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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3월 19일 사순절 셋째주일 요한복음 4:5-42<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7.03.21 13:10

신학적 관점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성경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 만날 때 그분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오해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 서 있었던 익명의 여자도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부류의 사람에 속했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가 어떤 분인지 모르고 지나갔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점차로 불신에서 신앙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눈먼 상태에서 눈 뜬 상태로, 무지에서 지식으로, 오해에서 이해로 옮겨갔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는 달리 이 여자는 예수가 행한 이적을 본 적이 없었고, 예수가 하늘로부터 온 선생님이라는 것(3:2)도 들어 보지 못했다.

야곱의 우물에서 이 여자가 처음 만난 예수는 그저 목이 말라 마실 물을 찾고 있는 낯선 유대인 남자였다. 이 남자가 이 여자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청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에선 매우 놀랄만한 요청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요청을 통해 예수는 당시 중요하게 여겨지던 종교, 인종, 성에 근거한 사회적 경계를 넘어갔기 때문이다. 예수가 먼저 이 여자에게 말을 건 것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가 그 여자가 속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참 빛(1:9)이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빛이 세상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여자가 아직 분별할 수 없었지만, 진리의 말씀이 그 여자에게 말해졌다.

오늘 본문은 반어법(irony)으로 가득 차있다. 요한복음의 다른 이야기에도 반어법이 많이 사용된다. 세상을 사실적으만 바라보는 사람은 반어법적으로 표현되는 예수의 모습과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눈에 명백하게 진리로 보이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진리이지 완전한 진리는 아니다. 보이는 것과 실체, 혹은 외양과 본질 간의 차이 때문에 반어법은 종종 유머나 비극 (혹은 둘 다)의 형태를 띤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를 무엇인가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으로만 이해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예수에게 줄 수 있는 것(우물물)>이 아니고, <예수만이 그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것(생명의 물)>이라는 사실(7-15)을 그 여자는 깨닫지 못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부분적인 진리만을 얘기했다. 예수는 그 여자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16-18) 전체 진리를 밝혔다. 그 여자는 예수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다 아는 것을 보고 그가 예언자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가 그 여자의 삶에 관한 진실을 알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19-24), 특별한 종류의 예언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여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갈릴리 출신의 이 유대인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25-26) 물항아리를 우물가에 놔두고 마을로 돌아가 이웃에게 “와서 보라”라고 외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여자는 눈으로 보이는 외양보다 더 깊고 넓은 실체를 분별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8-29)

사마리아 여자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반어법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랍비여 잡수소서”(31)라고 말했으나 예수가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32)라고 말씀하시자 어리둥절했다. 상식에 근거해서 그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가 어떤 종류의 음식에 대해 말씀하시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예수는 벌써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에 대해 증언할 때야 비로소 예수가 어떤 분인지 이해하게 된 것처럼, 제자들도 와서 보라(1:46)고 증언할 때야 비로소 예수가 어떤 분인지 깨닫게 되는가 보다.

반어법(이 본문과 요한복음 전체에 나오는)은 육신이 되신 말씀인(1:14) 예수가 이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1:10)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분인지 묘사하기 위해서 저자가 택한 문학적 기법이다. 세상은 자신이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요셉의 아들, 나사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은 온 세상 사람을 대표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라고 질문했다. 예수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라고 말씀했을 때,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바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비판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6:41-42)라는 태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람들은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만을 본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성령의 도움으로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1:29)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다나엘이 “와서 보라”는 빌립의 부름에 응답했을 때 비로소 그는 예수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1:49-51)

반어법은 요한이 택한 유용한 문학적 기법에 불과한가? 요한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반어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 자체가 반어법적이기 때문이다. 반어법은 요한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문학 기법 중의 하나가 아니다. 여기서 내용이 형식을 정한다는 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본질이 장르를 정한다. 예수는 진정으로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 요셉의 아들이다. 그런 겉모습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에 관한 완전한 진리는 아니다. 예수는 동시에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그 말씀이다.(1:1) 요한복음이 초대교회의 예수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칼케돈 신조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는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고 완전한 신이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의 신비는 그분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분이 말씀(Logos)이라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태초부터 요셉의 아들은 육신이 된 말씀이었다. 요한복음에 반어법이 많이 나오는 것은 요한이 반어법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그가 말하는 내용이 반어법적이기 때문이다.

