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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23)<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7.03.16 14:37

격전지(激戰地) 「사상계」

함석헌이 드디어 「사상계」를 향해 그 입을 열었다. 「사상계」를 ‘격전지’라 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 절통할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격전지 「사상계」!

1967년 들어서면서 100여 페이지로 줄어든 「사상계」가 1968년 중반을 넘으면서는 50여 페이지로 줄어 이제는 아무래도 새 주인을 찾아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장준하의 한 몸을 던져서 지킬 수 있는 사상계라면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상계」의 살림에는 수없는 스텝들과 필자들이 있어야 하고 인쇄소도, 제본소도, 판매처가 확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조직기구들을 제때 제대로 가동시킬 수 있는 절대의 힘(?)은 자금(資金)이었다. 그러나 장준하에게 또한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자금염출이었다. 이름이 국회의원이지 이미 그의 의원으로서의 세비(歲費)는 빚쟁이들에게 압류되었고, 일체의 후원금, 기여금등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미불된 필자들의 원고료가 큰 부담이 될 정도로 누적되어갔고, 지물점의 종이값, 인쇄소의 인쇄비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지체(肢體)를 잘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장준하는 그렇게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영(經營)이란 어떤 ‘주의(主義)’를 위한 투쟁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비정했다. 장준하는 결단을 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이제까지 인격적인 혹은 물질적인 거래에서 더 할 수 없이 좋은 관계를 지니어 온 이웃들과의 사이가 아슬 해져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될 터에...

“나는 장준하다. 장준하가 ‘인간’장준하(人間(張俊河)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인간 장준하와 사상계,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당연히 사상계를 포기해야지....”
마냥 사상계를 붙들고 있으면서 금전적인 거래에서 잡음이 일고, 게다가 비리가 발생하면서 서로의 약속을 깨트리게 되고, 만에 하나라도 거짓을 농(弄)하게 되는 경우를 상상해보라. 그것이 장준하일수 있겠는가? 장준하가 누구인데....
그가 곧 한국역사 그 자체 아니었나!

장준하는 말없이 철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자신의 또 하나의 생명이었던 그 「思想界」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나’ 장준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장준하는 그의 지인인 부완혁(夫琓赫)을 찾았다. 부완혁은 장준하에게 외롭고 힘들 때 속 털이를 할 수 있는 수삼인 중의 하나였다. 야당의 단일화, 야권의 대통령 단일후보 추대작업에 협력을 넘어 동력이 되어주기까지 한 동지이기도 했다. 

장준하는 부완혁에게 「사상계」와 엮인 자신의 심정을 털어보였다. 국회의원의 타직종의 겸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부완혁도 알고 있는터, 「사상계」의 경영상의 현황을 자초지종 전해들은 부완혁은 전혀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의 (정권으로부터의)압력이 있었다는데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탄압이 있어온다는 것은 이미 여기저기로부터 얻어들어 알고 있었지만 천하의 장준하로서도 이제는 방법이 없으리만큼 식물인간의 상황같이 되었다는 탄언(歎言)에는 부완혁도 애끓는 가슴을 가눌 수가 없었다. 

장준하가 어렵디 어렵게 부완혁에게 마지막 내어놓은 말이 “부(夫)형이 사상계를 좀 인수해줄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인수자금은 전혀 없이, 대신 장준하가 평생 정치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지 않다면서 의원직 생활을 마칠 때 역시 조건 없이 돌려받을 수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며...

1959년 「사상계」에 입사. 그 「사상계」의 판권이 부완혁에게 넘어갈 때까지 「사상계」의 하나의 역사로 살아온 유경환(1959년 입사, 1965년 사상계 편집부장 후에  「문화일보」 논설삭장역임)은 그가 쓴 “<사상계> 15년 小史,1953-68”에서 그 「판권이양의 현장」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국회의원 겸직조항에 걸려 장준하는 편집위원이며 전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부완혁과 함께 <의정서>를 쓰고 판권명의를 넘겨준다. 이 문서는 유경환∙고성훈에 의해 변호사 사무실에서 공증된다. 공증내용은 장준하가 국회의원직을 벗을 때 똑같은 무상양도(無償讓渡) 형식으로 판권을 되돌린다는 것이다. 김세영 신민당소속국회의원이 「사상계」에 자금을 댈 것을 장준하∙부완혁∙김세영 3자가 합의한다.”
이렇게 해서 장준하는 그 꿈의 업(業)이었던 사상계를 떠난다.

그런데 이 판권양도의 각서가 너무 헐렁했다. 「사상계」가, 아니 장준하가 사업에 대한 생리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의 생리에 대한 무지에 있어선 부완혁도 예외가 아니었다. <의정서>를 작성하기는 했지만 장준하가 국회위원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 판권을 부완혁이 인수한다는 것이 그 내용의 전부였으니, 이미 그 의정서는 적지 않은 문제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판권이 인계된 후 장준하와 부완혁, 부완혁과 장준하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란은 심각하기 그지없었고, 이로 인해 싱그러웠던 두 지인의 관계는 다시 꿰맬 수 없도록 깨져 버렸다. 두 사람이 다 예의 학자들과는 물론 다른 점이 있었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서생(書生)이라는 데는 동색이었으니....

