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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정권의 혹독한 탄압으로 사상계가 부완혁에게로 넘어간 후 평전작가 김상웅은 함석헌과 장준하를 일러, “매체를 잃은 삼손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랬다. 장준하는 그런대로 의회생활로 나날을 이어갔지만 글의 사람 함석헌은 한동안 정말 답답한 나날의 싸움을 싸워가야 했다. 글을 못 쓰게 하고 말을 못하게 하는 소위국가권력이라는 것과 싸울 수 있는 수단이 그래도 「사상계」였는데, 그 「사상계」가 이제는 남의 손(?)으로 넘어가버렸으니...

 

그러나 함석헌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래서 일단 생각이 잡히면 즉시 그 생각은 구체적인 행동이 되어간다. 그것이 함석헌이 위로부터 받은 은총이었다. “하늘은 말이 없다. 땅도 말이 없다. 정말 한, 큰 그이는 말하지 않는다. 말이란 하늘이 주어서만, 받은 것이 있어서만 할 수 있는 것, 그 실상을 예수에게서 본다. 내 말은 내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주셔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말을 해야 했다. 하늘이 준 말이 있어서였다.
하늘의 말을 받은 사람, 함석헌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하늘도, 땅도 아니었다. 하늘, 땅의 말을 대언(代言)해야 하는 자였다.
말을 해야 한다.

 

장준하가 실제로 「사상계」에서 손을 떼면서 함석헌도 「사상계」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이 그의 속에 노적(露積)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언듯언듯 「말씀」,「편지」같은, 1956년 「사상계」를 만나기 전후로 프린트로까지 발행해내던 개인지(個人誌)생각이 스쳐가기도 했다.
그런데 함석헌의 일감은 밖에서 만들어져오기 시작했다. 사상계 대표가 바뀐 이후, 사상계에서 함석헌의 글을 읽을 수 없게 된 열성독자들이 함석헌의 글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사상계」의 독자들이었지만 사실은 함석헌을, 함석헌의 글을 읽기 위해 「사상계」의 독자가 된 이들이었다.

 

열성독자들이 함석헌을 찾기 시작했다. 전화로, 편지로, 직접 용산구원효로 4가 70번지, 좁디좁은 골목길을 더듬어 올라 함석헌의 자택을 찾아들었다.
“선생님, 왜 글을 안 쓰십니까?”
“선생님, 글을 쓰셔야 합니다.”
“선생님, 지금 저희에게 절대 필요한 것이 선생님 말씀입니다.”
심지어 어떤 방문자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을 선생님 개인 것 인줄 아십니까? 선생님은 결코 선생님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우리들 민중 모두의 것입니다....”
함석헌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어 말할 것을 강청하는 이들이 참으로 고마웠지만 때로는 언짢기도 했다.
“언제 내가 너희들 선생노릇 하겠다더냐...?”

 

그런데 1970년 1월 어느 날, 장준하가 함석헌을 찾아 왔다. 자신도 이제는 「사상계」의 외인이 된지 두해가 지났고, 함석헌을 찾아와 만나는 것도 예같지 못했다. 대단치 못한 의회생활이랍시고 시간에 쫓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잊지 못하는 것이 “선생님 함석헌”이었다. 장준하가 허기지고 힘이 빠질 때마다 찾는 곳이 “선생님 함석헌” 이었다.
“선생님 요즘 참 힘드시지요?” 글판을 빼앗긴 “생각하는 글 사람” 함석헌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느끼는 장준하의 위로였다. 함석헌은 요지음의 현상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그래... 참 어려워. 「사상계」 그렇게 된 후 내가 더 불편해졌어. 「사상계」를 구독해온 열심있는 젊은이들이 견딜 수 없도록 성화야. 나더러 ‘왜 말을 안 하느냐?’, ‘왜 글을 안 쓰느냐?’는거야. 답답해. 아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말없이, 조용히 듣고 있던  장준하는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 그럼 우선 개인지(個人誌)형식으로라도 잡지를 하나 하시지요...선생님 하고 싶은 말씀만 하시는 것으로, 필자 걱정마시구요. 우선 시작을 하시면 그 다음 문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리라 믿습니다.”
“글세...”

 

함석헌은 이전의 개인잡지 형태로 출판했던 「말씀」, 「편지」, 「영단」등을 떠올렸다. 장준하가 돌아가면서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함석헌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선생님, 제가 의정생활 제대로 하 수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말이...
장준하가 다녀간 그날 밤을 함석헌은 거의 뜬 눈으로 세웠다. 평소에도 무릎을 꿇고, 꿇은 그 무릎위에 두 손을 모은 모습으로 몇 시간씩을 혹은 온 하루를 지내곤 하는 그였지만, 장준하가 다녀간 이 밤은 이전과는 그 유가 다른 불면의 밤으로 보내야했다. 함석헌은 불면의 그 밤을 보내면서 줄곧 장준하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는 잡지를 만든다?...”
다음날 아침, 함석헌은 단안을 내린다.
“그래, 글을 써야지. 주시는 말씀을 담아놓을 수는 없지...”