George W. Stroup, Professor of Theology,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주석적 관점

사순절 둘째, 셋째 주일의 요한복음 본문에는 독특한 두 인물이 소개된다. 3장의 밤에 찾아와 어둠으로 사라진 니고데모와. 4장의 우물가의 사마리아여인이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여인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두 인물은 이어져서 나오는데 이 둘의 대조를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내부자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이다. 그는 남자이고 이름도 있는데 하지만 예수를 밤에 찾아왔다. 사마리아 여인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외부자이다. 그녀는 여자이고 이름도 없었지만 예수를 백주대낮인 정오에 만났다. 이 두 사람이 예수와 한 대화를 대조하면 더 놀랍다. 니고데모는 그의 종교적 체계 속에 갇히어 나오지 못했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그녀의 종교적 배경을 뛰어넘어 예수와 신학적 논쟁을 하게 된다(20절). 니고데모는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3:17)라는 것을 듣지 못했지만,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실제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4:26). 니고데모의 마지막 질문이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3:9)라는 그의 불신앙을 보여주었다면, 우물가 여인의 마지막 말은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로 온 동네에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5절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1절에서부터 읽어야 할것이다. 3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은 장소를 설정하고 있다.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느지라”는 지리적으로도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이 여행의 신학적 중요성을 설정하고 있다. 예수가 수가라는 동네에 이른 것은 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신다”라는 선언을 성취하는 계시의 새로운 증언자가 되게 한다. 진정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는 데 긴요하다.

우물가의 사마리아여인은 예수의 제안에 수동적으로 받지는 않는다. 그녀는 즉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사회적 장벽과 한계를 인식했지만(9절), 동시에 그녀는 예수의 권위에 대해 그녀의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신앙(12절)으로 도전했다.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그녀도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단순히 가능성(15절)에 대해 질문하기 보다는 예수에게 자신이 제안 했다.

많은 주석가들이 여인의 “죄”와 16-18절에 묘사된 대로 예수의 “용서”에 대해 집착하고 있지만, 본문 어디에서도 그녀가 저지른 죄와 예수의 용서에 대해 단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가 그녀의 남편에 대해 질문한 것은 그녀가 어쩔 수 없는 결혼관계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질문은 니고데모의 경우와 같이 그녀에게 예수가 누구인지 이해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였고, 그 대화는 성공했다. 그녀는 예수가 선지자임을 알았다(4:19). 또한 이 복음서에서 죄는 행위에 연관된 도덕적 규범이 아니다. 죄는 불신앙 즉 예수를 주님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다.

이 여인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하자, 그녀와 예수간의 대화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오랫동안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마땅한 예배 장소가 그리심산인가 예루살렘인가에 관한 신학적 논쟁으로 발전한다. 본질적으로 예배 장소에 관한 그녀의 질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대한 이 복음서의 근본적 문제를 보여주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다(1:14). 결과적으로 예수는 여인에게 자신이 바로 그 그리스도임을 나타내신다(4:26). 이것은 요한복음의 첫 번째 “내가 그니라”는 절대적 선언이다(비교6:20;8:24,28,58;13:19;18:5,7). 마지막 “내가 그니라”라는 선언은 로마군인 600명을 쓰러지게 만들었다(18:5-7)