두 사람의 내심(內心)은 달랐다. 판권을 거머쥔 부완혁은 “판권이 내게 넘어왔으니 장형의 의원직임이 끝나 다시 넘겨줄 때까지는 내가 경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장준하는 “내가 「사상계」를 유상양도(有償讓渡)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운영자금 역시 부완혁 자신이 내는 것도 아닌 터에 편집권만은 부분적으로는 상의를 해야겠지만 자신이 가지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래서 장∙부의전(張夫之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필자가 두 사람 다 사업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둘의 관계는 험상스러워져갔다. 시대를 보는 눈이 같고, 인생관, 정치관이 같다는 것으로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넘을 수는 없는 것이니 그럴 수 밖에는 없었다. 부완혁은 어떻게나 장준하가 현실적인 문제로 주변의 구설수(口舌數)를 크게 올리는 일은 이 사건 말고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아 장준하와 사상계!

장준하라고 부완혁과의 쉬 끝나지 않는 이 싸움에 어찌 아니 심중에 답답함, 불편함이 없었겠는가? 오죽하면 함석헌이 장준하와 부완혁과의 이 싸움의 「사상계」를 “격전지(激戰地)”라 했겠는가. 격전지(激戰地) 사상계!

함석헌은 이 “격전지「사상계」(思想界)를 쓰면서 수차례 홀로 울었다고 했다. 어찌 아니었을까? 함석헌과 장준하가 혼∙신을 쏟아 키워온 사상계 아니었던가?
그 존엄스럽던 서판(書板), 나랏땅 온 지식인이, 온 민중이 마치 가보나 되는 듯 품었던 품고 다니던 그 잘났던 서판. 장준하는 그 서판이 있어 함석헌을 스승으로, 동지로 만날 수 있었고 함석헌은 장준하가 하늘 뜻 속에 준비한 그 서판이 있어 한국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부터 「선생」으로 혹은 「바푸」로 까지 일컫게 되는 세계사상의 반열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인데, 그 「사상계」가 지금 운명의 목전(?)에 놓여버린 것이다. 사상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정말 절통(切痛)을 금할 수 없는, 어쩌면 어처구니없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상계」가 정말 박정희 난도(亂刀)질에 그 명을 거두게 되는데, 「사상계」폐간의 직접적인 이유는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저 유명한 담시 「5적」(五敵)때문이었다.

필자가 박정희 악정(惡政)에 의한 폐간을 ‘절통’한 혹은 ‘어처구니없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증언한 것은 두 사람의 정치현실관이 달랐다거나, 박정희의 군인정치에 대한 인식이 달라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1970년 5월호 「사상계」의 김지하의 시 「오적」의 발표는 장부(張夫)의 일심의 합의로 가능한 것이었다. 박정희 그 천벌 받을 검정(劍政)에도 개의치 않는 이름 그대로 장부(張夫∙丈夫)아니던가?.....그런 그들이 현실문제 앞에서는 깨어져 버렸으니....그래서 함석헌이 그 싸움터(?)인 「사상계」를 격전지라 했고, 장∙부의 싸움을 ‘격전’이라 했다. 

함석헌은 장부를 탄(歎)한다. 장부의 싸움이 시대를 건지기 위한 싸움이 아닌 분명한 이해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함석한의 장부의 ‘탄’은 곧 바로 박정희 군인정치의 언론탄압으로 옮겨간다. 
“사상계가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장준하고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 되고 부완혁이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 됩니다. 누가 이겨도 사상계는 자살입니다. 두 사람이 의견이 다르다는 것 싸운다는 것은 그것을 바로 듣는다면 이렇습니다.
“사상계가 죽게 됐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사상계가 다 죽게 되어도 누가 살려주려 들지도 힘을 쓰지도 않기 때문에 내분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시비를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옳고 그름은 개인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5.16」에 대하여는 그 일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도덕적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도학선생의 도덕이 나라와 시대를 못 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잘잘못을 가리는 동시에 그 역사적 시점에서는 박모나 김모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됐던가 하는 것을 가려내야 역사는 구원됩니다. 사상계의 비극의 원인은 개인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이름 있는 문필인이요. 장준하의 대표적인 연구가로, 전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바 있는 김삼웅은 그의 평전 「저항인 함석헌」에서 이 부분을 명쾌히 풀어낸다.
“함석헌은 사상계의 분열이 장준하와 부완혁 간의 사적이해가 아닌 군사정권의 탄압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5∙16 쿠데타를 주동한 인물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만 ‘격전’의 원인을 알게 된다고 풀이한다....이 잡지가 박정희의 탄압으로 고사상태가 되고 일시 부완혁에게 넘겨주었던 판권이 회수되지 못하면서 함석헌과 장준하는 매체를 잃어버린 삼손이 되고 말았다.”고.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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