 

 

잡지를 발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함석헌에겐 이미 자신도 모르는 새 그 잡지의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 그 이름은 「씨ᄋᆞᆯ의 소리」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씨ᄋᆞᆯ」이란 첨삭(添削)이 필요 없는 「민중」이다. 함석헌의 그 「씨ᄋᆞᆯ」을 첨 말한 이는 함석헌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유영모였다.
유영모 선생님이 「대학」을 처음의 “대학지도재명명덕(大學之道在明明德), 재친민(在親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을 우리말로 이렇게 옮기셨다.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ᄋᆞᆯ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무름에 있나니라 (전집 4권 28쪽)

 

함석헌이 전하는 말대로는 이렇다.
“어쨌건...(씨ᄋᆞᆯ이란) 민(民)의 뜻으로 쓴 것입니다. 보통은 없는 것을 새로 지어낸 말입니다. 지금 민의시대여서 우리는 늘 민(民)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민, 인민, 평민(서민), 민권, 민생...입니다. 그런데 거기 맞는 우리말이 없습니다. 국(國)은 나라라 하면 되고 인(人)은 사람이라 하면 되지만 민(民)은 뭐라 할까? 백성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백성(百姓)의 음 뿐이지 순전한 우리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민(民)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씨ᄋᆞᆯ」이라하면 어떠냐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은 내가 생각해 낸 것은 아니고 유영모 선생님이 먼저 하신 것입니다. 언젠가 대학 강의를 하시다가 ‘데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을 풀이하시는데,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ᄋᆞᆯ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묾에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오래되어 말이 좀 틀린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민(民)을 「씨ᄋᆞᆯ」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것이 참 좋아서 기회 있는데로 써와서 이제 10년이 넘었습니다.”(전집 14.323-324)

 

함석헌과 상놈 → 민중 → 시ᄋᆞᆯ.
민중은 함석헌의 존재이유요, 존립기반이었다. 부잣집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였지만 참으로 이상스러웠던 것은 그의 부모가 걱정하리만큼 그는, 바닥살이들에 대한 열심 속에 자랐다. 청소년시절 그 바닥살이들은 함석헌의 가슴 속에 ‘상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었고, 청장년 시절엔 민중, 50대 후반(유영모를 통해) 「씨ᄋᆞᆯ」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는다. 이후 「씨ᄋᆞᆯ」은 그가 90을 하나 앞둔 나이로 그의 몸을 벗을 때까지 철학, 사상을 넘어 그의 생(生)의 과제가 된다.
상놈 → 민중 → 「씨ᄋᆞᆯ」!

 

함석헌은 드디어 「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한다. 1970년 4월이다.
함석헌은 그가 창간하는 「씨ᄋᆞᆯ의 소리」 둘째 호(1970.5)에서 「씨ᄋᆞᆯ의 소리」 발행목적을 선언적으로 밝히고 있다.
“「씨ᄋᆞᆯ의 소리」를 내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천하 씨ᄋᆞᆯ이 다(제) 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함석헌에겐 함석헌만의 신앙고백(?)이었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것이었다. 역사와 정치에 일말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아는 소리, 하늘 소리였지만 함석헌의 경우 그 의미가 달라진다. 거기 함석헌 자신의 생(生)이 실렸기 때문이다.

 

“우주에서는 하나님이 전(全)이요, 역사에서는 사람(民衆)이 전(全)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말씀은 민중의 입에서 나와야 한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다. 종교도 철학도 정치도 문화도 미술도 음악도, 다 이 시대의 말씀을 해보자는 것이지만, 정말 시대의 뜻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은 민중이 직접 하는 말이다. 그것을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라 한다. 그것은 바람 같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풍설(風說)이라한다. 그것은 또 물과 같이 막을 수 없이 번져나가기 때문에 유언(流言)이라한다. 또 그것은 버러지같이 조그마하면서도 잡을 수 없이 날아다니며 콕콕 쏘아대는 것이기 때문에 비어(蜚語)라고 한다. 종교에서는 이것을 더럽게 여겨 ‘망령된 말’이라하고, 철학에서는 이것을 업신여겨 ‘무식한 소리’라하고, 예술에서는 이것을 깔보아 ‘야비한 소리’라 하고, 정치에서는 더구나 밉게 보아 비국민(非國民)이라 악선전하고 다스리려하지만 역사의 나감은 이것(민중)없이는 안 된다. 물론 거기 어느 정도의 점잖지 못함, 비꼬아 댐, 격분, 거슬림, 마구함, 불안(不安)됨이 들어있는 것은 사시이지만, 그것은 사회의 바닥을 이루는 민중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전집 2.53)

 

함석헌은 「사상계」라는 더할 수 없는 글판이 있어 한국현대사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이제까지 엎디어 밟혀온 민중들로 일어나 제소리(하늘소리)를 내지르는 자리로 「씨ᄋᆞᆯ의 소리」를 이뤄내는 것이다. 민중의 소리판으로서 말이다.