예수는 이 여인에게 우물가에서 하나님을 알게 했고, 그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추수를 돕는 자들과 함께(34-38절) 공동증언자가 되게 했다. 이 여인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신하지 못했지만(4:29절의 헬라어 원문이 부정적 대답을 초래한다), 그녀는 자신을 무언엔가 가로막히는 것을 상징하는 물동이 뒤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동네사람들에게 예수와 만나도록 초대한다. 그녀는 예수가 그의 참된 정체성을 그녀에게 계시하셔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게 한 방식으로 예수께 반응한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우리 자신이 예수와 만나서 자신이 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를 또한 변하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여인이 자신의 동네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예수가 그의 첫 번째 제자들에 하신 “와서 보라”(1:39)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다. 그녀의 초대와 경험을 나눔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39절). 이어지는 장면도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첫 번째 제자들에게 그랬듯이 사마리아사람들과 함께 유하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근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동사 “유하다”는 meno라는 말로 “거하다” “남아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예수와 함께 함이 사마리아사람들이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는 고백을 하게 했다. 여기에서 구주라는 고백은 요한복음에서 유일하다. 예상치 못한 증언자로서 이 사마리아 동네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3:16 말씀의 성취를 이룬다.         

Karoline M. Lewis, Assistant Professor of Biblical Preaching, Luther Seminary, St. Paul, Minnesota

 

목회적 관점

언뜻 보기에 예수님이 수가성의 우물에서 만난 여인은 니고데모와 너무 다르다. 그녀는 교육받지 않은 여성이고, 배우는 사람이며, 니고데모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는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녀는 사마리아인이고 그는 유대인이다. 그녀에게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지만, 그는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도덕적 지도자이다. 그녀는 정오에 예수님을 만났고, 그는 한밤중에 온다. 문자적으로 그 여인은 니고데모를 돋보이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 자신이 복음 담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1)

이 여인의 한 가지 특징은 그녀가 거의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자의 세상에서 여성인 그녀는 유대교의 믿음의 관행과 지리학, 전통적 도덕성, 그리고 복음에 대해 낯선 사람이다(수세기 동안 그녀는 독자들에게 이름 없는 여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외부인에 지나지 않는가? 그녀는 자신의 상태나 행동 때문에 사람들에게 낙인찍히고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을까? 우리는 이것을 본문에서 결정할 수 없다. 거기서 더 나아가는 것은 소외된 사람이라는 여성의 상태를 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의 눈에는 이 여인이 아무도 아니(nobody)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이름조차 알리지 못하고, 성별, 종교적 성향, 사회적 지위, 개인적 습관으로 인해 예수와 그녀의 지역 사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 여성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한 그녀를 무시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은 쉽게 입을 수 있는 외투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아픔을 피하기 원한다. 그들은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소중히 여겨지고 싶어 한다.

이 본문은 낙인찍히기의 굴욕감이나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고통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복음이다. 예수께서 이 여자에게서 떠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대화에 참여시키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며칠을 마을에서 보낸다. 이 여인, 그녀의 공동체, 그들의 복지는 그녀가 아무도 아니건 어떻건 상관없이 예수에게 중요하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것은 도전적인 소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교회와 교인들에게 그들에게 아무도 아닌 사람들(nobodies)이 예수의 눈에는 어떤 사람들(someboies)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가? 바로 우리가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교회의 이웃이거나, 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낯선 사람들이거나, 예수를 믿고 믿음의 가정으로 환영받을 잠재 집단일 수 있다. 이 본문은 우리가 그리는 신앙 공동체의 경계가 너무 좁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종종 아무도 아닌 사람들을 제외하려고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는 내부자뿐만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도 제자로 환영한다.

그는 또한 믿음의 여정을 막 시작한 사람들을 환영한다. 그 여인의 두 번째 특징은 그녀가 새로 믿기 시작한 사람이며, 예수님과 대화하는 동안 걸음마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녀를 기다려 주신다! 비유를 설명하고 계속 대화하려는 예수의 의지는 니고데모와의 참을성 없는 토론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한 것처럼 이 여인을 놀리는 것이 아니며, 우뇌 언어에 대한 좌뇌의 반응에 대해 그녀를 나무라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부모처럼, 그녀를 양육하고 그녀를 이끈다. 그는 니고데모에게는 엄격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친절하다.

