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길을 터 주오

살아있음이 두려운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필자에게는 국민학교) 때였다.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던 세대였기에 그 시절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전쟁이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던 그 즈음, 여느 때보다 심각하게 전쟁의 소문이 퍼졌다. 정확한 사건은 기억에 없다. 단지 가족들이 죽고 혼자만 남을 수도 있다는 상황이 두려워 밤에 울었던 기억과 만약 흩어지면 어디서 만나자고 가족 중 누군가와 약속을 한 기억만이 남아 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쉽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 것은 80년대 중, 후반 대학교를 다니면서였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살아있음이 미안했다. 진실은 감추어지고 권력욕으로 또래 대학생들의 연이은 죽음의 소식이 있던 그 시절.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 신은 살아있는지? 신학적인, 학문적인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단지 가슴 저 밑바닥 어딘가로부터 밀려오는 답답함과 절망의 물음이었다. 희망이나 믿음을 갖기에는 현실이 너무 암담했다. 길이 막혀버린 느낌이었다.

요즈음 또다시 나는 살아있음이 미안하다. 무수한 생명이 허망하게 떠나가는 현실들 때문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런 현실’을 알리고자 분신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47년 전 전태일 열사의 아픈 사건이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던 그 시절 이야기가 여전히 오늘의 이야기가 되는 현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각박한 현실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잊혀지는 현실. 20세도 안된 젊은이가 컵라면과 수저를 가방에 넣은 채 죽어야 했던 구의역의 현실. 죽음의 이유를 알고자, 진실을 알고자 하는 목소리조차 불순한 세력으로 호도되는 현실. 미수습된 가족들을 기다리는 팽목항의 가슴 아픈 현실. 표현하기조차 미안한 현실들.

1978년 출간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취재차 철거촌에 간 조세희 작가가 당시 철거민들의 현실을 기록한 소설이다. 28년뒤 200쇄가 인쇄되지만 작가는 오히려 이것을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한다. “억압의 시대”의 이야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지금 상황이 소설을 쓰던 때와 똑같기” 때문이다(지식채널e EBS, 부끄러운 기억, 2006년 5월 8일).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물대포가 사람을 죽이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1987년 '유신헌법 철폐 및 개헌'을 부르짖으며 비상시국기도회를 했던 서광선 명예교수는 말한다. “내 살아생전에 대통령을 탄핵하고 하야시켜야 한다는 설교나 연설은 두 번 다시 안 해도 되고 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오마이뉴스, “민주주의의 아픔, 그 댓가가 박근혜 게이트인가?” 2016년 12월 6일 인터넷 신문). 왜 이런 현실은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일까? 희망은 있는 것일까?

대학교 시절 답답한 현실과 무기력한 모습으로 죄책감에 가득 찼던 나는 종종 집에 들어가기 전 교회에 들르곤 했었다. 불 꺼진 컴컴한 그곳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에게 묻기도, 때로는 그냥 울다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희망을, 빛을, 길을 보여준 사람들과 공간이 있었다. 에스겔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말씀을 들려주었던 사람. 우연히 참석했던 한 교회의 시국모임에서 뒤로 돌으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축도를 해 주었던 그 곳. 누구였는지, 어디였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그 때 그 누군가의 말씀과 축도는 큰 울림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지 못하지만 주말마다 촛불을 드는 수많은 사람들, 추위를 뚫고 트랙터를 몰고 광화문까지 올라왔던 농민분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금도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믿음과 희망을 본다.

나의 한 지인은 요즘 한 방송사의 뉴스룸이 교회의 말씀보다 더 은혜롭다고 말한다. 더 믿음을 준다고 한다. 지난달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었을 때 분노했고 절망스러웠다(결국 구속되었다). 그 날 뉴스룸의 앵커는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이야기를 들려준다(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2017년 1월 19일). 중세에 성당 건립이 있기까지는 항상 평민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는 것을 앵커는 먼저 시청자들에게 상기시킨다.

두오모 성당은 13세기에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당은 완성되지 않는다. 둥근 지붕을 지을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다렸다고 한다. 언젠가 기술이 진보되면 성당이 완성되리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100년을 기다린다. 앵커는 말한다. “정상의 비정상화를 되돌리는 일, 악의 고리를 끊는 일”은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러나 463개의 계단을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기까지 100년의 지루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당지붕은 14세기에 완성된다. 믿음이었다. 변하리라는 믿음. 기술의 진보가 오기까지 그들은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성을 향한 행동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는 어릴적 나에게 믿음을 심어준 장소였고, 옳은 것, 진리를 따라 살아야한다는 것을 처음 가르쳐 준 장소였다.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성서의 이야기들은 나에게 힘이 되었고, 깨어있는 수많은 목회자분들을 통해 현실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동시에 축복을 빌미로 사람을 기만하고 등을 치며 돈을 갈취하는 현실들이 교회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려준 장소이기도 하다. 여전히 진실에 귀닫고,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 목회자들과 교회는 맞불집회 참여를 독려하기도 한다. 기독교인이라 말하기 부끄러운 현실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 누군가는 교회보다 뉴스룸이 더 은혜스럽다고 말한 지도 모른다. 더 힘이 된다고 말한 지도 모른다. 더 감동스럽다고 말한 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서 길을 찾는 지도 모른다.

중국 소설가 루쉰(1881-1936년)은 <고향>에서 희망을 길로 비유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대학교 때 들었던 마른뼈 부활의 이야기와 세상으로 나가는 우리의 뒷머리에 해 주었던 축도로 힘을 얻었던 그 때, 루쉰의 글은 나에게 또한 변화리라는 믿음을 주었던 글이기도 하다.

2017년 오늘의 현실에서 나는 광화문의 촛불을 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길을 본다. 변화의 믿음이 생긴다. 금방 끝이 날지, 1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릴 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때로는 흔들리고 불안하다. 그러나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광화문에 나간 날보다는 가지 못한 날이 많아서, 아픈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서 글을 쓰면서도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러나 요즘 나는 이전 나에게 길을 보여주었던 사람들, 그 장소들을 새삼 떠올려 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길에 묻혀 묵묵히 길을 가며 앞을 밝히는 이들을 만나고 싶다. 예전 나에게 길을 터주었던 사람들, 지금 나에게 길이 되어주는 그대들,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길을 터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박지은 (이화여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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