 불행이다. 나라와 민족을 오늘의 지경에 이르게 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 아픈 결단을 촉구한다.
국민을 더 이상 부끄럽게 하지 않는 대통령이기를 바란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
2016년 10월 26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비상시국대책회의는 이러한 현실을 우려하면서 대통령의 퇴진을 의미하는 결단을 촉구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성남도 21일(금) 저녁에 시국 대회를 열어 현재의 실상을 규탄하고 거리행진을 했다.

2) 또 하나 지적할 것은 한국 대형교회의 참회다.

그동안 친 권력적 행보를 보여 온 교회들은 철저하게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개헌을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하던 대통령이 급하게 개헌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면피해보려는 저급한 정치에 한국 보수 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이제 잡 무당에 의해 농락된 정치, 사이비교주와 신천지 등과 연관성이 거론되는 권력과 유착했던 한국 대형교회는 과연 어떤 낯으로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고 있는가?

1. 종교개혁은 진정한 근대의 확산

5백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서양 근대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사고  방식, 가치기준, 삶의 내용 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양을 닮아가는 것을 곧 국가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5백 년 전에 서양에서 일어난 근대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대는 14세기를 거쳐 15~16세기에 절정에 이른 르네상스부터 시작되었다. 르네상스(부활,재생)는 중세 기독교 세계 이전 서양을 지배했던 그리스적 가치들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신에 대한 인간의 부활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장악한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천하고 비루한 것으로 취급받던 인간의 가치가 사실은 가장 고귀하다는 운동이었다.

이런 움직임이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일어난 곳이 이탈리아 피렌체였고, 특히 피렌체의 천재적인 예술가, 사상가, 문학가, 정치가, 과학자들이 모여 새 시대를 열어가는 중심이었다. 르네상스 운동은 소수의 엘리트 중심의 운동이었고 이것이 평범한 농민, 상인들에게까지 확산되는 데는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 반해 르네상스의 절정기인 1517년에 본격화된 종교개혁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까지 급속도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실로 근대정신과 삶의 변화는 천 년 동안 서구를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틀을 돌파하여 새로운 신앙을 주창한 종교개혁을 통해서 확산되었다.

2. 교회 종소리가 세상의 기준이었던 시대

1)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삼종기도), 55.5*66cm, 1857~1859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밀레는 전 세계인이 좋아하는 화가다. 그는 자연 속에서 묵묵히 노동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민중의 삶을 그림으로써 그들이야말로 사회와 역사의 주인임을 표현하였다. 우리가 지난번에 보았던 이삭줍기와 함께 그의 대표작인 ‘만종’은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원래 제목 Angelus는 기독교인들이 아침, 낮, 저녁에 세 번 치는 종소리에 따라 드리는 기도를 삼종기도라고 한다.

붉은 기운마저 사라지고 어두워진 하늘을 까마귀도 높이 날아 집으로 향하는 늦은 저녁.

가난한 부부가 감자를 캐다가 기도를 드린다. 둘 다 옷은 남루하고 노동에 지친 손은 거칠다.
남편은 모자를 벗어 가지런히 손에 들었다, 마치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듯이!
아내는 고개를 깊이 숙여 정성을 표하고 전혀 곱지 않은 손을 움켜쥐어 간절함과 진정성으로 신을 향한다.

하루 종일 밭을 오간 신발은 흙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진정으로 기도를 드린다.

부부 옆에는 하루 종일 수확한 감자가 자루에 담겨 있지만, 저것으로 혹독하고 긴 겨울을 나기에는 너무 빈한해 보인다. 이 부부는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을까? 19세기 프랑스 농촌의 일상이지만 어느 웅장하고 거룩한 교회보다도 진정한 숭고함이 배어 있다.

고흐, '만종'(1880년)

농촌의 풍경과 그 속에서 성실하게 노동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의 삶을 경건하게 표현한 밀레, 그를 고흐도 사랑했고, 오늘 우리도 사랑한다.

살바도르 달리, '만종'(1932년)

역시 밀레를 흠모했던 살바도르 달리가 한 세기 후에 이 그림을 보고 불안을 느끼며

감자 바구니가 사실은 이 부부의 죽은 아이를 담은 관이었다고 했는데, 그 후 엑스레이로 관찰하니 바구니의 원래 밑그림이 네모 모양이었음이 밝혀져서 정말로 감자바구니가 아이의 시신을 담은 관이었다는 풍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밀레의 만종은 고단한 삶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농부의 모습에서 가난에 지쳐 아이까지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당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고발한 사회개혁적 그림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미술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달리의 불안한 해석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밑그림이 아이의 관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선명하지도 않고, 화가들의 밑그림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밀레의 이 그림에 대한 설명과도 맞지 않다. “옛날에 저녁종이 울리면 할머니는 언제나 일손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
늘 불안에 시달리던 살바도르 달리의 멘탈리티로는 지극히 가난하고 지친 삶 가운데서도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농민의 고백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저 농부 뒤에 흐릿하게 서 있는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춰 삶을 살았다. 아침 종소리에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종소리에 감사하며 하루를 정리하는 삶, 기독교는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완료되는 화석화된 종교가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의 중심을 이루는 축이었다. 삶이 곧 종교이고, 교회와 개인 삶의 궤적이 그리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개인의 의식과 삶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호흡하며 존재하셨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비록 가난하고 사회적 모순도 분명 존재했지만 지나치게 천박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은 더 이상 이 가공할 세상에 교회 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기독교는 이미 종을 울릴 자격과 기력을 상실했으며, 가까스로 아무리 종을 울려도 사람들은 더 이상 모자를 벗지 않으며,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지 않는다. 신앙은 이미 삶과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 한 구석으로 밀려났으며 낡은 전통과 취미 정도로 왜소해졌다.