나는 한때 예수의 엄격함과 부드러움에 관해 설교하기를 좋아했던 한 목사를 알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나란히 놓고 예수의 모순적인 성품을 보았다. 예수는 대립할 수도 있고 공감할 수도 있다. 그는 완고할 수도 있고 관대할 수도 있다.

그 여인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격려하는 예수에게서 그의 부드러움을 본다. 믿기 시작한 사람처럼 느끼고 걸음마를 하는 신자라면 누구나 용기를 낼 수 있다. 예수는 우리가 그를 향해 나아가면서 이해를 키울 때 우리를 지지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고 넓게 하며, 그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인정하기를 원한다.

예수는 또한 엄격할 수 있으며, 그 여인도 그것을 맛보았다. 그와 대화하는 도중에 그는 그녀의 인생을 드러낸다. 그것은 예수가 그녀의 남편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녀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 것을 볼 때 노출된다. 그녀는 예수에 대해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 맞혔다"(29절)고 말한다. 그녀의 과거를 열어 놓은 예수와 이 여인은 솔직하게 마주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대화와 고백 때문에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

대신에, 예수와의 만남은 그녀가 가서 그녀의 모든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이 사람에 관해 이야기할 용기를 주었다. 성전에서 죄를 고백했을 때 주님을 섬기기 위해 죄로부터 해방되었던 예언자 이사야(사 6:1-8)처럼 이 여인은 예수가 그녀의 필요와 실패를 드러내고 나서 제자가 되기 위해 자유로워진다. 그녀는 예수의 증인이 된다.

이 이야기는 여인의 극적인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소외된 사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증인이 된다. 믿음의 초보자로 시작해서 예수 자신이 보내신 사도가 되어 그분을 대신하여 간증하게 된다.​2) 그렇게 그녀는 다른 여성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들, 새롭게 믿기 시작한 사람들, 그리고 과거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모델이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 가장 가능성이 낮고 심지어 아마도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신앙의 가정으로 맞이한다.
 
Deborah J. Kapp, Edward F. and Phyllis K. Campbell Associate Professor of Urban Ministry,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Illinois

 

설교적 관점

만일 누군가 나에게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를 말해달라면 나는 이 이야기를 택할 것이다. 여기에 평생설교할 본문이 있다. 여기에 물을 퍼올릴 두레박을 지닌 본문이 있다. 우리는 그 곳으로 내려가서,  마르지 않는 우물로부터 생수에 대한 그리고 깊이 그것을 마시는 것에 대한 설교를 계속해서 퍼올릴 수 있다.

갈급한 설교자들은 이 본문이 필요하다. 우리 설교자들은 그 우물과 그 안에 담긴 물 그리고 그것을 끌어올릴 두레박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옆에 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그 분 [예수]이 필요하다. 아마 첫 번째 설교적 과제는 단순하게  우리가 비어있다는 것을 느끼고 마시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우물에 늦게 도착해서 마실 물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낯선 사람을[예수] 만나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보라. 또 우리 자신을 메마르고 비어있어서 설교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느껴보라.

그런 다음 우리가 두레박을 우물로 내려보내고 이 낯선 사람은 계속해서 우리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라. 그 말씀이 우물의 물처럼 시원해서 갑자기 우리의 얼굴에 닿아 우리가 그가 누구인지를알 때까지(we know who he is!) ,  우리 자신이 그의 말씀에 빠져있다고 느껴보라. 물이 올라올 때까지 계속 두레박을 당기는 것 그것이 설교의 과제가 아닐까? 날마다 우물 곁에서 설교자는 기다리며 서 있는 것이다. 여기에 평생 설교를 위한 본문이 있다. 당신의 두레박을 이 본문에 담그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몇 가지를 소개한다.