바인가르텐 교회

지난 8월 독일 바인가르텐 교회를 방문했을 때 나는 교회 옆에 있는 푸어만 목사님 사택에서 지냈다. 바인가르텐교회와 성당은 바로 붙어 있으면서 매일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종을 쳤다. 그 종소리가 옛날에는 바인가르텐 주민들이 포도밭에 나가 일하고 쉬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을 표시해주면서 그들 삶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서양 중세를 막 내리게 하고 새로운 근대를 연 것이 르네상스인데 그것이 소수 천재들이 주창하고 특수 엘리트들에게 영향을 준 운동이었다면, 종교개혁이야말로 모든 구체적 인간들의 숨소리 하나에까지 영향을 끼치던 종교의 변화를 초래했고, 그것은 곧 대다수 인간의 총체적 삶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진정한 근대는 르네상스보다도 종교개혁에 의해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세계 역사는 그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다.

2) 종교개혁의 발단 : 교회의 허위의식

이미 교회가 중심이던 세계에 대해 곳곳에서 사람들이 반발하고 르네상스의 기운을 통해 교회의 지배 논리가 무너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러한 변혁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황이 한 일은 로마에 대규모 교황청을 다시 건축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맡은 당시 최고의 건축가 브라만테는 교회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 상상을 넘는 엄청난 규모의 교황청을 설계했다.

면죄부를 파는 성직자들.

크고 화려하고 멋진 교회 건축! 이것을 실현하려면 건축 기술과 함께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다. 가톨릭교회는 건축 헌금을 무리하게 걷으려고 했고 결국 일선 교회들에서는 해서는 안 될 일, 즉 교회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강제로 판매하게까지 했다. 즉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5백 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가 내놓은 대안은 대규모 교회 건축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교회의 권위를 되찾고 그 권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방향이었다.
마틴 루터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이 이러한 교회의 허위의식에 반발한 것이 종교개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3) 외형 집착은 패망에 이르는 길

5백 년 전의 이러한 중세 말기 교회의 모습을 보면 왠지 낯 설지가 않다. 로마 교회의 그릇된 행태에 반발하면서 새롭게 출발한 개신교, 특히 한국 교회의 모습이 중세 말기 무너지는 로마 교회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20년 후에 한국교회는 지금보다 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물론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계속 유지한다고 전제했을 때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는 신뢰는 상실하고, 사회가 교회에 기대하는 영성, 도덕성, 봉사, 헌신 등은 소홀했다는 점이다. 세상의 요청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는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거대한 건축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데 한국교회 전체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인데 주님은 온데 간데 없고 소수 교회 지도자들의 자기 과시가 섞여 있는 건축을 통해 신앙의 허위의식이 만연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버리셨다.

3. 인생과 역사의 모든 것 안에 계신 주님

1) 믿음과 신앙생활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이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사실 이것을 믿는 것도 오늘날에는 쉽지 않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어렵게 이 복음을 믿는다 해도, 그 믿음이 머릿속의 작용이 아니라 내 삶의 구석구석에 실핏줄처럼 퍼져나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이러한 삶을 믿음과 구별하여 성화(聖化)라고 한다.
오늘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 안에 존재하신다고 선언한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6절)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우주 만물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느끼고 고백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구석구석마다 계시며 내 몸과 영혼의 세포에 이르기까지 계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나아가 모든 인간은, 모든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에 진정한 생명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다.

2)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아

종교개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음성이 인생과 역사의 기준이 되게 하는 것이다. 과거 신앙의 선조들이 교회 종소리에 생활의 리듬을 맡겼듯이 다시 한 번 주님의 음성이 내 삶을 움직이는 리듬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99주년을 맞으며 1500년 동안 이어온 로마 가톨릭의 전통에서 왜 굳이 개신교가 개혁을 외치고 나왔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개혁을 주창한 개신교가 5백년 되었는데, 5백 년 전 허위의식에 빠져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심판하신 하나님의 뜻을 오늘 개신교, 특히 한국교회는 비장함으로 되새겨야 한다. 내년에는 종교개혁 기념 500주년 대 희년(Jubilee)을 앞두고 있다.

개혁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모든 요소에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구조에도 존재하신다는 것을 느끼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단순한 복음에로 과감하게 돌아가야 한다.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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