예수께서 먼저 시작하심을 주목하라 (Notice That Jesus Initiates)

예수께서 우리와 대화하지 않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다. 이번에는 우물 곁에 서 있는 사람이 여성이자 사마리아 사람이다: 두 가지 경우 다 대화불가능한 상황이다. 우리는 대화불가상황을 본문을 보고 추론해서 몇 가지 분명한 이유를 첨가할 수 있다: [여인의]어두운 과거, [사마리아 인이라는] 멸시받는 상황등.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와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이러한 것들을 깨트린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충격을 받는다. 설교자나 목회자로서 우리는 외부자 (outsiders)와 대화함으로써 규칙을 깨트리는 예수의 역할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성찰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 어떤 규칙을 깨트리는가? 그는 어떤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의 삶을 구원할 그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어떤 경계선을 넘고 있는가? 인간을 정의할 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또 사회적 현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때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the way it is)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거나 알기 원하는 것들을 판단하려고 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경계선을 넘어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예수께서는 설교자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 어떤 전통, 관습 그리고 규례들을 넘어서야만 했는가?

목마른 사람은 예수임을 주목하라 (Notice That It Is Jesus Who Is Thirsty.)

사마리아를 지나서 걸어가는 일은 길고도 피곤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마을로 먹을 것을 사러간 동안 우물 곁에 앉아있다: 이 곳이 예수와 그 여인이 만나는 장소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에 가서 마시는 일은 어렵지 않아야만 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음에 주목하라. 그는 그 여인에게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할 기회를 준다.

이 장면은 매우 단순하다: 예수는 우물 옆에서 목말라하고 있고 우리는 두레박을 가지고 있다. 뒤따르는 은유적인 대화는 그 의미를 알 때까지는 의미가 없다. 사랑으로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주는 일과 같은 작은 일이 구원에 이르는 여정의 시작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그 낯선 분[예수]을 만날 때까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알아보는 순서에 주목하라: 예언자 그 다음에 메시아 (Notice the Order of Recognition: Prophet, Then Messiah.)

치유 (a healing), 축사(an exorcism),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등은 항상 우리의 관심을 끈다. 예수께서는 묻지도 않고 그 여인의 생에 관하여 몇 가지 상세한 일들을 말해주자 그녀는 매우 고조된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19절), 아마 그녀는 메시아임을 알아보기 전에 이 분의 초월적 능력을 더 보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은 보기에도 놀랍고 부인하는 것도 어렵다: 세상의 죄를 안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전적으로 그 무엇이다. 아마도 예언자는 시원한 물 한 잔 같은 것일 수 있다: 심원한 존재가 눈에 보이게 드러난 것. 여기에 영혼과 몸에 물을 공급하는 여정의 첫 걸음이 있다.

말하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말한 것에도 주목하라 (Notice What Is Said as Well as Not Said.)

이 여인이 메시아와 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녀는 물동이를 놔두고 마을로 가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간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29절)라고 외친다. 이 문장은 완성되지 않았음에 주목하라. 그녀는 아마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와서 보십시오 내가 했던 모든 것을 알고있는 분... 그래도 나를 사랑해준 분!”그녀는 마지막 4 단어 (그래도 나를 사랑해준 분, and loved me anyway!)를 말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행동에서 그리고 기쁨으로 달려간 일에서 그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그 여인이 지금까지 행했던 모든 것들”은 긴 목록의 죄이다: 그것은 이웃들이 판단해볼 때 항상 그녀 앞에 있다. 예수는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용서해준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들었던 어느 것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롭고 생기있게 하는 것이다. 그녀가 이전에 했던 모든 것을 말했고...그래도 그녀를 사랑했던 그 분이... 그녀의 삶을 구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인은 하나님을 보게된다. 그녀는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나간다.

Anna Carter Florence, Peter Marshall Associate Professor of Preaching,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각주*
1)  R. Alan Culpepper, The Anatomy of the Fourth Gospel: A Study in Literary Desig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91.
2)  Culpepper, Anatomy of the Fourth Gospel, 137.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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